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08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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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碑石-萬歲運動 |
영어의미역 | Cheers Movement in Biseokgeori Stree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수암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진각 |
[정의]
일제강점기 경기도 시흥군 수암면 수암리[지금의 안산시 상록구 수암동]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개설]
비석거리 만세운동은 경기도 내 주요 시위 중의 하나로, 1919년 3월 30일 오전 구 안산치소(安山治所)로 면사무소와 경찰주재소, 보통학교, 향교 등이 집중되어 있는 비석거리[碑立洞]에서 18개 리 2,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서 벌인 독립만세운동이다.
[발단]
비석거리 만세운동은 이미 전날인 3월 29일 읍내의 비석거리에 모이라는 통문을 각 고을의 이장에게 돌렸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었다. 이날의 시위는 유익수(柳益秀)와 윤병소(尹秉昭)가 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휘두르면서 지휘 인솔하여 수암면 읍내에 있는 수암경찰관주재소·수암면사무소·안산보통학교 및 공자묘(孔子廟)[안산향교] 앞으로 몰려가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벌였다.
[경과]
윤병소는 3월 29일 화정리(花井里)에서 이봉구(李鳳九)로부터 비석거리에서 만세시위가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자기 동리 사람 30여 명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어 시위 대열에 참여하였다. 월피리(月陂里)에서 잡화상을 경영하고 있던 유익수는 성포리(聲浦里) 주민 30여 명 가량이 “독립만세를 부르기 위하여 비석거리로 간다”는 소리를 듣고 비립동(碑立洞)으로 함께 갔다.
그곳에는 이미 2,000명 정도의 인파가 모여 있었다. 이때 성포리 구장이 유익수에게 “이 군중 속에는 난폭한 자도 있어 만일 주재소 등에 폭행을 가하면 곤란하니 당신이 좀 조정하여 달라”는 부탁을 하자, 유익수는 군중을 지휘하여 도살장으로 가서 그곳에서 와리 지역의 대지주였던 홍순칠(洪淳七)이 만든 기를 건네받았다.
이때 일본 경찰이 “읍내로 가지 못하니 해산하라”고 명령하였으나 앞서 홍순칠이 각리(各里)의 인원을 조사하고 또한 만세를 부르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읍내로부터 가서 만세를 부르라”고 격려하였고, 군중들도 읍내로 가려고 애쓰고 있었으므로 유익수도 태극기를 휘두르며 군중을 지휘하여 읍내로 가서 수암면 읍내에 있는 수암경찰관주재소·수암면사무소·안산보통학교 및 공자묘 앞으로 행진하였다.
와리(瓦里)에 사는 홍순칠은 3월 30일 유익렬(柳益烈)의 하인 임학신(林學信)에게서 “그날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니 수암리 비석거리로 모이라”는 취지의 통지를 받고서 동리 허치선(許致善) 집에 모여서 30인을 인솔하고서 수암면 남쪽 밭까지 갔다. 그곳에는 이미 1,200여 명이 모여 있었고, 이곳에서 홍순칠은 후일 불참자를 문책하기 위해 참석 인원을 조사하였다.
이때 유익수가 선두에 서서 읍내 쪽으로 가니 군중도 눈사태가 난 듯이 행진하므로 홍순칠도 군중을 따라서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재판정에서 홍순칠은 “나는 원래 조선 독립을 희망하는 사람인데 독립을 기도하려면 많은 사람이 모여서 시위운동을 할 필요가 있다”고 증언하고 3월 29일 국유지 소작인들에게 그 날 각리에 돌린 격문 내용을 알리고 “조선이 독립하면 국유지는 소작인의 소유지가 되니, 이때 만세를 부르는 것이 득책이다”고 권고하여 소작인을 격려하였다.
산현리의 윤동욱(尹東旭)은 볼 일이 있어서 수암면 화정리에 갔다가 능곡리 농민으로부터 “비립동에서 만세를 부른다”는 것을 듣고 자신이 만세를 부르면 조선 독립에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하고 비석거리로 갔다. 그곳에는 1,000명 정도의 군중이 모여 있었다.
그 때 순사가 “해산하라! 그러지 않고 읍내로 갈 때는 발포할 지도 모른다”고 하였으므로 모인 군중들이 한때 분규를 일으켰으나, 결국 모두가 읍내 쪽으로 진출하였다. 이에 윤동욱은 선두에 서서 군중의 기세를 돋우면서 읍내에 이르러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윤동욱은 공립보통학교 앞에서 순사 임건호(任健鎬)에게 “당신도 조선인이니 만세를 부르라”고 권하였으나 불응하였다.
화정리의 김병권(金秉權)은 3월 30일 화정리에 모인 군중 30여 명과 함께 비석거리로 갔더니, 이미 1,000명 정도가 모여 있었다. 일본 경찰의 해산 명령에 불복하고 태극기를 떠받들고 선두에서 행진하는 자가 있어서 이들과 같이 읍내로 행진하여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수암리의 이봉문(李奉文)은 자기 마을 앞에서 진행된 만세시위에 솔선하여 참여한 뒤, 이날 밤 시위 참여에 소극적이었던 구장 집에 다른 주민들과 같이 몰려가 항의하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1916년 기준 수암면의 인구는 1,592호 8,120명이며 이 가운데 남자가 4,112명이었다. 남자 인구 가운데 노인과 아동을 제외한다면 2,000여 명이라는 숫자는 수암면민이 거의 다 참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운동을 주도한 농민들은 대개 구래의 유교나 애국계몽운동의 세례를 받은 향촌 사회의 지식인 부류였다. 이들은 1910년대 서당 교육이나 교육계몽운동의 혜택을 받은 자들로 보인다. 이들은 비록 조직화되어 있지는 못했지만 일정 정도의 지식과 소양을 갖춘 향촌 사회의 지식층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농촌에서는 시위운동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이장(里長)의 역할이 크게 작용하였다. 이들은 시위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마을 주민을 동원하고 사전 연락을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장들은 조선 각지의 시위운동 소식을 전해 듣고 동리민들을 규합하여 면사무소 앞에서 시위운동을 하는 등 마을 단위 운동을 촉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