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8006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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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凝 |
영어공식명칭 | Choi Eung |
이칭/별칭 | 희개(熙愷)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강원도 철원군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홍승우 |
[정의]
남북국 시대 철원 지역에서 활동한 태봉과 고려의 문신.
[가계]
최응(崔凝)[898~932]의 본관은 황주(黃州)이고, 시호는 희개(熙愷)이다. 아버지는 대상을 지낸 최우달(崔祐達)이고, 아들은 최빈(崔彬)이다.
[활동 사항]
최응은 898년(효공왕 2) 황주 토산(土山)[현 북한 황해북도 토산군]에서 태어났다. 태봉에서 장주로 재직하던 914년 왕건(王建)을 궁예(弓裔)의 위협으로부터 구원하여 인연을 맺었다. 당시 궁예는 미륵관심법(彌勒觀心法)을 운운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숙청하였고, 왕건에게도 역모 누명을 씌워 추궁하였다. 왕건이 결백을 주장하려고 하자 최응은 거짓으로라도 죄를 자백해야 살 수 있음을 왕건에게 귀띔하였고, 최응의 조언대로 왕건은 궁예에게 용서를 빌어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918년 고려가 개국한 이후에는 지원봉성사와 광평낭중을 역임하며 실무에 밝다는 세간의 평을 얻었다. 왕건은 최응을 총애하여 고위직인 내봉경에 임명하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광평시랑을 제수하였는데, 최응은 왕건에게 요청하여 자신보다 연장자인 윤봉(尹逢)에게 광평시랑 자리를 양보하였다. 이후 최응에 대한 왕건의 신뢰는 더욱 깊어져서 최응이 채식을 고집하다 병에 걸리자 왕건은 몸소 최응의 집을 방문하여 고기를 권하기도 하였다.
유학적 소양을 갖추었던 최응은 국왕이 음양설(陰陽說)이나 불교에 경도되지 말아야 함을 간언하였다. 최응은 국왕이 문덕(文德)을 닦는 데 힘써야 한다고 역설하였는데, 왕건은 최응의 뜻에 공감하면서도 난세에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음양설과 불교를 활용할 수밖에 없음을 강변하였다. 이후 후삼국이 통일되고 고려가 안정을 찾자 왕건은 최응의 간언대로 훈요십조에 사원의 난립을 경계하는 조항을 남겼다. 최응은 932년(태조 15) 11월 11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최응이 사망하자 태조 왕건은 애도하여 원보로 추증하고 가족에게 부의를 후하게 하사하였고, 추증을 거듭하여 대광태자태부로 삼았다. 최응은 1027년(현종 18) 4월 12일 왕건을 옹립한 네 장군 홍유(洪儒)·배현경(裴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과 함께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1033년(덕종 2년) 10월 12일에는 사도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