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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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萬瞻 |
이칭/별칭 | 사앙(士昻),고만추(高萬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재형 |
출생 시기/일시 | 1672년 - 고만첨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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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706년 - 고만첨 초시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708년 - 고만첨 무자 식년시 병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716년 - 고만첨 문과 회시 급제 |
몰년 시기/일시 | 1730년 - 고만첨 사망 |
출생지 | 고만첨 출생지 - 현재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제주 |
대표 관직 | 예조정랑 |
[정의]
조선 후기 정의현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사앙(士昻), 일명 고만추(高萬秋). 아버지는 고원(高瑗), 할아버지는 고상흘(高尙仡), 증조부(曾祖父)는 1666년(현종 7)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지낸 고홍진(高弘進)이며, 외조부(外祖父)는 이인제(李仁濟)이다.
[활동 사항]
증조인 고홍진이 이호(梨湖) 오도롱 사람인데, 그의 조모가 감목관 김대명(金大鳴)의 딸이어서 아버지 고원(高瑗)이 외가인 정의현 의귀(依歸)로 옮겨 살았다. 1689년(숙종 15)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제주에 유배 되었을 때 그를 찾아가 수학하였으나 얼마 뒤 송시열이 떠나고 같은 해에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정의현에 유배된 만구와(晩求窩) 김진구(金鎭龜)에게 6년간 수학하였다. 김진구 밑에서 오정빈(吳廷賓)·정창선(鄭敞選)과 동문수학하여, 1706년(숙종 32)에 제주 순무어사(濟州巡撫御史) 이해조(李海朝)가 내도하여 시취한 제주시재(濟州試才)에 동반 급제하였다. 또한, 김진구의 아들 김춘택(金春澤)이 유배오자 그에게 수학하니, 부자 양대에게 사사(師事)하였다.
이후, 1708년(숙종 34)에 열린 무술 식년방(戊戌式年榜)에서 제주 직부(濟州直赴)로서 전시(殿試)에 참가하여 병과(丙科)로 급제한다. 1716년(숙종 42) 제주 별견어사(濟州別遣御史) 황구하(黃龜河)가 주관한 문과 회시 시험에 급제하였다.
관직으로는 내직(內職)인 성균관 가주서(成均館假注書)·전적(典籍)·직강(直講)·사예(司藝)·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겸 춘추관(兼春秋館)·형조 좌랑(刑曺佐郞)·예조 정랑(禮曹正郞)을, 외직(外職)으로는 창락 찰방(昌樂察訪)·해남 현감(海南縣監)·평해 군수(平海郡守)를 역임하였다. 그의 글 솜씨는 숙종이 놀라 극찬하였다고 한다.
말년에 경상북도 순흥(順興)에 거주하다 1730년(영조 6)에 서울에서 죽으니 제주로 반장(返葬)하여 서홍로(西烘爐)를 장지로 잡았다. 비문은 삼년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간 아들 고한구(高漢龜)가 김진구의 아들이자 김춘택의 아우인 김복택(金福澤)에게 부탁하여 쓰여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