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800689
한자 朴容萬
영어공식명칭 Park Yongman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강원도 철원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엄찬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1년 7월 2일연표보기 - 박용만 출생
수학 시기/일시 1895년 - 박용만 일본 게이오의숙 유학
수학 시기/일시 1908년 - 박용만 네브래스카주대학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12년 - 박용만 네브래스카립대학 정치학과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04년 - 박용만 일제 황무지 개척권 요구 반대 투쟁으로 수감
활동 시기/일시 1905년 - 박용만 미국 망명
활동 시기/일시 1909년 6월 - 박용만 네브래스카 커니 한인소년병학교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11년 8월 - 박용만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발족
활동 시기/일시 1912년 12월 - 박용만 하와이 도착
활동 시기/일시 1914년 6월 - 박용만 대조선국민군단 창립
활동 시기/일시 1919년 1월 - 박용만 대한독립선언문 기초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 박용만 상해임시정부 외무총장 피선
활동 시기/일시 1921년 4월 - 박용만 북경 군사통일회의 개최
활동 시기/일시 1921년 5월 - 박용만 상해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불승인안 통고
몰년 시기/일시 1928년 10월 17일연표보기 - 박용만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2년연표보기 - 박용만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
추모 시기/일시 1995년연표보기 - 박용만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
출생지 중리 -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중리 지도보기
학교|수학지 게이오의숙 - 일본 도쿄시
학교|수학지 네브래스카립대학 - 미국 네브래스카주 링컨시
활동지 하와이 - 미국 하와이주
활동지 북경 - 중국 베이징시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네브래스카 커니 한인소년병학교 교장|대조선국민군단 단장|상해임시정부 외무총장

[정의]

일제 강점기 강원도 철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박용만의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호는 우성(又醒)이다. 아버지는 박선병(朴善秉), 어머니는 김해김씨(金海金氏)이다. 아들은 박광원(朴光遠)이다.

[활동 사항]

박용만(朴容萬)[1881~1928]은 1881년 지금의 철원군 철원읍 중리에서 태어났다. 1895년 미국 유학을 다녀온 개화파 인사였던 작은아버지 박희병(朴羲秉)의 주선으로 일본 게이오의숙에 유학하였다. 일본에서 귀국한 뒤 1904년에는 주한 일본공사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 반대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한성감옥에 투옥되었고, 옥중에서 이승만(李承晩)과 만나 형제의 연을 맺었다.

1905년 출옥한 박용만은 미국 망명길에 올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1908년 네브래스카대학에 입학하여 정치학과 군사학을 전공하며 ROTC 과정을 이수하였다. 1909년 네브래스카주 커니에 있는 한인 농장 내에 한인 최초의 군사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를 열어 학도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한인소년병학교는 이후 각국에 설립된 독립군 양성 기관에 영향을 줄 정도로 항일 무장투쟁을 선도하였다.

박용만은 1912년 12월 활동 근거지를 하와이로 옮겼고, 1914년 6월 10일에 대조선국민군단과 대조선국민군단사관학교를 창설하였다. 이후 하와이에서 박용만과 이승만이 독립투쟁 노선의 차이로 대립하면서 대조선국민군단은 와해되었다. 무장 투쟁론을 강하게 주창하였던 박용만은 문무를 겸비한 뛰어난 사상가였고 언론인이기도 하였다. 1911년 『신한민보』 주필이 되어 주장한 무형 국가론은 1912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결성의 기반이 되었다. 대한인국민회는 북미와 하와이, 멕시코, 러시아, 중국 각지에 지부를 둔 실질적인 최초의 임시정부였다. 1917년 박용만이 기초한 「대동단결의 선언』과 1919년 2월 작성한 「대한독립선언」은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탄생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1921년 4월 박용만은 북경에서 이승만의 임시정부 노선에 반대하는 신채호·신숙·이회영 등과 함께 군사통일회의를 결성하고 이승만의 위임통치론에 대한 성토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군사통일회의에서 상해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불승인안을 통보하였다. 1923년 상해에서 열린 국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한 박용만은 상해임시정부 불신임 운동에 앞장섰지만 국민대표자대회는 상해임시정부의 내무부 포고령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상해에서 축출된 박용만은 하와이로 돌아가 초등 국어 교과서를 만들고 우성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포 자녀들의 교육에도 힘을 쏟았다.

중국으로 다시 건너가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하여 동분서주하던 박용만은 1928년 10월 17일 북경에서 독립단원인 이구연·박인식·이규서 등이 쏜 총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박용만의 저서로는 무장 항쟁론에 대해 집필한 『군인수지(軍人須知)』, 『국민개병설(國民皆兵說)』이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박용만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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