항목 ID | GC025004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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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墳墓 |
영어음역 | Bunmyo |
영어의미역 | Grave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
집필자 | 여성구 |
[정의]
경기도 안산시에 있는, 사람의 시체나 유골을 땅속에 파묻은 곳.
[개설]
안산 지역에는 선사시대의 무덤으로 청동기시대의 고인돌과 움무덤이 남아 있으며, 삼국시대의 분묘로는 아직 확인된 바 없다. 고려시대의 분묘 1기가 조사되었으며, 현재 대부분의 분묘는 조선시대의 것이다. 조선시대의 분묘는 사족의 동향과 집성촌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으나 1970년대 후반 도시화와 공업화로 인해 많은 분묘가 훼손되었고, 다른 곳으로 이장하기도 해 실체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
[선사시대]
신석기시대의 조개무덤에서는 간혹 시신이 발견되는 무덤의 유지가 있기도 하나 현재 조사된 안산의 조개무덤에서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청동기시대에는 고인돌이 조성되었는데, 현재 월피동·양상동·선부동에서 10여 기의 받침돌 없는 개석식 고인돌이 조사되었다. 이들 고인돌은 석실을 만들지 않고, 토광에 그냥 시신을 안치하였다. 양상동 1호 고인돌은 토광에 시신을 안치하고 흙을 덮은 뒤 10㎝ 정도의 자갈돌을 깐 다음 그 위에 뚜껑돌을 올려놓았다.
이와 유사한 구조를 보이는 것이 양상동에서 확인된 움무덤[토광묘]이다. 현재 2기가 조사되었는데, 1호 움무덤의 크기는 197×83×48㎝이며, 토광에 시신을 안치한 후 흙으로 덮고, 그 위에 작은 돌을 60㎝ 정도의 두께로 쌓아놓았다. 이러한 무덤은 고구려의 돌무지무덤[적석총]과는 다른 묘제로서 돌무지움무덤[적석토광묘]이라 불린다. 마한의 움무덤과의 관련성을 살피는 데 중요한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
고려시대의 분묘로는 1978년 반월공단 개발을 위한 조사 과정에서 1기가 확인되었다. 일동에서 조사된 이 분묘는 260×110×266㎝의 규모이며, 바닥에 두께 약 12㎝의 숯과 그 위에 두께 1cm의 하얀 흙을 깐 다음 목관을 안치했다. 목관의 두께는 5.6㎝ 내외이며 좌우에 각 2개씩 모두 4개의 철제 관고리를 달았다. 묘의 둘레에는 폭 110~196㎝, 길이 8.6m의 곡장(曲墻)이 둘려져 있다.
시신의 머리는 동쪽을 향하고 있으며, 목관 안에서 1063~1125년에 사용된 중국 동전 치평원보(治平元寶)·원우통보(元祐通寶)·대관통보(大觀通寶) 등 42점과 발 쪽 아래에서 청동수저 1벌이 나왔다. 이를 통해 이 고분의 축조 연대를 12세기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무덤은 보존 상태가 양호하여 고려시대의 분묘 연구에 매우 중요한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의 분묘 중 왕실과 관련된 능·원(園)은 없다. 다만 1441년(세종 23)에 문종 비인 현덕왕후의 소릉(昭陵)이 목내동에 조성되었으나 곧 없어졌고, 16세기 초에 지금의 구리시 동구릉으로 이장한 상황이다. 소릉의 석물인 석양(石羊)과 난간석주(欄干石柱) 일부가 안산문화원 마당에 전시되어 있고, 석호(石虎) 한 쌍이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밖에 명안공주(明安公主)·정정옹주(貞正翁主)의 묘가 있다. 현종의 딸인 명안공주는 해주오씨 묘역에 남편 해창위 오태주(吳泰周)와 함께 합장되어 있고, 정정옹주는 진주유씨 묘역에 남편 진안위 유적(柳頔)과 함께 합장되어 있다.
이 시기의 분묘는 최근 새롭게 단장한 곳이 많기 때문에 시기에 따른 분묘의 변화를 살펴보기가 쉽지 않다. 다만 매장지의 성격에 따라 문중의 묘역에 조성된 것과 일반 단독묘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문중의 묘역으로는 사동의 양주최씨[최담·최자준·최혼], 사사동의 청주한씨[한세좌·한유·한경남·한응인]·해주오씨[오태주·오원], 양산동의 나주정씨[정언벽·정시윤·여산송씨], 부곡동의 진주유씨[유시행·유적·유영·유명전·유명현·유명견·유명천·유재·유래]·전주이씨[이인현·이우정], 와동의 문화유씨[유관·유광찬]·순천김씨[김여물], 원곡동의 전의이씨[이경희·이충가·이언항·이정제], 선부동의 남양홍씨[홍처윤·홍수기·홍수서], 성포동의 여주이씨[이우량·이상신], 월피동의 진주강씨[강징·강억·강위·강면], 목내동의 여흥민씨[민영소]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양주최씨·문화유씨의 묘역은 최근에 새로이 단장하였고, 안동김씨[김수근·김병학·김병국]·파평윤씨[윤진·윤승필·윤종영]의 묘역처럼 도시개발로 인해 화장하거나, 안산김씨[김맹강·김필]·여주이씨[이계손·이시필·이우직·이상홍]·초계정씨[정홍경·정덕화] 묘역처럼 이장된 것도 다수 있다.
개인의 단독묘로는 안탄대·이잠[초지동], 윤강[선부동], 이익[일동] 묘 외에 오언[원곡동], 최정걸[본오동], 신점[원곡본동], 안탄대·이잠·홍명원·윤민준[초지동], 홍명희[대부남동] 묘 등을 들 수 있다. 안탄대 묘역은 봉분과 석물로 이루어져 있다. 봉분은 부인 황씨와 쌍분이며, 석물로는 상석·향로석·묘비·망주석 2기·문인석 2기가 있다. 그의 묘는 외손이 제사를 모시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의 소생은 창빈안씨[중종의 빈]뿐인데, 효종 때 왕명으로 외손봉사케 하여 지금도 전주이씨 영양군[창빈의 장남]파 종중에서 매년 시제를 지내고 있다. 묘소 바로 아래쪽에 그의 외현손인 이잠(李潛)의 무덤이 있다.
윤강의 묘역은 봉분·석물·신도비로 구성되어 있다. 봉분은 부부합장묘이며, 석물로는 향로석·상석·망주석 2기·문인석 2기가 있고, 상석 앞의 장명등은 최근에 세운 것이다. 묘갈은 향로석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석 오른쪽에 있어 일반적인 구조와는 다르다. 이익은 안산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그의 묘역 또한 최근 새롭게 단장되었다. 묘는 부인 고령신씨·사천육씨와 합장묘이며, 석물은 묘비 및 상석·향로석·망주석 등이 있다. 이 밖에 1967년에 세운 비석이 있으며, 묘소 우측에는 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봉분은 대부분 원형이며, 부부합장의 단분이 많고, 쌍분[강징·유시행·안탄대]은 드문 편이다. 석물은 향로석·상석·망주석이 일반적이며, 벼슬 정도에 따라 동자석과 문인석이 함께 조성되기도 하며, 사각의 장명등이 있는 곳[명안공주·오태주 묘, 강징 묘]도 있다.
비석으로는 묘갈·묘표가 가장 많고, 신도비는 강징·김여물·한응인·유석·윤강 등의 것이 있다. 특히 명안공주·오태주 부부합장묘에는 묘비와 함께 숙종이 지은 제문비가 별도로 세워져 있다. 한편 문중의 묘역에 묘를 쓸 때에는 일반적으로 윗대부터 차례로 내려가면서 조성하는데, 간혹 순서를 지키지 않아 위치가 맞지 않는 것도 있다.
[근대]
일제강점기 때 교육운동을 전개했던 최용신의 묘[향토유적 제18호]가 있다. 1935년에 조성되었으며, 당시의 강습소 자리에 세워진 천곡교회[지금의 샘골교회] 뒤의 상록수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다. 1974년 묘 앞에 선생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