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4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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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軍事機密-戰況流布事件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승희 |
[정의]
1944년 태평양전쟁 시기 일본의 패전에 관한 유언비어를 퍼뜨린 고봉규·현문옥·박계호·오남학이 검거된 사건.
[역사적 배경]
1941년 12월 8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은 1945년 9월 2일에 일본이 항복 문서에 서명을 하면서 종결되었다. 일본은 ‘본토 결전’ 시기 즉, 전쟁에서 패전하기 전까지 제주도를 일본 본토 방어의 최후 보루로 삼아서 군사 요새화하였고, 이에 섬 곳곳에 수많은 군사 시설을 건설하였다.
1944년 후반부터는 일본군의 태평양전쟁에서의 전세가 점차 불리해지자 이에 따른 유언비어(流言蜚語)를 퍼트려 검거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군사 기밀 및 전황 유포 사건 또한 고봉규·현문옥·오남학이 일본의 전쟁 상황이 매우 불리함을 누설했다가 검거된 사건 가운데 하나였다.
[경과]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봄, 전쟁에서 일본군이 연합군[미군]에게 점차 밀리면서 세력이 약화되자 이와 관련하여, 일본의 불리한 전황을 이야기하다가 검거되는 사건이 많이 발생하였다.
첫번째, 고봉규는 제주 서귀포 대정면 모슬포 다전공무점(多田工務店)의 십장(什長)으로 근무하였고, 1944년 9월 1일부터 1945년 1월 7일까지 육군 군속(君屬)으로 있었다. 그런데 일본의 패전 직전이었던 1945년 1월 13일 오후 6시경 대정면 하모리 1062번지 오지마[大道正八]의 집에서 동인(同人) 등 6명과 대화 중이었다.
대화의 내용은 고봉규가 1944년 10월 육군 군선에 편승하여 부산항을 출발, 중국 상하이로 항해하던 중에 기관 고장으로 조난당한 배 1한척을 목격하고 구조 작업에 나섰다. 구조된 승무원이 가슴에 부상을 입어 상하이 육군병원에 입원 중 다른 부상당한 군인들로부터 당시 육군 군용선 소속 8척이 미잠수함의 공격을 받아 침몰되었다는 이야기를 들다는 것이다. 이에 군사에 관한 유언비어를 유포하였다고 해서 구금되었던 것이다.
두번째, 현문옥과 박계옥은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에 불리한 발언을 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당시 33세로 이발업에 종사했던 현문옥은 1945년 3월 10일 오전 11시 경 제주 성산면 성산리 자신이 운영하던 이발관에서 영업 중에 “미국 잠수함 이야기”를 언급하였다.
그 내용인즉, “사촌형이 일본항로의 선박 승무원으로 근무하였는데 항해 도중 미국 잠수함이 떠올라 자신들이 타고 있던 배를 수색하였는데 선원들은 공포 속에 어찌할 바를 몰라 방황하고 있었는데, 당시 조선인 통역 한 사람이 와서는 ‘당신들이 조선인인 까닭에 죽이지 않았다’고 말하며 잠수함이 떠나갔다.”라는 내용으로 당시 시국(時局)에 관하여 유언비어를 유포했다 하여 구속되었다.
그리고 박계호의 경우는 성산포에서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1944년 10월 중순 오후 10시경 현문옥이 운영하는 이발관에 갔다가 ‘만약 미군기가 공습해오면 어떻게 피신할 것인가’에 대해 언급을 했던 것이다. 박계호는 “태평양의 사이판섬에서 미군기가 공격하여 왔을 때 일본인과 조선인이 많은 사상을 냈는데, 양복을 입은 자는 죽었지만 한복을 입은 자는 많이 살아남았고 당시 살아남은 사람 가운데 한 명은 현재 제주도로 돌아왔다”고 대답하자, 이 또한 시국에 대하여 유언비어를 하였다고 체포, 구금되었던 것이다.
특히 박계호의 경우는 1945년 3월 21일 현문옥이 유언비어로 구금 조사를 받던 중에 약 6개 월 전에 만나서 대화했던 박계호의 발언이 밝혀지면서 문제가 되어 구금이 된 것이다.
세번째, 오남학은 당시 나이 25세로 일본으로 건너가 1940년부터 오사카에서 부친이 경영하던 군수 협력 공장인 조일화학공업소의 책임자로 근무하였다. 부친의 사업을 보좌하며 자재구입을 위한 일본 각지를 여행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 여행길에서 일본의 태평양전쟁과 관련하여, 조만간 이 전쟁에서 패전할 것임을 예견하였다. 특히 1945년 1월 미군기가 일본 도쿄를 공습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일본의 패망이 도래했음을 직감하고 제주로 귀향했던 것이다.
제주에 들어온 오남학은 1944년 12월 9일 처가인 남원면 남원리 정조원의 집에서, 12월 13일 서귀면 서귀리 백준삼의 집에서, 그리고 12월 17일 남원면 한남리 오봉희 집에서 일본에 있을 때 전해들었던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아주 불리한 위치에 처해있다는 이야기를 전한 것이다.
[결과]
일본 당국은 고봉규가 군사 기밀에 관한 유언비어를 퍼트린 것을 문제 삼았으나 당시 일본은 패전 직전이었기 때문에 약식명령에 의해서 광주지방 법원 제주지청에서는 1945년 2월 26일 소위 육군형법과 조선임시보안령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이 선고되었다.
또한 현문옥과 박계호는 1945년 4월 21일 광주지법 제주지청에 의하여 조선임시보안령 위반으로 각각 벌금 1백 원에 처해졌다. 이 벌금을 완납할 수 없을 경우에는 각각 100일간 노역장에 유치한다고 밝혔지만 4개월 뒤 조국이 해방되어 일본인은 제주를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오남학의 경우는 1945년 3월 16일 광주지법 제주지청에서 소위 육군 형법·해군 형법·조선 임시 보안령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8월 광복을 맞이하여 출옥하였다.
[의의와 평가]
태평양전쟁 시기 일본에 관한 군사 기밀과 패전 직후의 전쟁 상황에 대해 유포했다는 사실 때문에 고봉규·현문옥·박계호·오남학 등이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러나 이들은 일본 당국에서는 유언비어라고 규정했지만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던 1940년대의 국제정세를 바르게 알리고,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선전하여 민족 항일 의식을 고취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이에 오남학의 경우 출옥 후에 일본으로 건너가 1992년 4월 23일 타계하였으나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8월 15일 건국포장을 추서한 바 있다. 이처럼 오남학을 비롯한 이들의 활동과 일련의 사건이 당시 패전 직전의 항일운동 가운데 하나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