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8006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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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白敦明 |
영어공식명칭 | Baek Donmyeo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강원도 철원군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홍승우 |
몰년 시기/일시 | 1253년 8월 - 백돈명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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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임|활동지 | 동주산성 -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
성격 | 무신 |
성별 | 남 |
대표 관직 | 동주산성 방호별감 |
[정의]
고려 후기 강원도 철원 지역에서 몽골군과 교전한 무신.
[개설]
백돈명(白敦明)[?~1253]은 고려 고종(高宗) 때 동주산성(東州山城)의 방호별감으로 부임하여 1253년 침입한 몽골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동주는 고려 시대에 지금의 철원군 일대를 일컫던 지명이다.
[가계]
백돈명의 본관은 대흥(大興)이며, 아버지는 국학박사 백양필(白良弼)이다. 형은 좌간의대부 백돈분(白敦賁)이다.
[활동 사항]
1251년 몽골의 제4대 황제로 즉위한 몽케[蒙哥]는 강화도에 있던 고려 조정에 사신을 파견하여 고종의 친조(親朝)와 개경 환도를 요구하였고, 2년 뒤 고려 조정이 몽골의 요구 사항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제5차 침입을 강행하였다. 1253년 7월 예구[也窟]의 총지휘하에 출전한 몽골군은 서해도(西海道)와 동계(東界)로 침입 경로를 나누어 남하하였고, 고려 시대 동계의 요충지였던 동주산성은 몽골군과 고려군의 접전지가 되었다.
동주산성의 방호별감을 맡고 있던 백돈명은 몽골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백성들을 산성 안으로 들이고 외부와의 출입을 금지하였다. 당시는 벼 수확을 앞둔 가을철이었기 때문에 한 아전이 백성들을 교대로 내보내 벼를 거두어 오게 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백돈명은 그 제안을 거절하였다. 백돈명의 결정은 결과적으로 큰 패착이 되었다. 산성에서 버틸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식량을 확보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몽골군에게 1년 치 수확물을 약탈당할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백성들은 백돈명에게 앙심을 품고 진중에서 이탈하였다.
몽골 군대가 산성 아래에 이르렀을 때 백돈명이 정예병 600명을 이끌고 맞서 싸웠으나 이미 민심이 돌아선 상황이었기 때문에 병사들은 싸우지 않고 흩어졌으며, 백돈명과 함께 참전하였던 김화감무도 산성이 함락될 것을 예상하여 아전들과 도망쳤다. 백돈명은 몽골군에 참패하였고, 산성에 들어온 몽골군은 백돈명을 비롯하여 동주의 부사, 판관, 그리고 금성현령을 살해한 뒤 부녀자와 남자아이들을 포로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