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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600012
한자 濟州道-最初最大-抗日運動-法井寺日運動
이칭/별칭 무오 법정사 항일 운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도순동 산1 외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한금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법정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도순천지도보기

[개설]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은 1918년 10월 7일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도순동 법정사의 승려들이 중심이 되어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일으킨 독립운동이다. 법정사가 위치한 서귀포시 도순리 주민과 인근 마을 하원리·월평리·영남리 등의 주민 700여 명이 중심이 되어 참여한 제주도 내 최초 최대의 항일운동으로 3·1운동보다 5개월여 먼저 일어난 무장 항일운동이다. 법정사 주지였던 김연일강창규·방동화 등의 법정사 승려들이 항일운동을 주도하였는데, 이들은 일본인 관리를 제주도에서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하겠다는 거사의 목적을 격문을 통해 밝히고 거사를 실행하였다.

법정사 승려들은 1914년 이후 항일운동을 위해 국권 회복의 필요성을 법정사 신도들에게 교육하고 있었으며, 거사 6개월 전부터 항일운동 조직을 구성하고 곤봉·화승총·격문 등을 미리 준비하였다. 김연일은 조직의 총지휘자였고 그 아래로 좌대장과 우대장을 두고, 원로는 모사로 임명하였다. 거사 현장의 지휘는 선봉대장이 앞장섰으며 선봉 집사와 선봉 좌익장, 선봉 우익장이 군중을 앞에서 이끌었다. 700여 명의 참여자들 중간에 중군대장을 두고, 대열의 뒷부분에 후군대장을 두어 수많은 참여자들을 조직적으로 관리하였다.

1918년 10월 7일 새벽에 법정사 정기 예불 기도를 마치고 34명의 참여자가 거사를 실행하기 위해 출발하였다. 도순리에서 영남리·서호리·호근리·강정리·하원리를 거쳐 중문리로 나아가는 동안 참여자들은 7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들은 서귀포시 중문 경찰관 주재소에 불을 놓아 주재소를 전부 불태우고 전선과 전주를 잘라 통신을 끊었으며, 일본 전통 의상을 입고 길을 지나가는 일본인을 집단 구타하였다.

그러나 법정사 항일운동 참여자들은 거사 3일 후에 목포지청 검사분국으로 이송되어 검찰 단계의 수사를 받았고, 단 한 차례의 판결만으로 형량이 구형되었다. 이들은 3·1운동 참여자들보다 무거운 형량을 구형받았는데, 46명에게 소요 및 보안법 위반죄로 최고 징역 10년형에서 벌금 30원형까지 구형하였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도순동 산 1번지하원동 산 1-1번지 일대 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가 정비되어 2003년 11월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6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귀포시는 법정사 터 건물 부지에 목책을 설치하고, 당시 우물 원형을 복원하고 안내판을 설치해 놓았다. 김연일법정사 항일운동 참여자 28명에게 건국훈장이 추서되었으며, 의열사를 건립하여 형사 사건부에 이름을 남기고 있는 법정사 항일운동 참여자 66명의 영정을 모셔 추모하고 있다. 또한 무오법정사항일항쟁 기념식과 무오법정사항일운동 발상지 걷기 체험 등의 행사가 해마다 개최되고 있다.

[주요 인물들의 활약 내용]

법정사 항일운동 주요 인물은 김연일·강창규·방동화 등이다. 김연일법정사 주지로 1914년 법정사 활동에서부터 일본의 국권 침탈의 부당함을 신도들에게 설명하여 항일 의식을 고취시키고 있었다. 법정사에 함께 거주하던 법정사 승려들은 1918년 4월 경 항일운동의 의지를 결집하고 점차 거사 준비를 구체화시켰다. 이들은 법정사 신도들에게 거사의 뜻을 전하여 참여하도록 권하고, 이들 불교도와 지역 농민을 모아 6개월여 전부터 조직을 구성해 두고 있었다. 1918년 9월 14일 이후 말일까지 보름 동안은 마을에 배포할 격문과 곤봉, 깃발을 제작하고 화승총 3정을 준비하였다. 1918년 9월 말 정구용은 격문을 통해 독립을 위해 일본인 관리와 상인을 쫓아내야 하겠으니 사람을 모아서 집합하라는 요지를 각 마을의 구장들에게 알렸다. 또한 1918년 9월 14일 김연일은 불무황제로 즉위식을 거행하고 조직적으로 역할을 분담 수행하기 위해 조직을 구성하는 각 부서와 부서의 책임자를 정하였다. 조직은 김연일 중심의 거사 구심점인 지휘부와 강창규를 중심으로 한 행동부로 구성되었다. 지휘부에는 총지휘자인 김연일과 그를 보좌하는 좌대장 방동화와 우대장 강민수가 있었고, 행동부에는 거사 현장의 지휘자인 선봉대장 강창규와 선봉대장을 도와 거사의 흐름을 결정하는 모사로 장임호박주석, 그리고 선봉집사 최태유·김봉화와 선봉좌익장 이봉창과 선봉우익장을 두었으며, 이들 아래에서 법정사 신도들이 선봉대로 지역주민의 참여를 유도하면서 앞장서 나가는 역할을 하였다. 지역 주민을 중간에서 지휘할 중군대장 양남구와 후군대장 김삼만을 두어 선봉대장의 역할을 군중 사이에서 이어나갈 수 있도록 하였다.

[힝일운동 경위]

법정사 항일운동은 주도세력들의 1914년부터의 법정사 활동으로 계획적인 사전 준비 끝에 1918년 10월 7일 거행되었다. 10월 5일과 6일은 법정사에서 정기적으로 예불하는 날이어서 이날 모인 사람들과 법정사 승려들은 7일 새벽에 출정식을 갖고 법정사를 내려가 도순리로 향하였다. 법정사를 출발할 때 법정사 주지 김연일은 제주도 내에서 일본 관리들을 쫓아내 원래의 한국 시대로 회복하려 한다는 거사의 목적을 다시 한번 강조하였다. 법정사 예불에 참석하였던 34명의 선봉대는 미리 준비해 둔 깃발과 화승총, 곤봉 등을 가지고 서귀포를 향해 나아갔다. 법정사를 출발한 군중은 도순리 위쪽의 상동, 이어 영남리와 서호리, 호근리로 나아갔다. 선봉대는 마을에서 격문을 배포하고 구장에게 민적부를 제출받아 장정을 모집하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처음에 예상한 수를 참여시키지 못하자 박주석강창규는 서로 의논하여 원래의 목적지였던 서귀포 습격을 중지하고 중문리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기로 예정을 변경하였다. 참여 주민들이 강정리를 거쳐 도순리로 가는 길에 강창규는 강정리와 도순리 사이에 있는 대천 서안의 전선과 전주 두 개를 잘라 내고, 서귀포시 하원리로 향하였다. 하원리에서 고이즈 미키요미[小泉淸身] 일행을 100여 명의 선봉자가 몽둥이와 돌멩이로 구타하고 길가에 내던져 두었다.

서귀포시 중문리에 이르렀을 때 인근 마을에서 동조하여 참여한 주민이 700여 명이었다. 중문리에 도착한 선봉대장 강창규김상언은 중문 경찰관 주재소의 물건들을 몽둥이로 부수었고, 참여자들은 이를 따라서 기구와 문서 등을 불태웠다. 강창규는 지붕의 짚을 뽑아 성냥으로 불을 붙여 중문 경찰관 주재소 건물에 불을 붙였다.

그러나 오전 11시경 서귀포 경찰관 주재소 기마 순사대가 총으로 무장하고 공격해 오자 참여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참여자 중 66명이 검거되고 법정사는 불태워졌다.

[결과와 영향]

주모자인 김연일이 징역 10년형을 구형받는 등 법정사 항일운동 참여자 46명에게 형이 선고되었다. 이는 뒤에 일어난 3·1운동 참여자의 형량보다 많은 것인데, 일제가 법정사 항일운동의 파급과 확산을 우려하였음 말해 주고 있으며, 국권 회복과 일본인을 제주도에서 몰아내겠다는 것을 목표로 내건 법정사 항일운동의 심각성을 일제가 인식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일제는 항일 독립운동의 제주도 내의 파급 확산을 우려하여 법정사 항일운동 발생 3일 뒤에 현행범을 목포지청 검사분국에 접수시켜 사건을 처리하였다. 이는 경찰의 수사 단계를 건너뛰고 바로 검찰 단계의 수사를 한 것이다. 당시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 검사분국이 설치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법정사 항일운동 참여자를 제주지청 검사분국과 동급 기관인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검사분국에서 사건 처리함으로써 일제가 법정사 항일운동을 심각하게 받아들였음을 말해 주고 있다.

거사 현장의 참여자들은 한 차례의 판결만으로 형이 집행되었다. 주요 죄명은 소요 및 보안법 위반죄이고, 적용법은 형법 제106조, 보안법 제7조, 조선형사령 제42조 등이었다. 중문 경찰관 주재소에 불을 지르고 고이즈 미키요미 일행을 때리고 전선과 전주를 잘라 내는 등에 앞장선 강창규김상언은 방화죄와 체포 상해 교사죄, 전신법 위반죄 등도 추가되었다. 화승총을 소지하였던 이춘삼 등에게는 총포화약취급령 위반죄 등으로 판결을 내리기도 하였다. 판결청은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이었다.

재판 전 조사 과정에서 강수오강춘근이 사망하였고, 박주석·김봉화·김두삼 등 세 명은 수감 중 옥사하였다. 김연일·강창규·정구용 등의 주도세력은 거사 현장에서 피신하여 은신하였다가 후일 체포되었다. 김연일은 1년 6개월여 뒤에, 강창규는 4년 3개월간 은신 뒤에, 정구용은 4년 4개월 후에 체포되었다. 주도 인물들을 현장에서 체포하지 못한 일제는 체포된 참여자들에게 가혹한 고문을 가하여 이들은 오래도록 고문의 후유증으로 힘들게 생을 이어갔다. 조사 과정에서 사망한 강수오강창규의 동생이고, 박주석은 모사로 활약하다 현장에서 체포되어 수감 중에 사망함으로써 가혹한 고문의 결과임을 알게 하고 있다. 10년형을 구형받은 김연일은 감형과 가출옥 등으로 3년 2개월 복역하였다. 선봉대장으로 거사 현장을 지휘하여 징역 8년을 구형받은 강창규는 5년 11개월 8일간 복역하여 법정사 항일운동 참여자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감옥에 있었다.

사건이 종결된 후에도 일제는 법정사 항일운동의 파급을 우려하여 항일 독립운동의 목적을 사교도의 혹세무민으로 매도하였고 참여 주민의 숫자도 700여 명에서 300여 명으로 축소 보도하는 행태를 보였다. 김연일정구용 등은 출신지인 경상북도에서 후일 불교활동과 항일운동을 지속하였고 강창규는 출옥 이후 제주도에 서산사를 창건하여 불교활동을 지속하였다.

[의의와 평가]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은 3·1운동보다 5개월여 앞서 실행된 무장 독립운동이다. 지역 주민 700여 명이 참여한 제주도 내 최초이며 최대 규모의 항일운동으로서 그 의의가 크며, 조직을 구성하고 무기를 준비하는 등의 6개월여의 사전 준비 기간에도 발각되지 않았고, 주도자들이 오랜 기간 동안 은신이 가능하였을 정도로 지역 주민들의 호응이 있었다는 점에서 두드러진 특징을 보이고 있다.

항일운동으로 평가된 이후 김연일법정사 항일운동 참여자 28명에게 건국훈장이 추서되고, 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는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61-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의열사를 건립하여 법정사 항일운동 참여자를 추모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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