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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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萬有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웅철 |
출생 시기/일시 | 1914년 - 김만유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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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31년 - 김만유 보성고등보통학교 제4학년에 편입 |
활동 시기/일시 | 1932년 - 김만유 만보산 농민 학살 사건 규탄 격문 배포 사건으로 체포, 수감됨 |
활동 시기/일시 | 1943년 - 김만유 니시아라이병원 개원 |
활동 시기/일시 | 1945년 - 김만유 재일본조선인연맹 무임소위원 선출됨 |
활동 시기/일시 | 1946년 - 김만유 『해방신문』 발간 |
활동 시기/일시 | 1950년 - 김만유 간첩 허길송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됨 |
몰년 시기/일시 | 2005년 12월 26일 - 김만유 사망 |
출생지 | 김만유 출생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면 상모리 대동 |
활동지 | 김만유 병원 개원 - 일본 도쿄 아라카와구 |
성격 | 항일운동가|의사|재일교포 사업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무임소위 |
[정의]
일제 강점기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 출신의 사회주의 계열 항일운동가·의사·재일교포 사업가.
[가계]
김만유(金萬有)[1914~2005]는 1914년 대정면 상모리 대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아버지는 김여홍(金麗弘), 어머니는 이창화(李昌花)이다. 형은 김대유이다.
[활동 사항]
김만유(金萬有)는 향리의 개량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대정보통학교를 거쳐 서울에 있는 보성기독청년회 소속 학교에서 중등과정의 신학문을 배우다가, 1931년 보성고등보통학교 제4학년에 편입하였다. 5학년에 진급하면서 그는 『프롤레타리아 경제학』·『사회주의진화론』 등의 여러 사회주의 관련 서적을 탐독하면서 항일 및 사회주의사상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1932년 ‘만보산 농민 학살 사건’이 발발하자 같은 대정 출신인 김무안·이갑문 등과 만보산 농민 학살 사건을 규탄하는 격문 2,000여 매를 제작하여 거리에서 배포하였다. 이 일로 종로경찰서 고등계에 체포되어 그 해 9월 1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 받아 김천소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33년 출소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東京)의과대학 전신인 일본의과전문학교로 진학하여 의사가 된 그는 1943년 5월에 도쿄(東京) 아라카와구(荒川區)에 니시아라이(西新井)병원을 설립하여 개원하였으며, 1945년 연합군의 도쿄(東京) 대공습 때 폭격으로 병원 건물이 잿더미가 되기도 하였다.
해방 후 1945년 10월 15일 도쿄 히비아공원(東京日比谷公園)에서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朝聯)]이 결성되었을 때 제주 조천 출신 김민화(金旼華)가 부위원장 선출되었고 김만유는 무임소위원으로 뽑혔다.
1946년 10월 10일 일본에서 울산 출신 김천해와 함께 『해방신문』을 발간하여 자신은 논설위원을 맡아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들을 숙청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1949년 북한에서 밀파한 간첩 허길송이 도쿄에서 체포되었을 때 김만유도 관련된 것으로 드러나게 되었고, 그 결과 『해방신문』도 발행 중단 처분을 당했다.
김만유는 1953년 5월에 니시아라이병원을 전문 치료 과목을 갖추고 다시 개원하였으며, 1973년에 증축 공사를 하여 300병상이 넘는 최신식 병원으로 키웠다. 말년에 거액을 들여 북한에 대형 현대식 병원을 지어 주기도 하였다. 2005년 12월 26일 일본에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