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봉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0638
한자 尹錫鳳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대천리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정필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42년연표보기 - 윤석봉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6년 - 윤석봉 홍주의병 활동
몰년 시기/일시 1910년연표보기 - 윤석봉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19년연표보기 - 윤석봉 건국포장 추서
출생지 경기도 양주군 서산면
묘소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화락산지도보기
묘소 경기도 양주
성격 의병
성별
대표 경력 홍주의병 활동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보령으로 귀향하여 활동한 의병.

[개설]

윤석봉(尹錫鳳)[1842~1910]은 경기도 양주 서산면 출신으로 1898년 보령시 웅천읍 대천리로 귀향하여 집성당(集成堂)을 세워 강학하고, 지역 유림들과 함께 의병운동에 힘쓴 항일 선비이다.

[가계]

부친인 희오(羲五)[자는 희연(喜衍), 호는 노서재(老西齋)]와 능성구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파평이다.

[활동 사항]

윤석봉은 본래 경기도 양주군 서산면 출신으로, 자는 운서(雲瑞)이며 호는 삼희당(三希堂)이다. 그는 조선 말기 척사론의 대표자라 할 수 있는 이항로(李恒老)[1792~1868]의 문인인 김평묵(金平默)·유중교(柳重敎)에게 수학하면서 위정척사 사상을 배웠다. 그러다가 1888년 서천군, 1898년 보령군 웅천읍 대천리에 입향하여 집성당을 세우고 지역 유생들에게 강학하였다.

윤석봉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반대 상소를 올리고, 1906년 민종식(閔宗植)[1861~1917]의 초청으로 홍주의병에 참여하였다가 경성감옥에 송치되면서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윤석봉은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로 전국 의병 의거를 염려한 일제에 의해 김복한과 함께 다시 보령 관노청에 체포되었다. 결국 윤석봉은 1910년 한일합방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집성당의 주자 및 송시열의 위패에 고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1900년 정산으로 이주한 최익현[1833~1906]과 더불어 윤석봉집성당을 통하여 호서 지역 화서학파의 맥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윤석봉의 저술로는 홍주의병으로 인해 경성감옥에서 옥고의 경험을 기록한 『홍경일기(洪京日記)』가 있다. 또한 그의 문집으로는 『삼희당집(三希堂)』 23권 3책이 남아있다.

[묘소]

본래 윤석봉의 묘소는 그의 제자들이 보령시 웅천읍 화락산 중턱에 조성하였으나, 후손들에 의해 1950년대에 고향인 경기도 양주로 모셔졌다. 현재 윤서봉의 묘소는 개발로 인해 유실되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9년 건국포장에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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