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949 |
---|---|
한자 | 金益休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신도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웅철 |
출생 시기/일시 | 1913년 - 김익휴 출생 |
---|---|
수학 시기/일시 | 1923년 - 김익휴 의문서숙에서 보통학교 과정 이수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 - 김익휴 일본으로 건너감 |
활동 시기/일시 | 1931년 - 김익휴 동아통항조합 회원 가입 |
활동 시기/일시 | 1932년 - 김익휴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섬유노조 와카야마지부 노동조합에 가입 |
활동 시기/일시 | 1933년 - 김익휴 일본공산당 오사카시 위원회 연맹원으로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37년 - 김익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선고 받음 |
몰년 시기/일시 | 1986년 11월 7일 - 김익휴 사망 |
출생지 | 김익휴 출생지 - 서귀포시 대정면 신도리 1433번지 |
거주|이주지 | 김익휴 이주지 - 서귀포시 한경면 용수리 |
성격 | 항일운동가|사회주의 활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조선공산당 재건 활동 |
[정의]
일제 강점기 제주도 대정면 신도리 출신의 사회주의 계열 항일운동가.
[가계]
김익휴(金益休)[1913~1986]는 1913년 대정면 신도리 1433번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아버지는 김여찬(金汝燦)이다.
[활동 사항]
김익휴는 고향 마을 서당에서 한문을 2년간 수학하고, 1923년 4월부터 바로 이웃마을인 무릉리의 개량서당 의문서숙(疑問書塾)에서 3년 동안 신학문으로 보통학교 과정을 배웠다. 이후 1926년 일본으로 건너가 1934년 1월까지 철공소와 방직공장 공원으로 일했다.
1931년 일본에 있던 제주 출신들이 만든 운송회사인 동아통항조합에 회원으로 가입한 뒤 조합에서 발간되는 뉴스전단지 등을 읽고 당시 사회의 모순점, 불평등한 사회상에 환멸하고 공산주의사상에 물들게 되었다. 이때 제주농업학교 출신 동향 선배인 김희봉(金喜奉)의 사상 지도를 받아 공산주의서적을 탐독하고 혁명에 의한 한국의 독립을 실천하는 길에 동참하려고 했다.
1932년 10월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섬유노조(纖維勞組) 와카야마[和歌山] 지부장으로 책임자였던 김희봉의 권유에 따라 노동조합에 가입해서 함께 노조 활동을 시작했다. 일본의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는 일본공산당의 지시를 받는 단체였고, 그는 이 조합의 와카야마지부에 소속되어 수 십 차례 선전 전단지를 살포했고 같은 해 11월 중순에는 오사카[大阪]로 이동해서 그 조합 오사카지부로 소속을 옮겨 항일운동에 혁명적 공산주의 사상을 접목시키기 위해 조합 전면에서 활동했다.
1933년 9월에는 오사카에 있는 쇼와방직(昭和紡織)공장에서 강대휴(姜大烋)의 권유로 일본공산당청년연맹원에 가입, 일본공산당 오사카시위원회에서 연맹원으로 활동하며 동향 선배이자 항일독립투사이며 공산당 열성당원이었던 좌행옥(左行玉)의 사상지도를 받게 되었고, 그 역시 좌행옥을 직접 지시하던 중국 상하이(上海) 소재, 국제공산당 원동부(遠東部)의 김단야(金丹冶)의 지휘 아래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이 무렵 김익휴는 좌행옥·김형선과 함께 일경의 감시를 피해 국내로 돌아와서 남조선 전라남도 혁명적 노동조합 준비위원회를 조직한 뒤 전라북도와 경상남도 일원에서 활동하였다. 1934년 5월에는 부산으로 이동하여 이금복(李今福)·이춘근(李春根)들과 손을 잡고, 부산에 여러 공장에서 일하는 남녀 공원들의 공산주의 사상을 지도하며 혁명적 노동조합결성과 조선공산당 재건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이 일로 다른 여러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1937년 5월 26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형이 확정될 때까지 수감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감 후 고향에 돌아와 한동안 향리에서 지내다 한경면 용수리로 거처를 옮겼고 1986년 11월 7일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