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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자는 길재(吉哉), 호는 남호(南湖). 공대공(恭戴公) 정척(鄭陟)의 후손이다. 나면서부터 총명하여 얼굴이 곱고 기상이 맑으며 경전(經傳)을 널리 연구하고 겉으로 백가(百家)에 통달하였다. 종일토록 책상을 대하고 사색에 잠겼으며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효심이 지극하여 어머니가 병에 걸리어 낫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니 관대(冠帶)를 벗지 않고 단을 모아 하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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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문인.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은철(殷喆), 호는 퇴암(退庵). 진사(進士) 정광룡(鄭光龍)의 아들이다. 진주 용암에 살았다. 『증보 진양속지(增補 晋陽續誌)』에 "어버이를 섬김에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아버지가 일찍이 들로 가다가 고인(雇人)이 피를 뽑는 것을 보고 돌아와서 정계교에 말하기를 "고인이 벼를 뽑고 있었다"고 하므로 정계교가 "벼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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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열녀. 첨지(僉知) 정계원(鄭繼元)의 아내이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 에 의하면, 1597년 정유재란 당시 항절하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그가 피란했을 때에 그의 남편에게 말하기를 "적을 만나 정절을 잃게 되면 나는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라 하여 죽음으로서 정절을 지킨다는 뜻을 평소에 정했던 것이다. 진주 정촌(鼎村)에 살았다. 선조 때 항절이 알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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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자는 백유(伯裕). 참봉 정석찬(鄭碩贊)의 아들이다. 진주 상사리에 살았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의하면,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봉양함에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정엄(鄭嚴), 정교(鄭敎) 두 아우가 모두 명성을 얻어 이름이 났으나 과거는 여러 번 실패하여 합격하지 못하였다. 봉화훈도(奉化訓導)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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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대현(大見), 호는 석동(石桐)이다. 1882년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자품(資稟)이 준정(峻整)하고 기우(器宇)가 헌앙(軒昻)하며 풍채가 사람에게 선학(仙鶴)과 같이 비추고 문학이 일찍부터 뛰어났다. 만년에는 강좌를 용암(龍岩)의 장덕재(章德齋)에 설치하니 원근에서 찾아와서 배우는 자가 매우 많았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4「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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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치경(致敬), 호는 기재(跂齋)이다. 아버지는 정인현(鄭麟賢)이다. 진주 용암 출신으로 『증보 진양속지(增補 晋陽續誌)』에 의하면, 효우(孝友)스럽고 염직(廉直)하여 영리(榮利)를 구하지 아니하고 착한 일을 즐기고 베풀기를 좋아하였다고 한다. 병정(丙丁:병자·정축년, 1876~1877년)의 흉년에 베풀기를 좋아하는 기재(跂齋)의 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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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석초(錫初)이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에 그의 손자 정열(鄭悅)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적을 치다가 1593년 진주성이 함락될 때 전사하였다. 정열도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몸을 쏜살같이 떨치며 돌전(突戰)하다가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정광윤은 판관(判官)을 증직(贈職), 부장(部將)을 추증받았으며 선무원종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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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해주. 자는 원경(遠卿), 호는 묵재(黙齋). 동호(東湖) 정상첨(鄭相詹)의 손자이며 정학신(鄭學臣)의 아들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의하면, 정광의는 1768년 생원(生員)에 합격하고 반천(泮薦: 성균관의 추천)으로 경릉참봉(敬陵參奉)에 임명되었다. 일찍부터 배우는 데 힘쓰고 뜻을 가다듬으며 각고(刻苦)하여 문행과 덕망이 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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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영일. 자는 술원(述遠). 학포(學圃) 정훤(鄭喧)의 후손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의하면, 정광익은 덕목이 높고 입지가 확고하였다. 번암(樊菴) 채제공(蔡濟恭)[1720~1799]의 문하에 있었는데 원릉(元陵)의 문제로 여론이 일변하였을 때에도 성품대로 스스로를 지켜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가는 집에 걸어놓은 편액을 수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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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해주. 자는 긍세(肯世), 호는 노정헌(露頂軒).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의 증손이다. 착한 일을 즐거워하고 의로운 것을 좋아하였으며 문장과 필법이 뛰어나 세상에 추앙되고 존중되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노정헌유고』 1책이 간행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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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선비. 자는 사관(士觀), 호는 함인재(含忍齋). 모렴재(慕㾾齋) 정도동(鄭道東)의 손자다. 송성담(宋性潭)에게 사사(師事)하여 문학과 덕행으로 사우(士友)들에게 추중(推重)되었다. 경호(鏡湖) 이의조(李宜朝)와 교유하고 이의조가 엮은 『가례증해(家禮增解)』를 참정(參訂)하였다. 사후 도내의 선비들이 사당을 세우기를 의논하였으나 이루지 못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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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진양. 자는 성약(聖若). 우곡(隅谷) 정온(鄭溫)의 후손이다. 집이 가난하였으나 학문을 좋아하였고 어버이를 섬김에 그 성효(誠孝)를 다하였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의하면, 정규로는 나이 겨우 17세에 어머니가 병에 걸리자 손가락을 끊어 잠시 회생시켰다. 겨우 5일이 지나고서 아버지가 또 갑자기 병들어 양우(兩憂: 부상과 모상)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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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한학자.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성칠(聖七), 호는 성재(誠齋). 정도역(貞度易)의 후손이다. 『증보 진양속지(增補 晋陽續誌)』에 의하면, 초학은 정재(正齋) 김종우에게 받았고 의문이 있으면 간재(艮齋) 전우(田遇),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에게 서신으로 질의하며 깨우쳤다. 만년에는 단계(丹溪)에 옮겨가 살면서 매서 김극영, 금호 박희방, 능재 권의현, 과제 이교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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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미보(美甫), 호는 죽와(竹窩). 충의공(忠毅公) 정문부(鄭文孚)의 후손이다. 진주 용암리 출신이다. 문학과 행의(行誼)로 이름이 높았다. 1788년(정조 12)에 소(疏)를 올려 충의공 정문부의 부조(不祧: 국가에서 제사지내는 사당)의 은전을 청하여 임금의 윤허(允許)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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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연일. 자는 자첨(子瞻), 호는 율리(栗里).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후예다. 겸재 하홍도(河弘度)[1593~1666]의 동중자제(洞中子弟)이기 때문에 젊어서부터 그 문하에서 배웠다. 하홍도가 임금에게 사은소(謝恩疏)를 올릴 때에 소를 받들고 입성(入城)하여 드디어 침낭(寢郞)에 제수되는 특전을 입었다. 그는 생각하기를 “소를 가지고서 피선(被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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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진양. 자는 여신(汝信). 효자 정경량(鄭慶良)의 손자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여러 번 기공(奇功)을 세웠다. 벼슬이 부사직(副司直)에 이르렀으며, 선무원종 2등의 공훈을 기록하였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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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국교(國喬), 호는 지와(芝窩).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의 후예이며, 정신(鄭愼)의 아들이다. 진주 금산리 출신이다. 고모부인 유하(柳下) 강태중에게 학문을 배웠고, 이후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에게 집지하여 준재라고 칭찬을 받았다. 문사(文詞)를 지음에 기이하나 정기가 있고, 매우 건전하였다.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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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 자는 성익(聖翼), 호는 학주(鶴洲).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의 후손이다. 진주 가곡 출신이다. 1890년(고종 27)에 문과에 올라 승지(承旨)가 되었다. 『증보 진양속지(增補 晋陽續誌)』에 의하면, 풍채가 수미(秀美)하고 문학이 넉넉하고 풍족하여 향당(鄕黨)에서 이를 칭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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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장기(長鬐). 자는 중상(仲祥). 일찍부터 문명이 있었으나 과거에는 합격하지 못하였다. 남을 대접함에 있어서는 정성으로써 하였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공평하게 하였다. 강심(姜深), 신점(申霑)과 더불어 요역(徭役)시행을 시정하자 고을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며 진양(晋陽)의 삼로(三老)라고 일렀다. 『진양지(晋陽誌)』권3「인물조(人物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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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효자. 고려 때 사정(司正)을 지냈다. 묘를 대동(大同)에서 지키며 3년 동안 한 번도 집에 가지 않았다.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려(旌閭)되었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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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선비.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자겸(子謙), 호는 용강(龍岡).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정신(鄭愼)의 아들이다. 1589년(선조 22)에 생원(生員)에 합격하였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의하면, 중형 충의공(忠毅公)이 화를 당함에 이르러 두 조카를 이끌고 남쪽으로 오다가 겸재(謙齋) 하홍도를 만나 진주에서 살게 되었다. 뜻을 고상(高尙)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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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숙성(叔成). 호는 삼계(三溪). 훈도 정관(鄭寬)의 아우이다. 『진양지(晋陽誌)』권3「인물조(人物條)」 에 의하면, 1543년(중종 38)에 진사가 되고, 1558년(명종 13)에 문과에 올랐다. 천성이 정성스럽고 고졸하여 벼슬에 나아가서는 청렴하여 관원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따랐고, 백성들은 공경하였다. 세 고을에 부임하였으나 추워도 앉을 방석이 없을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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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해주. 자는 화백(華伯). 정유기(鄭有祺)의 증손이고, 농포 정문부(鄭文孚)의 후손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의하면, 천성이 곧고 행실이 고결(高潔)하였다. 아우 정규(鄭珪), 정목(鄭睦)과 더불어 어버이를 섬김에 지성을 다하였다. 거상에는 여묘(廬墓)로 제(制)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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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해주. 자는 중의(仲儀), 호는 동오(桐塢). 용강(龍岡) 정문익(鄭文益)의 후손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의하면, 품성이 순결(純潔)하고 의표(儀表)가 단정하고 장엄하였으며 남을 대접할 때는 반드시 정성을 다해 대하였고, 일을 처리하는 데는 휴진(畦畛:일정한 법식)을 베풀지 아니하였다. 더욱이 효우(孝友)에 돈독하니 고을과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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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양. 자는 자유(子), 호는 애일당(愛日堂). 할아버지는 정신중(鄭臣重)이고, 문정공(文定公) 정이오(鄭以吾)의 아들이다. 문음(門蔭)으로 벼슬에 나가 경승부승(敬丞府丞)에 이르렀고, 1416년(태종 16)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이조좌랑·승문원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422(세종 4)년부터 1438년까지 사간원헌납, 함길도경차관, 승정원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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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해주. 자는 극명(克明), 호는 무호옹(無號翁).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의 후예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의하면, 어버이를 섬김에 효성스럽고 형을 받드는 데에는 우애로웠다. 정빈의의 형이 안주(安州)의 임소(任所)에 있을 때에 갑자기 풍비증(豊痺症) 때문에 여러 달 동안 고통이 심했다. 정빈의가 산에 올라가서 백일 동안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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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운경(雲卿), 호는 호음(湖陰)이다. 부사 정광보(鄭光輔)의 아들이며,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조카이다. 1507년(중종 2)에 진사가 되고, 1509년(중종 4)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1514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고, 1516년 황해도도사로서 문과중시에 장원하였으며 사간을 거쳐 1523년 부제학이 되었다. 1534년 동지사(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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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해주. 자는 성옥(聖玉), 호는 명일(明逸). 명암(明菴) 정식(鄭栻)의 증손이며, 후산 허유의 외조부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의하면, 성품이 관대하고 그 뜻이 청고(淸高)하였다.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고 자양서(紫陽書: 朱子의 書) 읽기를 좋아하여 행실을 삼가니 세상에서는 명옹(明翁)에 초손(肖孫)이라 일컬었다. 감사의 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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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열녀. 유학 정삼성(鄭三省)의 처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모녀(母女)가 함께 절개를 지키다가 죽었다. 진주 영이곡(永耳谷)에 살았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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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해주. 자는 길보(吉甫), 호는 동주(東洲). 아버지는 진사(進士) 정즙(鄭楫)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의하면,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1641~1721]의 문하에 종유하였고, 효우(孝友)와 학행으로 이름을 당세에 드러내었으며, 창사 손명래 등과 친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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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본관은 진양. 자는 복여(福如), 호는 운파(雲坡). 우곡(隅谷) 정온(鄭溫)의 후손이다. 『증보 진양속지(增補 晋陽續誌)』에 의하면, 천성이 영민(穎敏)하고 재예(才藝)가 남들보다 출중하였다. 김단계(金端磎), 박만성(朴晩醒)을 따라 학문을 연마하였다. 고려 말 문신이었던 정온이 태조의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고향으로 내려와 지은 우곡정(隅谷亭)[경상남도 진주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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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해주. 자는 중여(仲與), 호는 불우헌(不憂軒).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의 후손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의하면, 아버지를 섬김에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과거에는 뜻을 버리고 선조의 교훈을 지키면서 임천(林泉)에 소요하며 거문고와 책을 벗 삼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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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해주. 자는 여량(汝良), 호는 동호(東湖). 임강정(臨江亭) 정환(鄭桓)의 아들이다. 1680년(숙종 6) 태어났다. 1721년(경종 1)과 이듬해에 걸쳐 일어난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김범갑(金范甲)에게 피격당하고 과거시험을 포기하였다가 영조가 즉위하자 1725년(영조 1)에 진사에 입격하였다. 이후 성균관에 출입하면서 명분과 예절을 스스로 가다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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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해주. 자는 직경(直卿), 호는 숙매(熟寐).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의 후손으로 정상점(鄭相點)의 아들이다. 가훈을 계승하여 경전(經傳) 공부에 진력하였고 가정을 힘써 닦았다. 날마다 형제, 조카들을 함께 모아서 경전을 강의하고 토론하며 서로 공부를 도왔다. 진주 용암리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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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해주. 자는 후지(厚之), 호는 역효당(亦囂堂). 정대륭의 후손이며 정상점의 아들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의하면, 이학(理學)에 잠심(潛心)하여 세상에서 명유(名儒)라 일컬었으며, 효행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되고 정려(旌閭)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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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형중(亨重), 호는 황계(篁溪). 용모가 수려하고 예의를 잘 지켰으며, 성재(性齋) 허전(許傳)에게 사사(師事)하였다. 1891년(고종 28)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에 이르렀으며, 시랑 한기동(韓耆東)과 함께 좋은 친구로 사귀었다. 1894년 갑오개혁 후 단발령이 내려지자 낙향하여 사람들과의 교류를 끊고 생을 마쳤다. 『진양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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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무신. 사과(司果) 정형손(鄭亨孫)의 아들이며, 정항(鄭沆)의 아버지다. 생몰년은 미상이며, 진주 대여촌(代如村)에 살았다. 활쏘기를 비롯한 무술에 뛰어났고 명장의 풍모가 있었다. 1489년(성종 20)에 무과에 합격한 후 함경도 군관을 거쳐 우도수사(右道水使)에 올랐다. 1509년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시묘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이듬해 삼포왜란이 일어나 웅천(熊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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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열녀. 진주 금산리에 살았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남편 정응발(鄭應發)이 왜적을 만나 대항하다가 힘이 다하여 거의 죽게 되었는데 황씨가 풀숲 속에서 나와서 돌을 안고 돌진하여 남편을 구하였다고 한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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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효자. 진주 대평에 살았다. 모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죽만 먹고 지냈으며 제사를 모실 때는 예로써 하였다. 또 명종 승하 시 3년 동안 상복을 입었다. 『진양지(晋陽誌)』 권3 「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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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선비. 본관은 진양. 자는 신화(愼和), 호는 모헌(慕軒). 은렬공(殷烈公) 정신령(鄭臣嶺)의 후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인물조(人物條)」에 이름이 올라 있다. 성품이 본래부터 효우(孝友)스러웠고 심학(心學)에 전념하였다. 이광악(李光岳)의 문하에 있으면서 정온(鄭蘊), 허목(許穆), 하홍도(河弘度) 제현으로 더불어 도의를 서로 연마하였다. 청계사((淸溪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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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수가(粹可), 호는 교은(郊隱)·우곡(愚谷). 찬성사 정신중(鄭臣重)의 아들이다.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급제하여, 1376년(우왕 2) 예문관검열이 된 뒤, 삼사도사, 공조·예조의 정랑, 전교부령(典校副令) 등을 역임하였다. 1394년(태조 3) 지선주사(知善州事)가 되었고, 1398년 봉상시소경(奉常寺少卿)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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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선비. 본관은 진주. 자는 인백(仁伯), 호는 구암(龜岩)이다. 진사 정기(鄭起)의 아들이다. 성품이 온순하고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약관의 나이로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하에 취학하였다. 조식이 훈계하여 이르기를 "몸을 사랑하기를 옥과 같이 하고 마음을 가지기를 물과 같이하며 병 때문에 스스로 게을리하지 말라"고 하였다. 어버이를 섬김에 효성을 다하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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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현감을 지낸 생원(生員) 정세창(鄭世昌)의 아들이다. 진주 진성리에 살았다. 나이가 들어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슬픔에 몸이 상할 정도였으며, 죽만 먹어 겨우 연명하였다. 아우인 만호(萬戶) 정순평(鄭順平)도 역시 죽으로 연명하다가 상중에 죽었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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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양(晋陽). 영조 대 무신란(戊申亂)에서의 공으로 분무원종공신(奮武原從功臣)에 기록되고 가선동지중추부사(嘉善同知中樞府事)를 추증 받았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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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진주 성태동(省台洞)에 살았다. 그 어머니와 함께 밤중에 방아를 찧던 중 어머니가 범에게 물려가게 되자 절구공이를 가지고 급히 쫓아가서 위험에 처한 어머니를 구했다고 한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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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선비. 호는 동호(東湖). 남계(南溪) 정승윤(鄭承尹)의 아들이다. 1606년(선조 39)에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가학(家學)을 이어받아 학문과 실천이 독실하였다. 조겸(趙㻩)이 지은 만시(挽詩)에 “덕망은 삼대에 연하였고 문장은 일향(一鄕)에 으뜸이었네.”라고 하였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인물조(人物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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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진양. 공대공(恭戴公) 정척(鄭陟)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정경량(鄭慶良)이다. 1592년에 아우 정명극(鄭明極)과 함께 의병을 불러 일으켜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달려가니 아버지 정경량(鄭慶良)이 훈계하여 이르기를 "너희들은 나는 염려하지 말고 난을 이기어 공을 세워 너 아비의 여망에 부응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아우 정명극은 차원(車院)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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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자는 심원(深源). 석정(石亭) 정홍조(鄭弘祚)의 아들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의하면, 천성이 온순하고 행실이 정직하였다. 아우 정렴(鄭濂)과 더불어 박황암(朴篁岩)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문의 요점을 얻었다. 저술한 유문이 불에 타서 소실되니 다 잃으니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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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계통(季通), 호는 사무재(四無齋)·수헌(睡軒)·천휴노인(天休老人). 봉강(鳳岡) 정유정(鄭有禎)의 아들이다. 1665년에 진사(進士)에 입격하였다. 학행이 깊고 신실하여 칭송이 높았다. 외재(畏齋) 이단하(李端夏)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사무재시고(四無齋詩稿)』 1책이 간행되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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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선비. 자는 옥여(玉汝). 호는 은와(隱窩). 석정(石亭) 정홍조(鄭弘祚)의 후손이다. 도량이 넓고 품성이 온후하였다. 9세에 부친상을 만났는데 장례를 행함이 한결같아, 성인과 같이 법도에 따랐고 처세에 모범이 되었다. 경림서원(慶林書院)[경상남도 진주]과 종천서원(宗川書院)[경상남도 진주] 등 두 서원의 원장이 되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유행조(儒行條)」에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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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선비. 자는 명숙(明叔), 호는 삼모재(三慕齋). 학포(學圃) 정훤(鄭暄)의 후손이다. 생몰년은 미상. 영조 재위(1725~1777) 전후에 활동하였다.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외모가 단정하고 일찍이 학문에 눈을 떠 당시의 학자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에게서 수학했다. 윤봉구가 찬한 「천명인심도(天命人心圖)」를 보고 크게 감화받았으며,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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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양. 자는 명지(明之), 호는 정암(整菴)·창재(暢齋). 아버지는 증호조판서 정설(鄭舌)이며, 어머니는 진주강씨(晋州姜氏)로 산원(散員) 강우(姜祐)의 딸이다. 1408년(태종 8)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고, 1414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정자가 되었다. 세종대에서 세조대에 걸쳐 지승문원사, 첨지중추원사를 거쳐 공조·호조·예조의 참의, 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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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열녀. 수문장을 지낸 정천계(鄭天啓)의 아내로, 진주 송곡리(松谷里)에 살았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왜적에게 해를 당하였다. 그의 딸이 곁에 있다가 스스로 못에 빠져 죽었는데, 그때 나이 16세였다. 후에 이 일이 알려져 정려(旌閭)되었으며,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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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 자는 순오(舜五), 호는 수졸(守拙). 정광익(鄭匡翼)의 아들이다. 성품이 순후하고 식견이 발랐으며 조행과 실천이 고아하고 부지런하였다. 선공감역(繕工監役)을 지냈다. 진주 문암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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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자는 군성(軍聖), 호는 가헌(稼軒). 학포(學圃) 정훤(鄭暄)의 후손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어머니가 병으로 십여 년을 누워 지냈다. 동생 정석기(鄭碩基)와 함께 지성으로 간호하며 매서운 추위와 혹심한 더위에도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빨래까지도 아내나 가족에게 맡기지 않고 몸소 하였다. 정성을 다하여 보살핀 결과 어머니의 병이 점점 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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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진사 정대호(鄭大護)의 아들이다. 진주 상사리에 살았다. 어머니가 병들어 점점 심해지니 손가락을 잘라 약에 타서 올리는 등 지극정성으로 간호했다.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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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해주. 자는 옥여(玉汝), 호는 만성재(晩省齋)·부암(敷庵). 승지 정대륭(鄭大隆)의 후손이다. 진주시 용암리 출신이다. 지극한 효성으로 동몽교관을 증직받고 정려(旌閭)되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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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무신. 자는 학연(學然), 호는 만초(晩樵). 정철기(鄭喆基)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도량이 넓고 마음씨가 의연하였다. 어릴 적 무과에 올라 장위영참군(壯衛營參軍)에 기용되었다가 얼마 후에 시종원우시어(侍從院右試御)에 올랐다. 왕의 호위 임무를 맡으면서 왜병의 범궐(犯闕)이 있었을 때 선전관 윤영선(尹映宣)과 함께 칼을 차고 바로 궐 아래로 달려가 임무를 완수하여 신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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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선비. 자는 무중(武仲), 호는 임강정(臨江亭). 징질와(懲窒窩) 정유기(鄭有祺)의 아들이다. 일곱 살 때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는데, 애통해하기를 성인과 같이 하였다. 학문이 해박하고 행실이 고결하였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이 일어나 인현왕후가 변을 당하자 탄식하여 이르기를 "천하에 어찌 어머니 없는 나라가 있겠는가?"라 하였다. 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