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A020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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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화정동 29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신대광 |
화정동 너빌 마을 사람들에게 조선 성종 대 인물인 김경남(金景南)[1482~1595]은 효자 어른, 혹은 버섯 효자로 불린다. 김경남의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박여(博汝), 호는 한천(寒泉)으로 너빌 마을 출신이다. 아버지는 화정동의 김녕김씨 입향조인 김충주(一柱)이고, 어머니는 안정나씨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과묵하여 떠도는 소문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으며, 충효의 극진함은 아버지와 할아버지(玄錫), 증조할아버지(文起) 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가풍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전한다. 어머니 역시 아들 경남을 엄하게 길러서 어려서부터 언어가 부드럽고 용모가 단정하였다. 그는 어머니를 엄부(嚴父)와 같이 섬기며 공경하여, 늘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고, 얼굴빛을 보고 그 원하는 바를 알아낼 정도로 효성이 지극하여 마을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김경남의 어머니는 특히 버섯국을 좋아했다. 이에 김경남은 여름이 되면 지성으로 산간을 헤매면서 버섯을 채취하여 어머니의 입맛을 맞추어 드렸다. 한 번은 집 뒷산에 있는 언덕 비탈에 버섯이 많이 있어 이를 가져와 국을 끓여 드렸다. 그 후 매일 그곳으로 가서 버섯을 채취하여 노모를 봉양하였는데, 어느 날 아침에 가 보니 버섯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에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내 정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며 탄식하였다.
공교롭게도 그날 밤 김경남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이후에는 버섯이 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이를 기이하게 여겨 그곳을 ‘버섯들’이라고 부르고, 그 버섯을 ‘효자 버섯’이라 하였다. 또 버섯이 났던 곳 부근 바위에 ‘균원(菌苑)’이라는 글씨를 새겨 넣었는데, 그 위치가 마하산 정상 부근이어서 일반인들은 찾기는 어렵다.
한편,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김경남은 여막(廬幕)을 짓고 3년을 한결같이 시묘(侍墓)하였는데, 밤마다 호랑이가 찾아와 지키다가 낮이면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 후 그는 차가운 우물 위쪽에 초막을 짓고 살면서 스스로 ‘한천(寒泉)’이라 이름하고 후학들을 가르쳤다.
그는 일을 미리 내다보는 능력도 있었다고 전한다. 그의 나이 100세가 지나도록 후사(後嗣)가 없자 후사를 세우라는 집안사람들의 성화가 빗발쳤다. 그런데 어느 날, “내 아들은 곧 나타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러고 나서 과연 얼마 후에 성지당(姓支堂)[효자 김약전의 아호]을 아들로 삼으면서, “내 자손은 8~9세가(世家)가 필시 크게 성장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 1851년(철종 2)에 세덕사(世德祠)가 세워졌고, 1870년(고종 7)에 정려가 내려졌다. 오정각의 김경남 정려문에는 ‘효자학생김경남지문(孝子學生金景南之門)’이라 적혀 있다.
화정동 너빌 마을 사람들은 대대로 효자어른에 대한 이야기를 자손들에게 전하며 효의 전통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현재 마을 일을 맡아 보고 있는 김광권 통장에 따르면, 마을의 후손은 물론 각지에 흩어져 있는 후손들에게도 이러한 전통을 알리고 계승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단다. 그렇게 효의 전통을 지키려고 노력한 덕인지 지난 2006년에는 김연권 전 통장의 부인이 효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마을의 전통을 이어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너빌 마을 사람들은 옛 선조들이 남긴 아름다운 효의 전통을 잊지 않고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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