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6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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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蒼巖眞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유물/서화류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경남대학로 7[월영동 449]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원규 |
성격 | 서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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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이삼만 |
소유자 | 한마 학원 |
관리자 | 경남 대학교 박물관 |
문화재 지정 번호 |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509-125호 |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소재 경남 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서첩(書帖).
[개설]
『창암진첩(蒼巖眞帖)』은 일제 강점기에 조선 초대 통감을 지낸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가 재임 기간에 수집했던 자료로, 일본 야마구치 현립 대학[山口縣立大學] 도서관 데라우치 문고[寺內文庫]에 소장되어 있었다. 경남 대학교는 일본 야마구치 현립 대학으로부터 1996년 98종 136점의 조선 관계 자료를 기증받아 보관하고 있는데, 『창암진첩』은 그 중 1종이다. 현재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509-125호로 지정되어 있다.
[형태 및 구성]
『창암진첩』의 크기는 38㎝×29㎝이다. 전체 쪽수 16쪽이며, 보관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의의와 평가]
『창암진첩』은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1770~1847]이 당(唐)나라 시인 이기(李頎)가 춘추 전국 시대 초나라 시인이자 충신인 굴원(屈原)[BC 340~278]을 생각하며 지은 「어부가(漁父歌)」를 초서로 쓴 것이다.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白首何老人[흰머리 어떤 노인]
蓑笠蔽其身[도롱이와 삿갓으로 몸을 가리고]
避世長不仕[세상 피하여 오래 벼슬길 나가지 않고]
釣魚淸江濱[맑은 강가에서 고기를 낚네]
浦沙明濯足[깨끗한 모래톱에 발을 씻고]
山月靜垂綸[동산에 달 오르면 낚시를 드리우네]
寓宿湍與瀨[단수(湍水)와 뢰수(瀨水)가에 떠돌며 살고]
行歌秋復春[봄 가을이면 다니며 노래하네]
持竿湘岸竹[상수(湘水)의 대나무로 낚시대를 만들고]
爇火蘆洲薪[갈대밭 땔나무로 불을 지피네]
綠水飯香稻[녹수(綠水)에 향도(香稻)로 밥을 짓고]
靑荷包紫鱗[푸른 연잎으로 자주빛 물고기를 싸네]
於中還自樂[그런 가운데서 혼자 즐거우니]
所欲全吾眞[바라는 바는 내 천성을 고이 간직하는 것]
而笑獨醒者[혼자 깨어있는 나를 비웃는 자는]
臨流多苦辛[추방당하면 고생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창암진첩』에는 3, 1, 4, 2행의 순으로, 앞 부분에 그 순서가 바뀌어 있다. 이삼만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윤원(允遠)이고, 호는 창암(蒼巖)이다. 전라북도 정읍에서 태어났으며, 만년에는 전주에 살면서 완산(完山)이라고도 호를 썼다. 어린 시절에 당대의 명필이었던 이광사(李匡師)의 글씨를 배웠다.
이삼만이 살았던 시절 그는 호서(湖西)의 눌인(訥人) 조광진(曺匡振)[1772~1840], 기호(畿湖)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과 더불어 ‘조선의 삼대 명필’로 일컬어졌다. 이삼만은 김정희 보다 10살 연상이나 추사와 대비되는 점이 많다. 김정희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최상의 교육을 받았던 인물이다. 대신 이삼만은 몰락한 양반가의 후손으로 약초를 캐서 연명하는 등 어렵게 살면서 붓과 종이가 없어 대나무와 칡을 갈아서 사용하고, 땅바닥이나 모래 위에 막대기로 글을 쓰며 연습하였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집안의 재산을 글씨로 모두 탕진하였다고도 전한다. 그렇지만 평생 동안 글씨에 대한 집념을 놓지 않고 병석에서도 하루 천자를 쓰지 않으면 잠을 자지 않았을 정도로 글씨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였다고 한다. 또한 누군가가 글씨 배우기를 청하면 점 하나 획 하나를 한 달씩 가르쳤다고 한다. 그런 만큼 이삼만은 글씨에 모든 것을 바쳤고, 오로지 글씨 하나로만 세상에 이름을 떨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추사가 예서와 해서를 좋아하였다면, 이삼만은 행서와 초서를 좋아하였는데, 특히 초서를 잘 써서 그의 서체를 창암체(蒼巖體)라고도 부른다. 전라도 도처의 사찰에는 이삼만이 쓴 편액들이 걸려 있다. 하동 칠불암(七佛庵)의 편액과 전주판(全州板) 칠서(七書)도 이삼만의 필적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