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당동 유래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8327
한자 新塘洞 由來碑
영어공식명칭 Sindang-dong Yuraebi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유적/비
지역 대구광역시 달서구 선원남로 5[이곡동 1189]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신현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94년 11월연표보기 - 신당동 유래비 건립
현 소재지 와룡윗공원 - 대구광역시 달서구 선원남로 5[이곡동 1189]지도보기
성격 마을 유래비
관련 인물 김응수|김악소|전경호|최종식|전영기|박영수
재질 석재
크기(높이, 너비, 두께) 164㎝[너비]|88㎝[높이]|29㎝[두께]

[정의]

대구광역시 달서구 이곡동에 있는 마을 유래비.

[개설]

신당동 유래비는 1994년 11월 세워진 마을 유래비로서, 마을 지명의 유래, 마을의 역사, 주민 성씨, 삶의 이력, 마을의 인물과 업적, 비를 세운 이유 등이 새겨져 있다. 현재 대구광역시 달서구에 속하는 신당동김녕김씨가 처음 세거하면서 마을을 형성하였고 예부터 와룡산의 정기를 받는 곳이라 하여 명당으로 알려져 왔다. 1988년 대구직할시 서구 일부와 남구 일부로 달서구가 신설되면서 서구 호산동과 파호동·호림동·신당동이 달서구에 편입되었다. 1995년 대구직할시가 대구광역시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대구광역시 달서구에 편입되어 행정동인 신당동이 되었다. 신당동의 옛 지명은 오정동(五亭洞)인데, 와룡산의 정기를 받는 곳이라 하여 명당으로 알려져 왔다. 마을 정자에 나무 다섯 그루가 당산나무 역할을 하면서 ‘오정동’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이다. 그 후 낙동강의 범람을 막으려고 둑을 쌓았는데, 둑의 모양이 새로 생긴 못과 같다 하여 못 당(塘) 자를 쓴 ‘신당동’이라는 지명이 생겨났다고 한다.

[건립 경위]

1984년에서 2012년까지 5차에 걸쳐 성서산업단지를 조성하면서 이곡동, 신당동 등 성서 일대는 과거의 전형적인 농촌마을에서 공단과 관공서, 아파트단지 중심의 신도시로 변화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마을이 공단에 편입되는 등의 이유로 마을의 급격한 변화를 겪어야 하였던 성서 지역 주민들은 옛 마을을 기리는 마음에서 마을 유래비를 세우기 시작하였다. 1992년 망정부락 유적비를 비롯하여 신당동 유래비, 갈미 유허비, 사령봉 유래비 등 열 기 이상의 유래비가 반경 2㎞ 안에 세워졌다. 1994년 세워진 신당동 유래비는 비석에 새겨진 내용을 따르면, 세월의 변천에 따라 잊혀 가는 마을의 옛 모습과 선조들의 큰 뜻을 기록하여 전하려는 마음에서 세워졌다고 한다.

[위치]

신당동 유래비와룡중학교 옆 와룡윗공원 주차장[대구광역시 달서구 이곡동 1189]에서 바로 보이는 자리에 있다. 와룡윗공원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와룡아랫공원과 마주 보고 있다.

[형태]

신당동 유래비는 너비 164㎝, 높이, 88㎝, 두께 29㎝로 기단 위에 표지석을 올린 형태이다.

[금석문]

“臥龍山精氣가 크게 突兀한 이곳은 金寧金氏白村金文起先生의 후손 應守氏의 世居地다. 이분은 壬亂을 계골에서 피신하셨다. 亂이 平靜되자 慶州李氏 壽城羅氏 軍威方氏 姓바지사람이 이곳에 모여 자리잡아 쉴터 다섯군데심은 나무가 成長하여 綠陰이 짙어 亭子나무라 하고 마을이름도 五亭洞이라했다. 東西는 마을을 감싸주는 突兀이있고 앞에 방대하게 흐르는 洛東江이있어 景觀이좋았다. 英祖三十六年 西紀一七六0年 金岳素께서 보리 三石 木花二七五斥 내놓은 것을 기금으로 수해를 막기위해 마을앞 국도남쪽 五百미터 지점에 길이 오백미터의 堡를쌓자 新塘이라했다. 이碑는 文化 經濟 歷史자료로서 소중할 것이다. 英祖께서 住居自由를 佈告하시자 金海金氏 綾城具氏 仁同張氏 密陽朴氏 慶州崔氏 靈山辛氏 丹陽禹氏 達城裵氏 沃川全氏 義城金氏 冶爐宋氏 昌寧曺氏 星山李氏 晉州姜氏 咸安趙氏 星州都氏 諸姓氏가 연줄로 雲集하여 정조때에는 큰 부락이 되자 서당도 지었다. 이곳은 삶의 명당인지라 인재가 많이나고 慈仁규수가 이곳 娘子와 혼담이 있자 그의 부모가 그곳은 메마른 곳이라 시집가면 고생한다하니 「慈仁·慶山오는비가 新塘西村아니오리」하고 노래한 것을 보나 또 「이 고장에서 자라난 處女들은 시집갈때까지 쌀서말을 못먹고간다」는 속담을 보더라도 먹고살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城西平野는 洛東江갯가인데 보리가 생산되자 삶의 갯가 「살미개」라고 불렀다. 그러나 마을사람경작지는 일부분에 불과했다. 一九二0·三0年代는 자손이 번창하여 생활고가 더욱 심하여지자 日本으로 이민간 사람도 不知其數고 愛國志士들은 北關道로 넘어간 사람도 있었다. 璀瓚敎께서 訓長이되시자 全洞民이 배움의 길로 나섰으나 불행하게도 倭政이 書堂을 징발하여 警察官駐在所로 사용했다. 先生께서는 좌절하지않고 私塾으로 많은儒生을 배출했고 張錫熙 朴炳孝先生께서도 많은사람을 가르쳤다. 그의 弟子中에 城西面長을 歷任하신분은 全景浩 崔鍾湜 全榮基 朴永壽氏等이다. 全榮基氏는 歲歲年年 한발이 극심하여 一九四二年初에 城西面 全農地에 給水할 수 있는 水利事業計劃書를 作成 郡守 知事에 수차 건의했으나 성과를 얻지못했다. 거듭하여 案件을 上部機關에 提出하고 애쓴 보람있어 及其也 一九四四年말에 認可를 얻고 一九四六年工事가 完了되자 한발의 피해를 덜게되었다. 認可를받는 過程 수많은 경비를 부담했다. 그공적은 千秋萬代후에도 동네수로동굴은 말할 것이다. 朴光澤氏는 梨谷池못둑이 무너질 단계에 놓인것을 私財로서 보수하여 몽리자에 온정을 베풀었고 인자하시고 덕망이 높은 것을 大邱향교에서 알고 釋奠大祭終獻官으로 선임된바 있다. 一九七三年 三月十五日 신당동민 四十五名이 출자한 五萬壹阡貳百원을 기금으로 城西마을금고를 창설하여 現在운영자금이 四百億이 되며 住民金融으로서 지역발전과 복지사업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至今 이 고장의 아파트숲살미개는 대단지공단으로 변모되어 옛모습을 완전히 잃게되자 동민들이 애통하게 여겨 洞代表가 文獻을 가지고 와서 청함으로 頭緖없이 叙했으나 앞으로 後世들에게 어렵게 살면서도 敎育을 重大視하고 많은 업적을 이룩한 先代의 큰 뜻을 알게하고 길이 愛鄕心을 심어주고자 함이니라.

西紀一九九四年十一月 日

豎碑推進員長 崔顯永 謹書”

[현황]

신당동 유래비 뒤에는 「전면장전영기시혜불망비(前面長全榮基施惠不忘碑)」, 「가선대부김악소불망비(嘉善大夫金岳素不忘碑)」, 「이곡지수리계장박광택기념비(梨谷池水利稧長朴光澤紀念碑)」가 함께 조성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마을 주민들이 힘을 합쳐 세운 신당동 유래비에는 마을의 역사와 변천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사료적 가치도 인정받고 있다. 특히 “자인 경산 오는 비가 신당 서촌 아니 오리”, “이 고장에서 자란 처녀들은 시집갈 때까지 쌀 서 말을 못 먹고 간다” 등의 속담 기록을 통하여 과거 힘겨웠던 선조들의 생활상을 고스란히 담아 내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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