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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에 전해 내려오는 설화. 젊은 시절 목계(木溪) 강혼(姜渾)은 아름다운 관기와 깊은 사랑을 나눈 적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운 사또가 부임해 왔는데, 공교롭게도 강혼과 사랑에 빠져 있던 관기가 사또의 수청을 들게 되었다. 분함과 연정을 이기지 못한 강혼은 수청을 들러 가는 관기의 소매 자락을 붙들어 잡고 시 한 수를 휙 갈겨썼다. 강혼의 급작스런 행동에 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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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단목리 담산고택에 소장되어 있는 효행 관련 고문서. 「권병천등상서」는 단성·거창·진주 등 경상우도 유생들이 하진태의 효자 정려를 위해 암행어사에게 올린 진정서이다. 매우 긴 글로 하진태의 효행상이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이 진정서를 접수한 어사는 사림의 공의를 인정하고 효행을 적은 원장(原狀)을 등서(謄書)하여 들일 것을 지시하는 등 매우 고무적인 반응을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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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단목리 담산고택 소장 효행관련 고문서. 「단동촌동장수본」은 단동촌 동장이 사죽집강(沙竹執綱)에게 하진태가 행한 효행의 실상을 서면으로 보고하는 문서이다. 수본(手本)은 공사(公事)에 관하여 상급관청 또는 관계 관서에 보고하는 문서이다. 단동은 사죽리에 속한 자연부락 명칭으로 흔히 단목으로 불리는데, 지금은 사죽이란 명칭은 사라지고 단목리로 통일되었다. 하진태가 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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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의하면, 강결은 성품이 효성스러워 노모를 지극 정성으로 봉양하였다. 노모의 나이 92세 때 강결이 노모에게 꿩고기를 대접하려고 마음 먹고 목욕재계를 한 후 하늘에 빌었는데, 이때 갑자기 꿩이 부엌으로 날아왔다고 한다. 또한 이전에 마을에 역병이 돌아 어머니를 모시고 산중으로 피신 갔다가 온 일이 있었는데, 호랑이가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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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가산리 진산마을에 있는 강권수의 효행을 기리는 비. 손가락을 잘라 병든 아버지를 간호한 강권수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가산리 진산마을 가마고개 도로변에 위치한다.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높이 136㎝, 너비 39㎝, 두께 18㎝의 몸돌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돌을 얹었다. 글자의 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비의 제목은「처사진양강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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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1642년(인조 20년)부터 1643년까지 진주목사로 재직하였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1「임관조(任官條)」에는 진주목사로 있는 동안 고을의 선생안(先生案)을 닦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강대수가 진주목사로 부임해 있을 당시, 그의 덕행과 선정을 기념하여 선정비가 세워졌다. 비의 제목은 "목사강후대수청덕선정비(牧使姜侯大遂淸德善政碑)"로, 경상남도 진주시 옥봉남동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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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옥봉남동에 있는 조선 중기의 문신 강대수(姜大遂)의 선정비. 1642년(인조 20)~1643년 동안 진주목사를 지낸 강대수의 덕행과 선정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경상남도 진주시 옥봉남동에 위치한 은열사(殷烈祠) 내에 위치한다. 귀부 위에 높이 205㎝, 너비 73㎝, 두께 15㎝의 몸돌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돌을 얹었다. 머릿돌은 사각형으로 앞면에는 여의주를 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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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열녀. 사노비로 강대익(姜大益)의 첩이다. 15살 때부터 강대익을 섬겼는데,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 중 진주성이 함락될 때 강대익이 전사하자, 몸소 그 유해를 거두어 묻고 정절을 지켰다고 한다. 진주 백곡리에 살았으며,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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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양. 자는 여진(汝眞), 호는 후산(後山). 진사에 합격하고 행의(行義)가 곧아 만인의 존경을 받았다. 만년에 후산정(後山亭)을 세웠으며 유집이 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4「사마조(司馬條)」에 이름이 올랐으며, 『증보 진양속지(增補 晋陽續誌)』에 관련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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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금곡면 검암리 차현마을에 있는 남원양씨 효행비. 남원양씨는 어머니가 병이 들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소생시키는 등 지극정성으로 간호했다. 강수제(姜壽齊)에게 시집간 후로는 일찍이 남편을 여의었으나 시부모를 정성으로 모셨고, 아들을 장가보낸 뒤에는 자신의 일은 다 마쳤다고 여겨 약을 먹고 숨을 거뒀다. 이와 같은 행적을 기리기 위해 비가 세워졌다. 원래는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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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목사 강천(姜闡)의 후예로, 아우는 강척(姜惕)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의하면, 아우 강척과 더불어 문행이 있었다. 회림정(徊臨亭)을 세우고 아우 강척과 함께 학문에 진력하여 당시 사람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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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강엄(姜曮)이고, 아버지는 사인(士人) 유훤(柳煊)이다. 어려서부터 행실이 단정하였다. 남편 강엄이 병에 걸려 죽자, 한걸음에 달려가 슬퍼하며 말하기를 “곧 남편의 뒤를 따를 것이지만, 차마 하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세 달만 지나면 서로 만날 것입니다.” 라고 하였는데, 이는 당시 유씨의 배 속에 아이가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석 달 후 아이가 태어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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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사 강여평의 아내이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따르면 남편인 강여평이 중병이 들어 죽은 후에 3년 동안 죽만 마시고, 평생 소복을 입었다고 한다. 진주 평거리(平居里)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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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진양지(晋陽誌)』권3「인물조(人物條)」에 따르면 문과에 장원하여 두 번이나 승지가 되고 벼슬이 전라도 관찰사에 이르렀다고 한다. 아우 강자순(姜子順)은 옹주에게 장가들어 반성위(班城尉)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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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창원황씨는 남편이 병이 들자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먹게 하여 3일 동안 목숨을 연명시켰으나 마침내 세상을 떠나니, 곧 남편을 따라 자진하려 하였다. 그러나 가솔들을 부탁한다는 남편의 유지를 받들어 자녀의 혼인을 끝내고는 집안 식구들에게 이별을 고한 뒤 자진하여 남편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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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남편 강휘준은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본래의 생모를 후가(後家)의 낭실(廊室)에 모시고 양정(兩庭)을 효성으로 봉양하였는데, 재령이씨도 이에 순응하여 게을리하는 일이 없었다. 남편 강휘준이 본래의 생모를 낭실에서 모시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큰비가 오자 하천물이 갑자기 들이닥쳐 집이 떠내려가고 모자가 함께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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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진주. 아버지는 부사 강우복(姜遇福)이다. 전라도 순천 출신의 무사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인 강희복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고 고경명(高敬命)을 따라 금산전투에 참전하였으나 패배하였다. 잠시 고향인 순천으로 돌아가, 다시 의병 200여 명을 모집하여 군표(軍標)를 ‘비(飛)’자로 삼고, 남원을 공격하였다. 15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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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다양한 생활을 수용하기 위한 구축물의 총칭. 건축의 범위와 종류는 매우 광범위하다. 역사적인 건축물에 속하는 궁궐건축이나 관아, 서원건축, 각종 정자 구조물을 비롯하여, 불교에 관련된 사찰이나 탑, 부도, 그리고 현대적인 건축물인 고층 구조물이나, 도로 및 교량까지도 포함된다. 또한 재료에 따라서도 나무나, 돌, 흙, 벽돌, 콘크리트 등을 이용한 구조물 등이 있다. 진주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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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에 있는 공립 특수목적 고등학교 성실, 자율, 탐구를 교훈으로 삼고 있다. 교육목표는 성실과 자율을 바탕으로 탐구학습을 생활화하여, 미래 사회를 창조적으로 개척하는 과학인을 양성하는 데 있다. 1983년 경남과학고등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서 1984년 개교 및 1984학년도 신입생 입학식을 거행하였다. 1987년 1월 특수목적 고등학교 지정을 받고, 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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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호탄동에 있는 공립 고등학교. 경남정보고등학교는 1974년에 진주상업고등학교(사립)로 개교하여, 1995년에 경남정보고등학교(공립)로 전환하였다. 1998년도부터 특성화 고등학교로 지정되었으며,전국에서 처음으로 멀티미디어과, 전자상거래과, 골프과를 개설하여 전국적으로 그 운영에 있어 시범을 보이다가, 2010년에는 학과를 개편하여 디지털 미디어과, 유비넷과로 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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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칠암동에 위치한 예술문화회관. 경상남도문화예술회관은 경상남도의 문화 창달을 위해 경상남도 지역을 대표하는 종합 문화예술의 전당으로 사용하기 위해 1988년 8월 29일에 건립되었다. 1981년 10월 설계공모에 김중업의 작품이 당선되었고, 1984년 12월 18일 공사에 착공하여, 1988년 8월 29일 개관하였다. 2000년 1월 1일부터 학교법인 일선학원에서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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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가좌동에 위치한 중학교 ‘슬기롭고 참된 사람’이라는 교훈 아래, ‘슬기롭고 당당한 청소년을 기른다.’를 교육 목표로 삼고 있다. 1983년 4월 21일 경상대학교 사범대학 부속 중·고등학교로 설립인가를 받아, 1984년 중학교 5학급, 고등학교 3학급으로 개교하였다. 1987년 2월 14일 제1회 졸업식 때 졸업생 328명을 배출하였다. 같은 해 3월 1일 부속중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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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주 나동에 살았다. 성품이 착하고 효성스러워, 시집간 후로는 시부모를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시어머니가 병에 걸려 3년을 앓았는데 산이나 하늘에 정성으로 빌고, 시어머니의 대변을 맛보아 증상을 체험하는 등 정성을 다해 간병하였다. 이 일이 알려져 모성공회(慕聖公會) 및 군리로부터 표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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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능성(綾城)사람 구사서(具仕書)이고, 아버지는 김희수(金希洙)이다. 진주 가정에 살았다. 김녕김씨의 남편 구사서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다. 김씨부인은 남편을 따라 죽기를 결심했으나 늙은 시부모가 마음에 걸려 자진하지는 못하고, 헝클어진 머리와 때가 낀 얼굴로 미망인 생활을 자처하였다. 세 아이가 장성함에 따라 유학을 시키는 등 집안일을 정성껏 돌보았고,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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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능성인(綾城人) 구치조(具致祖)이고, 아버지는 왕기삼(王基三)이다. 진주 가정에 살았다. 개성왕씨는 천성이 착하고 효성스러워 시부모를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집이 가난하여 품팔이와 길쌈으로 생활을 꾸려나가고, 시부모에게는 몸에 편한 물건이나 입에 맞는 음식을 올렸다. 시어머니가 중한 병에 걸려 수년이 되도록 더해가니 왕씨는 백 일 동안 산에 올라가 시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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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에 위치한 초등학교 ‘미래 사회를 이끌어 갈 유능한 사람’이라는 교훈 아래, 나라를 사랑하며 근검절약하는 어린이, 심성이 곱고 예절바른 어린이, 스스로 공부하며 창의력이 뛰어난 어린이, 몸과 마음이 튼튼한 어린이를 육성한다. 1922년 금산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하였고, 1996년 3월 1일 지금의 금산초등학교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981년 5월 31일 병설유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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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경주. 자는 집중(執中).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의하면, 임진왜란 중이었던 1593년 진주성전투 때 손자 김덕연(金德連)과 더불어 창의종군하였는데, ‘왕사에 죽지 못하면 어찌 신하된 도리라 하겠느냐’고 하면서 전쟁에 임하였다. 결국 전투 중에 김덕연과 함께 순절하였다. 후에 숭질(崇秩)을 증여받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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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중천리에 있는 진양하씨의 열행비. 진주의 유생 김동철(金東喆)에게 시집간 진양하씨는 문충공 하륜(河崙)의 후손으로, 남편이 병에 걸려 위독한 상황에 처하자 자신의 무릎 살을 베어 먹여 소생시키는 등 정성껏 간병했다. 이 일이 알려져 진양하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비가 세워졌다. 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중천리의 양들 공군교육사령부 후문 입구의 도로변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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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열녀. 진사 김명선의 아내이다.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 당시 왜적에게 붙잡혀 끌려갔다. 도중에 산세가 험한 곳에 이르자 스스로 몸을 기울이니 결박된 것이 끊어지면서 떨어져 죽었다. 진주 영신대에 살았으며,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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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효자.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의하면, 김백산이 16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호랑이에게 물려갈 지경에 이르자, 낫을 휘둘러 호랑이를 쳐서 아버지를 구해냈다고 한다. 이 일이 알려져 1478년(성종 9)에 정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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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강씨는 남편 김서룡이 병이 들어 위독한 상황에 처하자, 두 되 남짓의 쌀을 가지고 가만히 산 속에 들어가 어느 무덤 속의 시체 곁에 두었다가 다음날 가지고 와서 미음을 써서 남편에게 봉양하기를 세 번 하였다. 미음이 효력이 없자, 이번에는 자신의 허벅지살을 베어 남편에게 구워 먹였다. 남편이 기력을 회복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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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삭녕최씨는 성품이 효성스러워 시부모를 잘 섬겼다. 시부모가 병이 들어 오랫동안 자리에 누워 있자 지극 정성으로 간호하였고, 울적함을 달래주기 위해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거나 등에 업고 즐겁게 해드리는 등 정성을 다하였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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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진양강씨의 시어머니가 학질을 앓아 고통이 심하여 거의 실신할 지경에 처하자 강씨가 울면서 하늘에 빌고, 또한 자신의 허벅지살을 베어 약을 지어 올리는 등 지극 정성으로 간병하였다. 강씨의 정성으로 병이 나은 시어머니는 천수를 누린 후 죽었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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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峰). 안동 출신이다. 아버지는 김진(金璡)이고, 동생은 김복일(金復一)이다. 1556년(명종 11)에 아우 김복일과 함께 이황(李滉)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에 정진하였으며, 1564년에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이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586년 나주 사직단(社稷壇)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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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김준원(金俊元)의 손자로 효성이 남달랐다. 16세가 되던 때, 아버지가 병이 들자 집 뒤쪽에 단을 쌓고 아버지의 쾌차를 위해 울면서 하늘에 빌기를 한 달이 넘도록 하였다. 어느 날 홀연한 기운이 돌면서 무지개와 같은 것이 단에서 나와 아버지가 누워있는 병상 쪽을 향해 뻗쳤다. 이후 아버지의 병은 곧 나았다고 한다. 그 효행이 나라에 알려져 정려되었으며 『진양속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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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김승택(金昇澤)이고, 아버지는 강호운(姜浩運)이다. 진주 미천에 살았다. 진양강씨는 남편 김승택이 중한 병에 걸려 수개월간 자리에 누워있자, 지극 정성으로 간병을 하였으나 차도가 없었다. 어느 날 가만히 방으로 들어가 약을 마시고 자진하니 집안 식구들이 서둘러 구하고자 하였으나 숨을 거두었다. 얼마 후 남편이 회복되어 쾌차하게 되자, 마을 사람들이 감탄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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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광주노씨는 시아버지가 병이 들어 자리에 눕자 자신의 허벅지살을 베어 약을 지어 올리는 등 지극 정성으로 간병하였다. 또한 시어머니가 병이 들어 위독하자 밤낮으로 하늘에 쾌유를 빌고,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먹게 하는 등 병든 시부모를 정성껏 간병하였다. 이 일에 감복한 향리가 조정에 보고하여 고종 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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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진양속지(晋陽續誌)』권1「임관조(任官條)」에 따르면, 1877년(고종 14)부터 1878년까지 진주목사로 부임하였다. 구휼미 1천4백6십여 석과 소금 1백5십여 석을 창고에서 덜어내어 기민을 구제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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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 온수리 장곡마을에 있는 효행비. 김응문은 아버지가 중병이 들자 갖은 정성으로 간호하였는데 이와 같은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김응문의 처 거창유씨도 시아버지가 혼절하자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먹여 소생시키는 등 김응문에 못지않게 정성으로 간호하였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깅응문은 동몽교관 겸 예조정랑이란 벼슬이 내려졌고, 부인 거창유씨에게도 정려가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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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가산리에 있는 김종립 처 경주최씨의 열행비. 경주최씨는 남편 김종립이 병에 걸리자 주저 없이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먹이는 등 지극정성으로 남편을 간호하여 소생시켰으나, 정작 자신은 그로 인해 고생하다 죽었다. 그 열행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가산리 진산마을의 가마고개 도로변에 위치한다. 사각형 받침돌 위에 높이 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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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가산리 진산마을에 있는 김종팔 형제의 효행비. 김종팔은 어머니 전씨가 매우 중한 병에 걸려 사경을 헤메고 있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먹게 하여 소생시켰다. 또한 동생 김종오도 아버지 김영곤이 병들자 형과 똑같이 행동하여 아버지를 간병하였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비가 세워졌다. 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가산리 진산마을의 가마고개 도로변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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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진양강씨는 어려서부터 효성스러워 어버이를 잘 섬겼는데, 시집간 후로는 시부모를 지극 정성으로 모시고, 친지들에게 예로써 접하니 모든 사람들이 감복하였다. 남편 김중철이 오랫동안 학질로 고생하였는데, 사람의 살이 효능이 있다는 말을 듣고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약을 지어 올렸다. 이후 남편의 병세가 호전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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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개항기의 열녀. 윤선랑은 본래 함안 양가의 딸이었는데 1876년(고종 13)에 큰 흉년을 당하여 일가가 떠돌이 신세를 면치 못하다가 진주 청원촌(淸源村)에 이르러 최씨 집안의 불 때는 종이 되었다. 주인의 어머니가 몹쓸 병이 들자 정성껏 간병하였고, 남편이 사망하자 그 시어머니를 잘 봉양할 것을 동서에게 부탁하고 후사를 세워 남편의 뒤를 이어줄 것을 시동생에게 부탁한 다음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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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추백(秋佰), 호는 노주(蘆洲). 아버지는 김단(金鍴)이며, 후에 김곤(金錕)에게 입양되었다. 1660년(현종 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장령, 헌납, 문학, 보덕을 차례로 역임하였고, 1694년 사간으로 있을 때 서인인 한중혁(韓重爀) 등이 폐비 민씨의 복위를 도모하자 이들을 탄핵하였다. 후에 숙종이 민씨의 폐위를 후회하게 됨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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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1671년(현종 12)에 진주목사로 부임하여 1673년까지 재직하였으며, 벽오당(碧梧堂), 조양각(朝陽閣), 의곡사(義谷寺) 등을 세웠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1「임관조(任官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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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김녕김씨 김형백(金炯佰)이고, 아버지는 하계윤(河啓潤)이다. 행실이 정숙하여 시부모와 남편을 정성을 다해 모셨다. 시할머니가 오랜 기간 병상에 누워있게 되자, 밤낮으로 탕약을 지어 올리는 등 간병하는 데 한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산적이 깊은 밤에 나타나 남편을 포박하여 데리고 가려 하자, 진양하씨가 따라가서 ‘나의 남편이 무슨 죄가 있기에 죽이려 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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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하대의 재상·장군. 자는 태(泰). 태종무열왕의 9세손으로 증조부는 상재를 지낸 이찬(李湌) 김주원(金周元)이고, 할아버지는 시중을 지낸 소판(蘇判) 김종기(金宗基), 아버지는 시중을 지낸 파진찬(波珍湌) 김장여(金璋如)이다. 822년(헌덕왕 14) 당나라에 건너가 숙위(宿衛)하고 1년 뒤에 귀국하였는데, 귀국 즉시 남원태수를 제수받고, 여러 번 승진하여 강주(지금의 진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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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문산읍 삼곡리에 있는 실기 노당(露堂) 추적(秋適)의 실기로 곧 행장을 뜻한다. 추적[1246~1317]은 조선시대 어린이의 교양서적인 『명심보감(明心寶鑑)』을 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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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대평면 대평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생활유적. 대평리 옥방6지구 유적이 위치하는 대평리 일대는 하천의 범람으로 강안이 확대되고 그 배후에 모래가 퇴적되어 현재 지층과 같은 충적대지가 형성되었다고 추정된다. 신석기시대라고 하는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인간들의 생활공간이 이곳에서 시작된 것은 남강을 이용한 발달된 수로와 농경을 위한 넓고 평평한 대지, 풍부한 수자원 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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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대평면 대평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생활유적. 대평리 옥방9지구 유적이 위치하는 대평리 일대는 하천의 범람으로 강안이 확대되고 그 배후에 모래가 퇴적되어, 현재 지층과 같은 퇴적지대가 형성되었다고 추정된다. 이 지역은 지형적으로 강변에 근접하는 곳으로 주로 자연제방과 대규모의 경작지 유구가 검출되었다. 대평리 옥방9지구 유적은 경상남도 진주시 대평면 대평리 8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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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대평면 신갈리에 있는 효행비. 지극한 효성으로 동몽교관이 된 창원황씨 황섭(黃攝)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경상남도 진주시 대평면 신갈리에 위치한다.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높이 147㎝, 너비 58㎝, 두께 19㎝의 몸돌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돌을 얹었다. 비신에 비해 머릿돌이 매우 커서 사방에 받침기둥을 마련하였다. 글자의 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비의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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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금곡면 죽곡리 죽곡마을에 있는 비. 밀양손씨가 남편 김영성이 학질에 걸리자 자신의 넓적다리를 베어 먹이는 등 지극정성으로 남편을 간호하여 소생시킨 열행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경상남도 진주시 금곡면 죽곡리 죽곡마을의 입구 도로변에 위치한다. 사각형 받침돌 위에 높이 137㎝, 너비 46㎝, 폭 20㎝의 몸돌을 세우고 그 위에 대형의 머릿돌을 얹었다. 받침돌 사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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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에 있는 녹권. 임진왜란 때 진주성 전투에서 활약한 박세항의 공을 찬양하여 내린 선무원종공신녹권(宣武原從功臣錄券)으로, 선조 38년(1605) 도승지 신흠(申欽)이 임금의 뜻을 받들어 내렸다. 박세항은 현재 창렬사에 배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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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부계리 저동마을에 있는 박승유(朴承裕)의 효행을 기리는 비. 아버지가 병이 들어 혼절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먹이는 등 정성으로 간호하였고, 결국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근신하면서 머리를 빗지 않았다고 하는 박승유의 효행을 기념하여 아들인 박정승(朴靜乘) 등에 의해 세워졌다.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부계리 저동마을 입구의 도로변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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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지역 최초의 서양식 민간병원. 배돈병원은 호주선교회가 진주지역의 환자를 중심으로 기독교 전도 사업을 하기위해 1913년 11월 4일에 세워졌다. 배돈병원의 건립은 호주선교회가 진주에 들어왔던 구한말부터 논의되기 시작하였는데, 1910년 호주의 건축가 켐프가 병원설계도를 작성하면서 활성화되었다. 당시의 공사업자는 일본인 토목기술자였으며 호주선교회가 세웠던 당시 옥봉리교회 옆에 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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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선비. 본관은 수원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인물조(人物條)」에 의하면, 백홍제는 성품이 넓어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나이가 아직 어려 어머니와 함께 산속에 피신해 있었는데 갑자기 적을 만나 포로가 되었다. 배에 태워져 바다를 건너려 할 때, 기지를 발휘하여 적이 깊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칼을 훔쳐내어 배 가운데 있는 적을 모두 죽이고 같이 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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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상봉동에 있는 강이식(姜以式) 장군을 모시는 사당. 강이식 장군은 진주강씨의 시조로, 고구려 영양왕 9년(598) 임유관(臨楡關) 전투와 612년(영양왕 23) 살수대첩에서 수나라 대군 30여만 명을 섬멸시킨 명장이다. 950년 고려 광종은 고구려 병마도원수 강이식 장군의 구국충절을 기려 봉산사를 건립하고, 매년 한식날에 제사를 모시게 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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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의 모습을 회화나 조각으로 만든 상. 불상이란 불전 안에 봉안된 부처의 상을 통칭하는 말이다. 불상들은 각기 다른 교리적 배경을 갖고 있는데, 크게 불상·보살상·조사상·신장상 등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진주지역에 소재하고 있는 불상은 보물로 지정된 단성석조여래좌상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용암사지석불, 평거석조여래좌상, 고산암석조비로자나불좌상, 진주성전암목조여래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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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단목리 담산고택 소장 효행관련 고문서. 중한 병에 걸려 위독한 지경에 처한 어머니를 몇 번이고 지극 정성으로 간호한 하진태의 효행 실적을 단동촌 동장이 사죽집강에게 서면으로 보고하였는데, 사죽집강이 이것을 진주목사에게 서면 보고하고 현양을 요청한 것이다. 「사죽집강서목」에서 서목이란 하관이 상관에게 올리는 원장(原狀)에 구비하는 문서를 말한다. 즉 단동촌 동장이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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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대평면 당촌리에 있었던 정미(精米)시설. 사평정미소(砂坪精米所)는 경상남도 진주시 대평면 사평마을에 있었던 대평면에서 가장 오래된 정미소로서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제분기 등의 정미시설이 가동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진주시 대평면 당촌리 사평마을에 살던 강형수가 처음으로 소규모 정미소를 지어 정미업을 시작한 것이 시초가 되었다. 경상남도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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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리 본동에 있는 비각. 이 건물은 3명의 효자를 기리는 내용을 기록한 판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졌다. 삼효각은 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리 본동에 있는 충의사로 접어드는 삼거리의 개울 건너편 산자락에 위치한다. 이익공 맞배지붕의 목조 기와집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구조이다. 가구구조는 이익공 양식으로 처마의 네모서리에는 원형초석 위에 세워진 원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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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대평면 상촌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생활유적. 상촌리 선사유적은 경상남도 진주시 대평면 상촌리 287번지와 395번지 일대의 밭 약 7,000평에 해당하는 곳에 위치한다. 진주 남강댐 수몰지역 고고학 발굴조사를 위해 1996년 12월 23일부터 1998년 6월 30일까지 3차에 걸쳐 건국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하였다. 상촌리 일대는 A지구, B지구, 어성초밭, C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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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덕곡리에 있는 비. 경주최씨가 남편 서치담(徐致淡)이 중한 병에 걸리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먹이는 등 온갖 정성으로 남편을 간호한 행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사각형 받침돌 위에 높이 107㎝, 너비 76㎝, 폭 12㎝의 몸돌을 세웠다. 머릿돌이 존재하지 않는 대신, 특이하게 몸돌의 윗부분 모서리를 각을 내어 뾰족하게 처리하였다. 비의 제목은 ‘열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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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성경철(成慶喆)이고, 아버지는 강기섭(姜岐燮)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진양강씨는 심성이 효성스러워 시어머니를 정성껏 모셨다. 어느 날 시어머니가 중한 병에 들어 자리에 눕자, 3년 동안 하늘에 빌어 마침내 신령스러운 효력을 얻었다. 나이 20여세 때 아들을 낳았는데, 홀로 된 시어머니 때문에 우는 소리도 내지 못하니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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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무신. 자는 내순(乃純), 호는 공금당(共衾堂). 성성재(惺惺齋) 성황(成鎤)의 후손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인물조(人物條)」에 의하면, 성동일은 벼슬에 오르기 전에 부모상을 당하자 예를 갖춰 장례를 지냈고, 성품이 효성스러워 계모를 잘 모셨다. 벼슬에 올라서는 엄중하게 처리하니 당시의 사람들이 공황(龔黃)[중국 한나라 공과 황 두 사람]에게 견주었다.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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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무신인 성동일의 유서를 담은 통. 성동일(成東一)의 자는 내순(乃純) 호는 공금당(拱衾堂)이며, 성성재(惺惺齋) 성황(成鎤)의 후손이다. 부모상을 당해서는 지극한 예를 행하였고, 성품이 효성스러워 계모를 정성껏 모셨다. 횡성현감, 내금위, 칠곡도호부사를 지내면서 정사를 잘 돌보았는데, 이 유서통은 그때 받은 것으로 지금까지 전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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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성사회(成師悔)이고, 아버지는 정사갑(鄭師甲)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진양정씨는 남편 성사회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혈서를 써서 세 번이나 영정 앞에 두고 갓 끈으로 스스로 목을 매에 죽었다. 암행어사에 의해 이 일이 나라에 보고되어 1816년(순조 16)에 정려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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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성치린(成致麟)이고, 아버지는 허란(許鑾)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김해허씨는 평소에 정조를 엄격히 지켰다. 남편의 장례 때 곡을 하면서 생각하기를 ‘3년 상을 정성으로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여 흐트러진 머리와 때가 낀 옷으로서 제를 마치고 상이 끝나는 날에 조용히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 절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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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정촌면 소곡리에 있는 조선시대 전기의 분묘군. 소곡리 유적은 진주시 정촌면 소곡리에 있는 조선시대 전기의 분묘군이다. 9기의 조선시대 묘가 조사되었는데, 봉분은 양호하게 남아 있는 상태이며, 1기 축조방식을 보여주며 형태도 비슷하다. 4호묘와 5호묘, 8호묘와 9호묘는 유구 축조방식과 유물 출토양상으로 보아 친연 관계의 묘일 가능성이 높다. 청동수저, 장도, 뒤꽂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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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에 있는 책. 1705년 소촌도 관아의 역리가 역참(驛站) 경영에서 겪고 있는 폐해 상황을 상부에 진정하기 위해 책으로 엮은 것이다. 한지 필사본으로 모두 7권이다. 가로 30㎝, 세로 31.5㎝, 1면 13행, 1행에 평균 23자로 모두 82면의 분량이다. 소촌도의 역참 경영에 따른 폐해를 보고하기 위해 책으로 엮은 것으로 조선시대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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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효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진양정씨는 시아버지가 병이 들어 위독한 지경에 처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먹게 하여 회생시켰으나 아직 위독한 상황이었다. 이 때 꿈속에서 어떤 사람이 집 뒤의 바위틈에 산삼이 있을 것이라는 계시를 하여 실제로 캐어보니 산삼이 나왔다. 캔 산삼을 시탕하여 올렸더니 시아버지가 쾌차하였다. 한편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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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문산읍 이곡리 어수마을 입구에 있는 신명천 처 함안조씨의 열행을 기록한 비. 함안조씨는 남편 신명천과 자식이 일찍 죽었으나 평생을 수절하였다. 그 열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경상남도 진주시 문산읍 이곡리 어수마을 입구에 있다.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높이 140㎝, 너비 48.5㎝, 두께 18.5㎝의 몸돌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돌을 얹었다. 머릿돌은 몸돌에 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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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에 있는 실크의 전시·판매 시설. 진주의 실크산업 부흥을 위해 중소기업청과 경상남도와의 협의 끝에 진주시 소재의 실크 제조업체들이 공동 브랜드인 (주)실키안을 만들고, 1999년 6월에 진주성 앞에 있는 문화관광센터 1층에 실크전시장을 설립하여 실크로 만든 제품들을 전시·판매하고 있다. 실크전시장에서는 다양한 진주 특산품들과 더불어 실크로 된 상품들을 상설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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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정촌면 대축리에 있는 열부 밀양박씨의 행적을 기리는 비. 황기찬의 처 밀양박씨는 남편이 전라도 지방에 나갔다가 죽자 스스로 남편의 시신을 옮겨와 고향에 묘를 마련하고, 부지런히 일해 자식들을 훌륭히 키웠다. 그 열행을 기리기 위해 자손들이 세웠다. 경상남도 진주시 정촌면 대축리 함촌마을의 입구 도로변에 위치한다.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높이 142㎝, 너비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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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미천면 반지리에 있는 비. 문보현(文寶鉉)의 처인 안동권씨가 시부모에게 행한 효행과 남편에게 행한 열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받침돌은 드러나 있지 않아 명확히 알 수 없고, 몸돌은 높이 143㎝, 가로 58㎝, 폭 15㎝로 그 위에 머릿돌을 얹었다. 특이한 점은 몸돌 좌우로 장방형의 판석을 세워 머릿돌을 받치고 있다. 비의 제목은 ‘효열부유인안동권씨지비(孝烈婦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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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설매리에 있는 열녀 전주유씨의 정려비. 강엄의 처 전주유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설매리에 위치한다.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높이 135㎝, 너비 56㎝, 폭 15㎝의 몸돌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돌을 얹었다. 몸돌의 좌우에는 장방형의 받침돌을 덧붙여 머릿돌을 받치게 설치하였다. 비문의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비의 제목은 「열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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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 청원리에 있는 열녀 파산이씨를 기리는 비. 남편이 일찍 죽자 평생을 수절하며 시부모와 시조모를 공경한 파산이씨의 열행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 청원리 정골소류지 부근의 도로변에 위치한다.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높이 120㎝, 너비 40㎝, 폭 12㎝의 몸돌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돌을 얹었다. 비의 제목은 「열부사인재령이중환처파산이씨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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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오미리 시목마을에 있는 생활유적. 오미리 시목 유적은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건설예정 구간에 대한 구제발굴의 성격을 가진 것으로, 전체유적 중에서 일부만 조사되었다. 조사결과 조선시대 전기에서 중기에 이르는 시기에 해당하는 유구와 유물들이 확인되었는데, 통일신라시대 묘 1기와 조선시대의 건물지, 기둥구멍군 등이 조사되었다. 오미리 시목 유적이 위치하는 곳은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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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단목리 담산고택 소장 효행관련 고문서. 「오응운등상서」는 효자 하진태의 포증을 건의하는 경상우도 유생들의 건의서이다. 하진태의 노모를 향한 지극한 효행을 기리고 정려를 받기 위한 상서문은 하진태의 생존시부터 시작하여 사후에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오응운, 최상갑, 정운현 등 진주 일원의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진정서를 올린 일종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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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미천면 상미리 기전에 있는 효자비. 아버지가 병이 들어 위독한 상황에 놓이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이게 하는 등 정성으로 간호한 오철상의 행적을 기념하여 세워졌다. 경상남도 미천면 상미리 기전에 위치한다.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귀부를 얹고 높이 134㎝, 너비 47㎝, 두께 15㎝의 몸돌을 세우고, 몸돌 좌우에 장방형의 판석을 세워 그 위에 머릿돌을 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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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밀양박씨는 시부모를 잘 봉양하고 남편을 공경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일찍 과부가 되었다. 슬하에 어린 아이가 있어 남편을 잃은 애통함을 억제하고 시부모를 위로하면서 30년간 수절하였다. 그동안 음식은 소채로 하고, 의복도 소복으로 하였으며, 세수하지 않고 머리에 빗질도 하지 않았다. 시부모가 중한 병이 들자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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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추보(樞甫)이다. 『진양지(晋陽誌)』권3「인물조(人物條)」에 따르면, 1540년(중종 35)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46년에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벼슬이 군수에 이르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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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의성김씨는 남편 유치덕이 강화에서 객사하자 천리 길을 왕복하여 시신을 짊어지고 돌아와 고산에 안장하였다. 그 후 14년이 지나 남편의 제삿날에 자녀들을 불러 이르기를 “내가 남편을 따라 자결할 마음이 간절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어렸기 때문이다. 지금은 장성하여 내가 할 일을 끝냈다.”라 하였고,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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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파평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의하면, 천성이 순수하고 효성스러워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잘 섬겼다. 아버지가 종기로 수개월 동안 자리에 누워 있자, 종기를 입으로 빨아서 치료했다고 한다. 그리고 꿩과 올빼미 등을 부모가 원하는 대로 올렸다. 부모가 천수를 다하여 세상을 떠나니 상중에도 슬퍼했으며, 비바람이 부는 날에도 성묘를 폐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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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유학자 윤탁의 아내이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따르면 남편인 윤탁이 병이 들어 거의 죽을 지경이 되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먹게 함으로서 소생시키는 등 지극정성으로 간호하였다고 한다. 진주 금산리(琴山里)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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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월암리에 있는 비. 김춘식의 처인 은진송씨가 부모님께 행한 효행과 남편에게 행한 열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높이 145㎝, 폭 18.5㎝, 가로 44㎝의 몸돌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돌을 올렸다. 비문은 다른 비문과는 달리 몸돌에 장방형으로 비문을 새길 부분을 파서 그 속에 새겨놓은 점이 특징이다. 비의 제목은 ‘은진송씨효열비(恩津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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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단목리 담산고택 소장 효행관련 고문서. 「이경상등상서」는 하진태의 효자 정려를 위해 암행어사에게 올린 경상우도 유생들의 진정서이다. 지난 40여 년 동안 진주목·감영에 수십 장의 진정서를 올렸지만 포증사업에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하자 암행어사에게 특별 건의를 한 것이다. 그러나 암행어사 역시 공의를 빙자하여 번거롭게 하지 말 것을 지시하고 있다. 진정서를 올린 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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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효자. 아버지는 참봉 이일민(李逸民)이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따르면, 아버지가 중풍을 앓아서 한쪽 발이 불편하였는데, 언제나 지극 정성으로 봉양하였다. 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 26) 아버지를 업고 산에 숨었는데, 아버지가 적에게 발견되어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되자 자신의 몸을 던져 적과 함께 죽었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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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인숙(寅淑). 재예가 탁월하여 여러 번 식년과에 응시했으나 결국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후에 경기전(慶基殿) 참봉으로 제수되었다. 평소에 술을 즐겨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 거리낌이 없었으며, 서울에도 집이 있어 중요 기관에 아는 이가 많았으나 높은 벼슬을 구하려 하지 않았다. 또한 네 명의 형제들과 더불어 서로 화목하니 당시 사람들이 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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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문신.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직경(直卿). 문음으로 옥과(玉果) 현감에 제수되었다. 집에 있을 때에도 예로써 몸을 단정히 하였고, 자제들이 허물이 있으면 성년이 되어서도 매를 들었다. 향인과 더불어 술자리를 가지더라도 흐트러짐이 없고, 의논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와 듣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냈다. 『진양지(晋陽誌)』권3「인물조(人物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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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열녀. 남편은 이광림(李光臨)이고, 아버지는 고응추(高應樞)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장흥고씨는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집안 식구에게 말하기를 “여자가 순종해야 할 세 가지 길이 있는데, 나는 따라야 할 자식이 없으니 남편을 따라서 죽는 것이 옳다. 내가 죽거든 남편과 같이 장사지내 달라.” 하고 목을 매어 죽었다. 이 일이 조정에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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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아버지가 돌아가자 3년 동안 죽만 먹으며 크게 슬퍼하였는데, 결국 몸이 쇠약해져 거의 실성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진주 백곡에 살았으며,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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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전주최씨는 1719년(숙종 45)에 남편 이덕유(李德裕)가 세상을 떠나자, 같이 죽을 것을 맹세하고 스스로 상복을 입고 독을 마시고 자진하였다. 5년 뒤에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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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방촌리 등건마을에 있는 조선 중기 의병 이도량의 신도비. 이도량은 임진왜란 때 아버지 이명걸을 도와 의병활동을 전개하다가 순국하였다. 증자헌대부공조판서(贈資憲大夫工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신도비에는 임진왜란 때의 활약상을 기록해 놓았다.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방촌리 등건마을의 학교 앞 대나무밭에 나란히 위치한다.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높이 151㎝, 너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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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방촌리 등건마을에 있는 조선 중기 의병 이명걸의 신도비. 임진왜란 때 이명걸(李命杰)이 전공을 세운 내용을 기록한 비석이다. 이명걸은 1533년생으로 본관은 합천이고, 증자헌대부예조판서(贈資憲大夫禮曹判書)에 추증된 인물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자칭 홍의장군이라 부르며 집안의 일꾼과 마을 청년 200여 명을 거느리고 아들 이도량과 함께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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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함안인(咸安人) 이상립(李相立)이고, 아버지는 강태관(姜泰館)이다. 진주강씨는 어려서부터 품행이 정숙하고 총명하였다. 시집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 이상립이 우연히 병에 걸려 위독한 상황에 이르자 백방으로 조치하고 정성을 다해 간병하였으나 마침내 세상을 하직했다. 강씨는 곧바로 약을 먹고 남편의 뒤를 따라 죽었는데, 25세의 젊은 나이였다. 이 일이 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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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마성리 남마성마을에 있는 이원춘(李元春) 부자의 전공 기념비. 이원춘과 그의 아들 이인민(李仁民)은 임진왜란 때 김시민(金時敏) 장군과 함께 진주성을 방어하고, 정유재란 때 남원에서 활약하다가 순국하였다. 1914년 이원춘 부자를 기념해서 비를 세웠다.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마성리 남마성마을 내에 위치한다.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높이 188㎝, 폭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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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진양정씨는 15세의 나이에 남편 이인호가 요절하자, 오히려 시부모를 위로하고 조금도 비통해하는 빛이 없었다. 그러나 여러 차례 남편의 뒤를 따라 자진하려 했다. 진양정씨의 부모가 그 정성을 갸륵하게 여겨 개가를 시키려 하자 가만히 방으로 들어가 자결하였다. 이에 향인들이 진양정씨의 열행을 가상히 여겨 비를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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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함안이씨 나이 16세에 남편이 중한 병에 걸려 요절하였다. 함안이씨는 이를 깨물고 스스로 맹세하더니 마침내 식음을 전폐하고, 요절한 남편을 따라 생을 마쳤다. 이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함안이씨의 열행을 기려 비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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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안동권씨는 시아버지가 호랑이에게 잡혀가는 위급한 상황에 처하자 호랑이를 향해 크게 소리치고, 머리를 풀어헤친 채로 대항하는 등 기지를 발휘하여 시아버지를 구했다. 이 일이 숙종조에 알려져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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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신씨는 16세의 나이에 시집을 갔는데, 다음해에 남편 이충엽이 요절하자, 염습의 준비와 장례 음식을 몸소 다하였다. 어느 날, 부실(副室) 김씨에게 일러 말하기를 “나는 젊은 나이에 남편이 죽고 자식도 없는데 살아서 무엇을 하겠는가.”라 하고 눈물을 흘리니 듣는 사람 역시 또한 슬퍼했다. 부실 김씨는 이때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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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단목리 담산고택 소장 고문서 중 별급문기. 이탁의 본관은 전의(全義), 좌승지를 지낸 이종문(李宗文)의 손자이다. 이탁의 사위 하명은 1660년(현종 1) 식년 진사시에 입격했는데, 병환 중에 사위의 입격 소식을 들은 이탁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노비 1구와 전답 15마지기를 지급한 것을 문서로 작성한 것이다. 과거 합격에 따른 재산 지급은 별급의 전형적인 형태에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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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미천면 어옥리에 있는 비. 효자 임병태가 행한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경상남도 진주시 미천면 어옥리에 있는 미천초등학교 옆에 위치한다.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높이 180㎝, 너비 60㎝, 두께 15㎝의 몸돌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돌을 얹었다. 비문은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비의 제목은 ‘효자나주임공병태행적비(孝子羅州林公炳泰行蹟碑)’로 효자 임병태의 행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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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열녀. 수군 장억수(張億守)의 아내이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왜군에 맞서 절개를 지키다 죽었는데, 이 일이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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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장한우(張翰佑)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김해김씨는 나이 18세 되던 해에 결혼하였는데 시댁에 가기도 전에 남편이 요절하였다. 김씨는 머리를 풀고 달려가서 애통해 하더니 성복하는 날에 칼을 물고 엎드려 남편의 뒤를 따르니, 고을 인사들이 비를 세워 김해김씨의 열행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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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성산이씨는 본래 성품이 착하고 효성스러웠는데, 남편 정규로가 병이 들자, 집이 가난한 탓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돈을 마련하여 약을 구했다. 또 남편 대신 자신이 죽기를 하늘에 기원했다. 마침내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예로서 장례를 치르고 난 후, 침실로 들어가 자진하여 남편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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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자는 여준(汝準)이고, 아우는 정대영(鄭大榮)이다. 문장과 필법으로 이름을 떨쳤다. 의기사(義妓祠) 앞 바위에 의암(義巖)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바로 정대융이 쓴 것이다. 후에 우승지(右承旨)를 추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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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자는 유성(由聖), 호는 송죽헌(松竹軒). 학포(學圃) 정훤(鄭暄)의 현손이다. 효성과 효우가 남달랐고, 오랫동안 잃었던 선조의 묘를 찾을 때에는 태(笞: 작은 곤장)를 잡고 스스로 벌하였고, 3대 동안 나누었던 가산을 합하여 한 집에서 함께 살았다.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와 더불어 도의의 친구로 삼았다고 한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인물조(人物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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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양. 자는 국장(國章), 호는 해사(海史). 허재(虛齋) 정지탁(鄭志倬)의 후손이다. 용모가 크고 기우가 헌양하여 장자의 도장이 있었다. 일찍이 월촌 하달홍(河達弘), 면우 곽종석(郭鍾錫)의 문하에 있었으며, 족형(族兄) 운파(雲坡) 정한균(鄭漢均)과 더불어 수학하였다. 유집으로 『해사선생문집(海史先生文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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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선비. 자는 거원(巨源)으로, 석정(石亭) 정홍조(鄭弘祚)의 둘째 아들이다. 황암(崲岩) 박제인(朴齊仁)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아 짧은 기간에 학문을 성취할 수 있었다. 나이 28세 때 어머니 상을 당하자 슬퍼함이 예를 넘어서 병이 들 지경이었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감찰(監察)을 추증하였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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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청송심씨는 남편 정문혁이 병에 걸려 수개월을 간병하였으나 위독한 지경에 이르자, 도끼로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먹게 하였다. 그러나 소생의 기미가 없자 기절했다가 곧 일어났다. 이에 시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자식이 노모를 버리고 갔는데 애통하여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라 하고 미음을 만들어 드렸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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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진양하씨는 남편 정상규(鄭翔圭)가 병이 들어 자리에 눕자 지극 정성으로 봉양하였다. 그러자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는 물고기가 잡히거나, 꿩이 집안으로 날라 오는 등 기이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고, 단계(端溪) 김인섭(金麟燮)[1827~1903]이 정려기를 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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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상봉서동에 있는 송덕비. 정상진이 이웃의 농민 소작인에게 구제를 행한 행적과 은덕을 기념하기 위해 1918년 진주의 농민이 새운 송덕비이다. 귀부를 받침돌로 삼고 있으며, 그 위에 높이 178㎝, 폭 67㎝, 두께 24㎝의 몸돌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었다. 귀부는 풍화로 인하여 마멸상태가 심하나, 앞발 및 이목구비는 어느 정도 분별할 수 있다. 몸돌에 새겨진 글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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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함안조씨는 홀로된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시고, 남편에게는 매우 공경히 대하였다. 남편 정상천(鄭相天)이 죽음에 직면하자, 손수 송별사를 시어머니와 본가에 써서 두고 얼마 후 조용히 남편 뒤를 따라 세상을 하직하였다. 숙종 때에 이 일이 알려져 정려되었고, 정언(正言) 이약렬(李若烈)이 정려문을 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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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최씨는 어려서부터 심성이 착하고 효성스러웠는데, 18세에 시집가서 시부모를 효성으로 섬겼다. 남편 정세현(鄭世鉉)이 병을 얻어 위독한 지경에 처하자, 울면서 시어머니께 이르기를 “지아비가 죽으면 지어미는 따르는 것이 도리이니 맹세코 장차 같이 갈 것입니다.”라고 하고 손가락을 잘라 입에 대어 넣고, 하늘에 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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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현감 정세창(鄭世昌)의 아들로, 형은 정인평(鄭仁平)이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따르면, 정순평은 만년이 되어 어머니 상을 당하였는데, 애통해하며 죽만 마시다가 상중에 죽었다. 진주 진성리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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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진양지(晋陽誌)』권3「인물조(人物條)」에 의하면, 정승개는 천성이 착하고 친족들과 돈독하게 지냈으며 이웃에게 화목하였다. 여러 차례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하였다. 진주 상사리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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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단목리 담산고택 소장 효행관련 고문서. 하진태의 효행 정려를 위한 상서문은 1791년 하진태의 생존시에 「단동촌동장수본」이나 「사죽집강서목」 등 이미 행정계통에 따라 보고된 바 있었고, 1800년 하진태의 사망과 동시에 본격적으로 추진되어 수십 차례에 걸쳐 진정서가 올려졌으나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런 경향은 하진태 뿐만 아니라 다른 효자나 열부에게서도 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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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김해김씨는 나이 22세가 되던 해에 시집을 갔는데 남편 정연항(鄭蓮恒)이 14세의 나이로 요절하여, 부모가 김해김씨를 가엾게 여겨 다시 시집보내려 하자 금약을 마시고 죽었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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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할아버지인 정광윤(鄭光胤)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항전하였다. 정광윤이 1593년(선조 26) 진주성이 함락될 때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자, 그 뒤를 이어 적진으로 돌진하였으나 힘이 다하여 결국 전사하였다. 임진왜란 때 세운 공이 인정되어 부장(部將)을 추증 받았고, 선무원종2등공신이 되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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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 금곡리 구계 부락에 있는 열녀 정운창 처 이씨의 행적을 기념하는 효열비(孝烈碑). 병든 남편을 정성껏 간호한 정운창 처 이씨의 효열을 기념하기 위하여 정운표의 주도 하에 1936년에 세워졌다. 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 금곡리 구계마을 건너편 도로변에 서쪽을 향해 세워져 있다.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높이 115㎝, 폭 37㎝, 두께 19㎝의 몸돌을 세우고 그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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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재령이씨에게는 후사가 없었고 대신 전처 소생의 딸이 있었다. 남편이 병에 걸려 위독한 지경에 처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먹이고, 하늘에 남편의 쾌유를 기원했다. 남편 정운창(鄭運昌)은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알고 늙은 시부모와 전처의 딸, 그리고 후사를 들여 종가를 이을 것을 부인에게 부탁하였다.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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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무신.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의하면, 훈련원 주부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1593년(선조 26) 진주성전투에 참전하여 전사했다. 1743년(영조 19)에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추증되었으며, 경상남도 진주시에 있는 창렬사(彰烈祠)에 배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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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열녀. 남편은 정은교(鄭誾敎)이고, 아버지는 임노헌(林魯憲)이다. 평택임씨는 시어머니가 민물고기를 좋아하므로 하늘에 기원을 올려 한 자 크기의 물고기를 구했으며, 남편이 중한 병에 걸렸을 때도 하늘에 기원을 올려 남편이 쾌차하였다.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1833~1906]이 전기를 찬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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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김해허씨는 일찍 남편을 잃어 후사가 없었고, 또한 집이 매우 가난하였으나, 정성을 다하여 시부모를 모셨다. 어느 날 병상에 누워있던 시아버지가 꿩고기를 먹고 싶어 하여 하늘에 빌자, 얼마 후 꿩이 갑자기 날아들어 처마 밑으로 들어왔다. 이를 잡아 만든 꿩 요리를 시아버지께 올렸더니 병이 나았다고 한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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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해주인 정창석(鄭昌錫)이고, 아버지는 이시영(李時榮)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합천이씨는 남편 정창석이 병이 들어 죽었으나, 나이 서른에 가깝도록 자녀가 없는 것을 그다지 슬퍼하지 않았다. 또 관에 넣을 물건들을 손수 챙기고, 남편의 형에게 부촉하여 남편의 후사를 정하도록 하였다. 그런 다음 밤에 남편의 시신이 있는 방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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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부계리 화광마을에 있는 효자비. 제유해(諸維解)는 어머니 정씨가 생선가시가 목에 걸리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토해 내게 하였고, 돌아간 후에는 생선(도미) 요리를 절대 먹지 않았다고 한다. 이와 같은 행적이 알려져 나라로부터 포상을 받았고, 제유해의 아들이 이를 기념하게 위해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부계리 화광마을의 대로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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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남평문씨는 정조 때 남편 조경진(趙經鎭)이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자, 돌을 품고 강물로 투신하여 세상을 하직하였다. 이 일이 나라에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고, 훗날 사람들이 강씨부인의 열행을 기려 강 위의 돌에 열녀암이라고 새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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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진양강씨는 천성이 착하고 효성스러웠는데, 시집가서는 홀로된 시어머니를 부모를 섬기듯이 잘 모셨다. 남편 조용한이 병이 들자, 진양강씨는 자신이 대신 죽기를 하늘에 기원하며 남편을 간호했다. 남편이 위독한 지경에 이르러 가족들이 진양강씨를 찾기 시작하였는데, 기원하던 장소에서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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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진양하씨는 남편 조용화(趙鏞和)가 죽자 염하는 날에 자신도 따라 자진하였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되었고, 최익현(崔益鉉)[1833~1906]이 정려문을 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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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강양이씨는 18세 되던 때에 시집을 가게 되었는데, 도중에 남편 조윤(曺玧)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황급히 시댁에 도착하였으나, 남편은 이미 염한 뒤였다. 남편의 장례를 예로써 다한 뒤, 식음을 끊은 지 7일 만에 조용히 자진하였다. 이 일이 알려져 1832년(순조 32)에 정려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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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함안인 조인제(趙麟濟)이고, 아버지는 사인 하정식(河廷植)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진양하씨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순하고 효성스러웠는데, 10세 되던 해에 어머니를 잃자 매우 애통해 하였고, 아버지가 낙상을 하여 여러 달을 자리에 누워 있자, 밤낮으로 그 곁을 지키면서 정성껏 간병하였다. 15세 되던 해에 시집을 갔으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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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재령이씨는 결혼한 지 겨우 1년 만에 남편이 중병에 걸려 위독한 상황에 처하자, 정성을 다해 간병하였으나 힘이 미치지 못했다. 남편을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임신 중이었으므로, ‘천행으로 아들을 낳으면 대가 이어지는 것이지만, 만약 딸을 낳으면 남편의 뒤를 따라 갈 것이다’라 하였다. 해산하니 과연 딸이어서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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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평촌리 중도마을에 있는 전통가옥. 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평촌리 중도마을에 위치한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3칸의 겹집으로 정면에 둥근 기둥을 배치하고 나머지는 각이진 기둥을 사용하여 기둥을 세웠다. 내부에는 부엌 1칸, 안방 2칸, 마루 1칸, 건넌방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방과 건넌방에는 상부에 다락방을 설치하였고, 대창의 상부에는 소란반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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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검암리에 있는 운수당 하윤묘에 세워진 석상 2구. 이 2기의 석상은 조선시대의 문신인 하윤묘의 하단의 좌우에 자리 잡고 있다. 하윤[1452~1500]의 자는 수부, 호는 운수당으로 1414년 생원에 입격하였다. 아버지는 거제 현령을 역임한 하계지(河繼支)이고, 할아버지는 산음 현감을 역임한 하순(河淳)이다. 2기의 석상은 높이 2.3m의 거상으로, 분묘의 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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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대평면 대평리에 있는 조선시대 정자. 정훤(鄭暄)이 광해군의 폭정에 휩쓸리기 싫어 향리에 은거하며 여생을 보내기 위해 세웠다. 정훤은 1583년(선조 16)에 합천에서 출생하여 문장과 덕행으로 이름을 떨쳤다. 인조 때 조정에서 조봉대부(朝奉大夫), 영산현감(靈山縣監)으로 천거하였으나 고사하고 이곳에서 여생을 마쳤다. 경상남도 진주시 대평면 대평리 산 131번지에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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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에 있는 고려 초기의 서원.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계원리에 위치한다. 기문에 의하면 처음에 홍복사(洪福寺)로 건립되었으나, 1747년(영조 23) 홍지암(洪池庵)으로 개칭되었다. 홍지암 상량문에는 1891년(고종 28) 중수한 기록과 모원재(慕遠齋)로 개칭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부터 남양홍씨 문중에서 재실로 사용하였다. 1976년에 영남유림에서 이곳을 광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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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 대우마을에 있는 진양하씨 재실. 낙수암은 진양하씨 재실로 송정 하수일을 위해 세워졌다. 낙수암에는 진주 사곡리 진양하씨송정종택소장책판이라는 진양하씨 송정종택에서 보관하고 있는 4종의 책판 판목이 한 때 보존되어 왔던 곳이기도 하다. 이 책판들은 16세기 후반 남명학파의 면모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최근 진양하씨 후손들이 송정 하수일을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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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효자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효자리 447-1번지의 옛 절터에 위치한다. 2단의 기단 위에 세워진 3층 석탑이다. 기단부는 상하이중 기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하층 기단은 일부가 파묻혀 정확한 구조를 알 수 없다. 다만 중석에는 우주의 괴임이 있다. 상층 기단의 중석은 모두 4매의 판석으로 조성되었다. 중석에는 우주와 탱주 1주가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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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옥봉북동에 있는 진주향교를 이건한 사실을 기록한 사적비. 진주향교가 언제 세워졌는지 분명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987년(고려 성종 6)에 지금의 의곡사 계곡에 향학당의 모습으로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수학원(修學院), 학사(學舍), 서재(書齋), 사교당(四敎堂) 등 수차례의 중수 및 중건을 거듭하였는데, 1398년(태조 7)에 이르러 문묘(文廟)를 세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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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에 있는 진주성의 북문. 진주성은 고려 말까지는 토성이었으나,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석성으로 수축되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병사 김수와 이수일이 성을 증축하면서 내성과 외성으로 나뉘게 되었고, 광해군 때 남이홍이 성을 증축하면서 11개의 포루를 설치하게 되었다. 내성과 외성으로 나뉘어져 있던 진주성은 한일합방 이후 원형이 훼손되어 내외성의 구분이 사라졌으며,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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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성전암 대웅전에 봉안된 조선 중기의 불상. 진주 성전암 목조여래좌상의 배 안에서 복장유물이 발견되었는데, 그 기록에 따르면 1644년(인조 22)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목조로 제작된 높이 60㎝, 폭 43㎝의 작은 여래좌상이다. 머리 부분은 상투 모양의 육계와 중앙계주의 표현이 있으며, 작은 입을 꼭 다문 모습으로 고개를 약간 앞으로 숙인 모습이다. 옷자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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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장흥리 소재의 사제문이 새겨 있는 비석. 사제문(賜祭文)이란 임금이 죽은 신하에게 제사를 지내주며 함께 내린 글을 말한다. 진주 장흥리 숙종사제문비는 1718년(숙종 44) 숙종이 지족당 조지서를 배향한 신당서원에 예조좌랑 이안국을 보내 치제하게 한 사제문을 새긴 비석이다. 진주에서 합천으로 가는 길에 집현면 장흥리를 지나는 도로에서 약 30미터 떨어져 있는 보호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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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어머니가 병이 들자 지극 정성으로 간병하였다. 병든 어머니의 몸을 씻기고, 어머니의 쾌유를 위해 정성을 다해 하늘에 빌었다. 끝내 어머니가 돌아가자 크게 애통해 하였고, 예를 다해 장사를 지냈으며, 여묘에서 미음을 먹는 등 정성을 다했다. 진주 설매리(雪梅里)에 살았으며,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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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열녀. 노비인 채학의 아내였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따르면 1597년 정유재란 중에 절개를 지키다 죽었고, 인조 대에 이 일이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다. 진주 영선리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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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천사국(千思國)이고, 아버지는 전성덕(全成德)이다. 현모양처의 기품이 남달라 시부모와 남편을 잘 공경하고 모셨다. 시아버지의 성격이 엄하였으나 이를 잘 받들어 효성으로 모셨고, 병이 들어 위독한 지경에 처하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성껏 간호했다. 시어머니 상을 당하였을 때는 매우 애통해 했다. 이와 같은 경산전씨의 열행은 마을에 알려져 주위 사람들이 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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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부. 남편은 천사택(千思澤)이고, 아버지는 박헌형(朴憲衡)이다. 진주 설매에 살았다. 시집가기 전부터 현모양처의 기품이 배어있었는데, 19세 되던 때에 천사택(千思澤)에게 시집가서 시부모를 정성껏 봉양하고 남편에게 순종하였다. 시어머니가 병이 들어 수개월간 회복하지 못하자 산과 하늘에 시어머니의 쾌차를 비는 제사를 올리는 등 극진히 간호하였다. 그러나, 결국 시어머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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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 내의 촉석루에 걸린 현판의 시. 현재 촉석루에는 현판에 새겨진 9편의 시가 걸려 있다. 하륜이 지은 「촉석루기」에는 훌륭한 시영(詩詠)으로 면재 정을보, 우곡 정이오, 상헌 안진[?~1360], 경은 설장수[1341~1399], 급암 민사평[1295~1359], 이재 허선생(누구인지 불명) 등 여섯 명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는데, 이 중에서 정을보와 정이오의 시가 촉석루에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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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열녀. 남편은 최동태(崔東泰)이고, 아버지는 이승효(李承斅)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벽진이씨는 성품이 효성스러워 남편과 시부모를 정성껏 봉양하였다. 남편이 중한 병에 걸리자 자신의 손을 베어 그 피를 먹게 했지만 결국 죽고 말았다. 이에 자결하고자 했으나 주위에서 말리는 이가 많아 손수 상복을 만들어 유감됨이 없게 하였다. 후에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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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진양하씨는 집안의 시어머니와 맏며느리의 상이 함께 있자 시아버지의 명령대로 살림을 맡고 모든 조카들을 자식처럼 길렀다. 그러다가 남편 최상린(崔祥鱗)이 세상을 떠나자 마음속으로 따라 죽을 것을 맹세하면서도, 밖으로는 슬퍼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가족들이 진양하씨의 범상치 않은 기색을 눈치 채고 항상 살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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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진양정씨는 남편 최태재가 세상을 떠나자 집안 식구에게 말하기를 “여자가 순종해야 할 세 가지 길이 있는데, 나는 자식이 없으니 남편을 따라서 죽는 것이 옳다. 내가 죽거든 남편과 같이 장사지내 달라.” 하고 목을 매어 죽었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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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 및 승려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세운 건축물. 탑은 산스크리트어(범어)로 스투파(stupa), 또는 팔리어로 투파(thupa)라고 하는데 이를 한역으로 번역하여 탑파라고도 한다. 탑의 기원은 인도에서부터 시작되며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인도의 스투파는 산치대탑에서 알 수 있듯이 복발형의 스투파로, 이후 중국에 전해지면서 여러 층을 겹쳐 쌓아 올라가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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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자는 의원(儀元). 원정공(元正公) 하즙(河楫)의 후손이다. 부모님을 지극 정성으로 모셨는데, 항시 시탕(侍湯)에 곁을 떠나지 아니했으며, 부모가 위독할 지경에 처했을 때는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마시게 하여 목숨을 아홉 달이나 연장시켰다. 사후에는 시묘(侍墓)를 삼년 동안이나 계속하였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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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진양. 자는 추약(追若), 호는 옥봉(玉峯). 송강(松岡) 하항(河恒)의 후손이다. 부인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녀조(烈女條)」에 보이는 박인호(朴寅浩)의 딸 밀양박씨이다. 평생 독서하기를 즐겼다. 면우 곽종석(郭鍾錫)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회봉(晦峯) 하겸진(河謙鎭)과 우애가 돈독하여 함께 만수당(晩修堂)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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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진양인 하계락(河啓洛)이고, 아버지는 사인 박인호(朴仁浩)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밀양박씨는 천성이 순하고 효성스러워 시부모를 잘 모시고 남편을 공경하는 등 예의규범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특히 계시모를 섬기는 데에 정성을 다하니 향리에서 모두 그 효행에 감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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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하계석(河啓錫)이고, 아버지는 이호주(李浩柱)이다. 합천이씨는 남편이 일찍이 습진에 걸려 고생하였는데 효험 있는 약이 없었다. 어느 날 미꾸라지가 좋다는 얘기를 듣고 시험해보는 것이 좋겠다고 여겨 날마다 대소쿠리를 가지고 사방으로 다니면서 미꾸라지를 잡으러 다녔다. 추운 겨울철에도 미꾸라지를 잡아 시탕해 올렸으나 남편은 차도가 없었다. 하늘에 치성을 드려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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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진양. 호는 태촌(台村). 대사간(大司諫) 하결(河潔)의 후손이다. 성품이 강건하고 청고하여 스스로 수양에 힘썼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학문을 사숙하였으며 임진왜란 뒤에 향교를 증수하고 덕천서원을 수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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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해주정씨는 성품이 단정하고 규범이 있었는데, 남편 하규원(河珪源)이 세상을 떠나자 매우 애통해하였다. 예를 다하여 남편의 장례를 치렀고, 시부모를 더욱 정성껏 모셨으며 집안 살림에도 정성을 쏟았다. 또한 “재물이 없으면 지아비의 제사를 받들 수가 없을 것이다.” 라고 하고 첫 기일을 맞아 남편의 묘를 찾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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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일반성면 가선리 선동마을에 있는 청주한씨의 정자. 『진주누정지』에 의하면 1919년에 처음으로 건립되었다고 한다. 그 외의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경상남도 진주시 일반성면 가선리 선동마을 입구의 도로변에 위치한다. 외삼문 1동, 재실 1동으로 구성되어 있고 주변에는 흙과 돌을 섞어 만든 담을 둘렀다. 외삼문은 목조구조를 기본으로 하며 벽체는 적색 벽돌로 마감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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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호여(浩汝)이다. 1837년(헌종 3)에 문과 병과에 올랐다. 이후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를 역임하였고, 1849년에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지냈다. 가훈을 잘 이어받아 부귀영화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4「문과조(文科條)」와 『증보 진양속지(晋陽續誌)』에 관련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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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선비. 자는 시서(時瑞), 호는 연정재(煙艇齋). 쌍부헌(雙負軒) 하진룡(河震龍)의 후예이다.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1728~1807]의 문인으로 재기(才氣)가 뛰어났다. 과거 공부에는 뜻을 두지 않고 초야에 묻혀 학문에 전념하였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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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진주강씨는 성품이 효성스러워 시부모를 정성껏 모셨다. 남편상을 당하자 염습과 제수 마련을 손수하여 소홀함이 없게 하고 예로서 장례를 지냈다. 남편 사후에도 시부모 섬기기를 평소와 같이 하다가 어느 정도 집안일이 안정된 후 자진하여 남편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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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사곡마을에 있는 하세희(河世熙)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하세희는 부모가 병이 들자 부모의 대변을 직접 맛보고,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먹게 하는 등 정성을 다해 간호하였고, 상을 당하자 3년 동안 빈소를 지켜 호랑이도 그 효행에 감동했다는 내용을 기록한 비이다.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사곡마을 입구에 위치한다.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높이 112㎝, 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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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선비. 자는 습여(習汝), 호는 신묵재(愼黙齋). 영무성(寧無成) 하응도(河應圖)의 후손이다.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행의가 독실하고 부모에게 효행을 다하고, 동료들과의 우애가 깊었다. 상을 행함에 예의에 어긋남이 없어 향당이 모두 칭송하였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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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유학자. 본관은 진양. 자는 여해(汝海), 호는 관료(寬寮). 현재(顯齋) 하경현(河景賢)의 현손이다. 영민하고 학업에 자질을 보였다. 삼종숙인 조선 말기의 유학자 회봉(晦峯) 하겸진(河兼鎭)의 문하에서 학업을 받고, 면우 곽종석(郭鍾錫)의 문하에서도 수학했다. 문집으로 관료선생문집(寬寮先生文集)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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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따르면 하옥동은 향리(鄕吏)로, 성품이 본래 정성스럽고 부모를 정성을 다해 모시는 등 효성이 남달랐다. 부모가 돌아간 뒤에는 기름진 음식을 피하고 결국 생을 마쳤다고 한다. 진주 주내(州內)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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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하용도(河用渡)이고, 아버지는 최영순(崔永淳)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전주최씨는 심성이 효성스러워 시부모를 정성껏 모셨다. 남편이 중한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자, 최씨는 살아서 의지할 데가 없음을 애통히 여겨 바로 남편 뒤를 따라 하직하려 했으나, 스스로 이르기를 “자식이 없는 상인데 내가 어찌 예를 다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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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밀양박씨는 효성이 지극하여 7, 8세의 어린 나이에도 홀로된 어머니를 잘 모셨다. 17세 되던 해 결혼을 하였으나 얼마 안 되어 남편이 요절했다. 남편의 장례 후, 한결같은 예로써 3년 상을 행하였다. 시부모가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밀양박씨를 가엾게 여겨 다시 시집보낼 생각을 하니, 이를 눈치 챈 밀양박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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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우의 처 해평윤씨 친정 남매들의 화회문기. 하윤우(河潤宇)[1647~1707]는 창주(滄洲) 하증(河憎)[1563~1624]의 증손이며, 부인 해평윤씨는 영의정 윤방(尹昉)의 현손녀이다. 하윤우의 처 해평윤씨의 친정 남매들의 화회문기로, 해평윤씨의 아버지 윤세규의 사후 그 자녀들이 화회 분집할 때 작성한 것이다. 종이에 묵으로 쓴 문서이다. 크기는 55.2㎝×122.5㎝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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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하윤우가 자녀에게 재산을 분급하기 위해 작성한 금급문기. 하윤우(河潤宇)는 슬하에 3남(하응운(河應運), 하응일(河應一), 하응휴(河應休)) 2녀(첫째사위 정상길(鄭相吉), 둘째사위 강공일(姜公一))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몫에 따라 재산을 분급하기 위해 작성했다. 종이에 묵으로 쓴 문서이다. 크기는 44㎝×275㎝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을유(1645) 4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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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하응운(河應運)이 장자 하재악(河載岳)에게 한 유언을 적은 문서. 하응운 유언은 1월 23일 작성되었는데, 이로부터 5일이 지난 28일에 향년 71세의 나이로 하응운은 생을 마감하였다. 이 문서에 따르면 하응운에게는 부실과 서자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들 재산에 대한 처리와 당부가 주된 내용을 이룬다. 또한 치상 시에는 모나 방사 등을 사용하지 말고, 마나 면, 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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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금곡면 검암리 오도실에 있는 하재원(河載源)의 효행을 기리는 비. 홀어머니가 병이 들자 그 곁을 떠나지 않고 정성으로 간호한 진사 하재원(河載源)[1812~1881]의 효행을 기념하여 세워졌다. 하재원은 운수당 하윤의 후손이다. 경상남도 진주시 금곡면 검암리 오도실마을의 하씨재각 앞에 위치한다. 주위에는 하재원의 묘비(1913)도 세워져 있는데, 송사(松沙) 기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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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개항기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해주정씨는 어려서부터 효행스러웠는데, 시집가서는 시부모를 정성껏 봉양하였다. 남편 하정원(河正源)이 병에 걸려 위독한 지경에 처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먹게 하여 회생시켰으나, 며칠 뒤 결국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해주정씨는 장례를 끝내고 나서 시아버지와 친정아버지에게 고하고 조용히 자진하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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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주. 자는 청백(淸伯), 호는 초정(草亭). 태계(台溪) 하진(河溍)[1597~1658]의 계제(季弟)이다.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을 따라 학문에 정진하였는데, 그 재주가 일찍부터 뛰어나 장래가 촉망되었다. 그러나 명나라가 망하자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고, 두 형과 더불어 은거하면서 생을 보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인물조(人物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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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하찬[하진태] 남매가 부모 사후에 합의하여 재산을 나누는 화회문서. 하찬(河鑽)[1737~1800]은 하재악(河載岳)[1695~1742]의 장남이나 순서상으로는 1남5녀 중 막내였다. 분재가 이루어진 10월 28일은 하찬이 혼례를 올리고 신행을 끝낸 직후인데, 분재기 서문에 따르면, 다른 남매들은 상제례 등 여러 사정으로 인해 참여하지 못하고 셋째 사위 한용만 참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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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성품이 온순하고 효성스러워 부모님을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아버지가 병이 들자 목욕재계하고 아버지의 쾌차를 하늘에 빌었으나 결국 아버지가 돌아가자 크게 애통해 하고, 예를 다해 장사를 지내니 주위 사람들이 크게 칭찬하였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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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벼슬이 사직(司直)에 이르렀는데, 90세가 된 아버지가 중한 병이 들자 대변을 맛보고, 종기를 입으로 빠는 등 지극 정성으로 간병하였다. 아버지의 사후에는 6년 동안 상을 하였다. 『진양지』권3「인물조」에 이름이 올라 있다. 또한 하현부의 기사는 『동국여지승람』「진주목」효자조와 대동운부군옥에도 보이는데 진양하씨로서 효행이 지극한 선비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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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열녀. 칠원윤씨는 남편 한석건이 세상을 떠나자 매우 슬퍼한 나머지 곧 그 뒤를 따라 죽었다. 영조 때 이 일이 알려져 정려되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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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열녀.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따르면 한씨는 정조가 있어 평소에 말하기를 ‘여자로서 불행히 변을 만난다면 죽을 따름이다’라고 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위험에 처하자 정절을 지키다가 죽었다. 선조 대에 이 일이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다. 진주 정수리(丁樹里)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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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남편 한진권이 병이 들어 위독한 상황에 처하자 하늘에 빌고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먹게 하는 등 정성을 다해 간병하였으나 남편이 결국 죽고 말았다. 예로서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남편의 영정을 거두고 난 후에는 즉시 방으로 들어가 약을 마시고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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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진양강씨는 남편 한진영이 병이 들어 위독한 상황에 처하자 지극 정성으로 간호하였으나 남편은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얼마 후 진양강씨가 딸을 낳았으나 성장하지 못하고 생을 마치니, 진양강씨는 남편의 묘로 가서 이를 아뢰고, 곧 돌을 안고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남편 한진영은 한진권의 쌍둥이 아우였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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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김해인 허정(許禎)이고, 아버지는 사인 하경춘(河慶春)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진양하씨는 17세 되던 해에 시집가서 시부모를 정성껏 봉양하였는데, 남편이 중한 병에 걸리자, 유명한 의원을 찾아다니고 아침저녁으로 남편 간호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남편이 위독한 지경에 처하자 자신의 두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먹여 간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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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호국사 내에 있는 주련. 호국사 주련은 7언 6행으로 된 한시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흰 옷으로 관세음보살, 아무 말씀 없으시니 남으로 떠도는 동자는 듣지도 못했네. 병풍엔 푸른 버들 삼복더위 여름인데 바위 앞 푸른 대는 이제야 봄이라. 천상천하에서 부처같은 이 없으니 시방세계 또한 비할 곳 없네. 白衣觀音無說說 南巡童子不聞聞 甁上綠楊三際夏 嵒前翠竹十方春 天上天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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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전주이씨는 어려서부터 천성이 착했는데, 17세가 되던 해 남편 홍경섭이 병으로 세상을 하직하게 되었다. 혼자 남은 전주이씨는 아들을 따라 죽으려는 시어머니를 말리면서 “지어미가 지아비를 따라 죽는 것은 의로운 일이지만, 어찌 어머니가 아들을 따라서 죽는 이치가 있겠습니까.”하고 슬픔에 잠긴 시어머니를 위로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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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열행조(烈行條)」에 의하면, 나주임씨는 남편 홍차수가 중한 병에 걸려 위독한 상황에 처하자 지극 정성으로 간호하고, 남편의 쾌차를 하늘에 비는 등 정성을 다하였으나 마침내 죽고 말았다. 남편의 뒤를 따라 갈 것을 결심한 나주임씨는 이 일을 시어머니께 고하고 세 명의 동서에게 자신의 두 아들을 부탁한 다음, 밝은 새벽에 침실에 들어가서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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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 천곡리 대흥마을에 있는 정려. 회산구씨(檜山具氏)는 능성(綾城)의 승지 구연회(具然會)의 딸로 경주김씨 김병규(金炳規)에게 시집간 후, 남편이 중병에 걸리자 지극정성으로 간호하여 건강을 되찾게 하였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1875년(고종 12)에 정려가 내려졌다. 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 천곡리 대흥마을의 입구 도로변에 위치한다. 비의 제목은 「열녀김상흘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