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14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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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敎育 |
분야 | 문화·교육/교육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집필자 | 임승희 |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지역에서 지식과 기술을 가르쳐 인격을 길러 주는 활동.
[전근대 서귀포 지역의 교육(고려, 조선 시대)]
고려 시대의 제주 교육은 당시 제주도의 상황상 과도한 조공의 부담 때문에 교육 재정 형편이 좋지 않아 제대로 된 교육 활동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특히 고려 시대에 현 서귀포 지역에는 홍로현과 예래현이 있었고, 동쪽으로는 호촌현에 인접해 있었는데 고려 시대의 현은 조선 시대의 현과 달라 제주에 딸린 속현이어서 국왕이 임명한 관리가 와서 다스리지 않았으므로 제도상의 교육 기관이 필요하지 않았다.
다만 고려 시기의 교육 가운데 주목할만한 점은 사회 교육적 흐름이다. 당시의 교육은 본질적으로 불교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고려의 피라미드적 왕권 체제의 지도 원리로서 유교가 주로 관료층의 정신적 원리로 정립되어 간 것과 상응하여 국민 상하에 광범위하게 보다 심층의 정신계를 영도해 온 것은 불교였던 것이다.
조선 전기는 태조대에서 인종대에 걸친 기간으로 전국에 걸쳐 왕조의 중앙 집권 체제가 성리학적 정치 이데올로기에 의해 강력하게 구축되던 시기였다. 특히 조선 전기는 체제를 제도적으로 정비하는 차원에서 국가 교육의 형식 확충이 시급히 요망되었으며 이러한 문교 정책적 필요성에 의해 제주도에도 교육의 형식적 기틀이 갖추어지기 시작하였다.
결국 제주도에는 태조 원년인 1392년에 학교가 세워졌는데, 이것은 지방 향교로는 가장 일찍 설립된 예로서 근본적으로 조선 전기의 대(對)제주도 정책과 관련한 회유책임과 동시에 제주도를 교화가 가장 시급한 지역으로 인식한 중앙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서귀포지역에 설립된 대표적인 관학 기관인 향교로는 대정향교와 정의향교가 있다. 1416년(태종 16년) 정의와 대정 양현이 분치되자, 이후 곧 향교가 설치되었다. 향교 교생의 정원은 『경국대전』에 의하면 정의․대정 양현이 각각 30인으로 규정되었으나 그 수의 제한이 엄격하지 않아 때에 따라 정액보다 적거나 초과하는 사례가 많았다.
[근대 서귀포 지역의 교육]
1) 개항기
조선 말기는 이른바 개화기라고 명명되는 1876년 개항으로부터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될 때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 이 시기는 종래의 유교적 전통의 제약 속에서 소수의 개화사상가들이 서구의 신문화를 받아들이려는 의도에서 근대 교육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이어 근대적 교육 사상의 형성과 그것이 대중 속에 침투하여 대중적 교육 운동이 크게 일어나게 되었다. 이 당시 서귀포 지역 또한 옛날부터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면서 마을의 한문 서당 교육을 통해 기초 교육을 습득할 뿐, 다른 지방에 비해 가장 열악한 조건에서 교육이 이루어지던 시대였다.
1900년대 들어서면서 급변하는 시대적인 배경에 따라 이를 수용하는 새로운 교육형태가 나타나게 되다. 1907년 주성(州城)에는 제주 군수 윤원구에 의해 사립 의신 학교(義信學校)와 제주 공립 보통학교가 개교하였고, 1909년 정의 군수 장용견에 의해 성읍 마을에 의명 학교(義明學校)를, 대정군수 김종하에 의해 안성 마을에 한일 학교(漢一學校)를 각각 개설하였다. 이들 학교의 교육은 종래의 서당 교육이 향교교육에서 탈피, 신식교육으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자, 바로 20세기 초 근대 학교의 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의신 학교와 의명 학교, 한일 학교 등은 군수가 교장을 겸직한 사립 학교로서 졸업생도 배출하기 전에 의신 학교는 1910년 공립 제주 농업 학교로, 의명 학교는 1909년 공립 정의 보통학교로, 한일 학교는 1911년 공립 대정 보통학교로 개편되었다.
2) 일제 강점기
일제는 1911년 8월 제1차 조선 교육령을 내려 소위 일본화 교육을 추진하기 위한 계획을 실행하기에 이른다. 특히 1910년대 말에 이르러 서귀포 지역을 중심으로 제주에 오는 일본 거류민들이 날로 증가하여 집단 거주지를 형성하였는데, 이들을 위한 일본인 학교 설립이 추진되어, 서귀 남 공립 심상소학교[1917], 성산포 공립 심상소학교[1919] 등을 개설하였다.
초등학교의 경우 1군 1교제로 시작되면서 1909년 정의군에 공립 정의 보통학교를, 1911년 대정군에 공립 대정 보통학교를 개설하여 군청 소재지의 보통 교육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또한 서귀포지역 내에 일본 거류민 학교가 설립된 데 비해 한국인을 위한 학교가 개설되지 않았다가 1920년 10월에 4년제의 서귀 공립 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1922년 일제는 제2차 조선 교육령 개정을 공포하고, 1면 1교제를 시행하여, 각 면마다 초등학교 설립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1923년에 성산 공립 보통학교 설립을 시작으로 1924년에 서중 공립 보통학교, 1927년에 좌면 공립 보통학교, 1929년에 안덕 공립 보통학교, 1937년에 성읍 공립 보통학교가 차례로 개설되었다.
1938년 공포한 제3차 교육령에 의해 1면 3교제로 바뀌면서 학교 신설이 급증하였다. 1938년 공립으로는 효돈교가, 1940년 공립으로는 무릉교, 도순교가, 사립으로는 보성교가 개설되었다. 1941년에는 신산교에 이어, 1944년에 예래교 등이 개설되었다. 이와 더불어 유아교육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게 되면서, 1935년 12월 21일 대정읍 하모리에서는 민간 육영회가 모슬포 유치원을 설립하였다.
일제강점기의 중등 교육은 고등 교육을 제한하고 초등 교육과 실업 교육만을 강요하는 교육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서귀포 지역에는 제주도 공립 농업 실수 학교가 1936년 5월 29일 설립 인가를 받고 개교하였다. 1946년 10월 정규 학교로 승격되면서 서귀 공립 초급 중학교로 개편되었다가 1951년 서귀 공립 농업 중학교로 개편, 같은 해 8월에 서귀 농림 고등학교로 승격되기에 이른다.
한편 1910년대 들어와 서구의 신식 교육이 점차 확산되자, 전통적인 교육 기관인 재래의 서당을 개량하여 근대적 초등 교육 기관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전개되었다. 이에 1905년 중문리의 개성 학숙을 시작으로, 일신 학숙, 양원 학숙, 진수 의숙, 진성 의숙, 광제 의숙, 중앙 의숙, 법환 서숙, 보신 사숙 등이 개설되었다. 개량 서당에서는 근대 교육의 교과를 사용하고 교원도 신교육을 받은 사람을 채용하여, 정규 학교를 대신해 신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민족 교육이 이루어졌다.
또한 보통학교나 간이 학교, 개량 서당에도 갈 수 없는 기층 민중에 대한 교육, 즉 야학이 존재했는데 주로 민간단체나 학생들이 근로 청소년이나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성인 등을 대상으로 운영되었다.
[현대 서귀포 지역의 교육]
서귀포에서의 현대 교육은 1945년 광복 이후의 교육을 의미한다. 광복 이후 미군정기[1945-1948] 3년 동안 서귀포에서 학교 특히, 초등학교 설립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는 것이 가장 특징적인 교육 현상이었다. 종래의 일제 식민지 탄압에 억눌러 있던 교육 열망은 이미 해방 이전인 1920년 서귀 공립 보통학교를 시작으로, 1923년 성산 공립 보통학교, 1924년 남원 공립 보통학교, 1927년 좌면 공립 보통학교, 1938년 신효 공립 심상소학교, 1940년 도순 공립 심상소학교, 1943년 서호 공립학교, 1944년 상예 국민학교 등 8개교의 학교 설립으로 이어졌다. 광복 이후 미군정 기간 동안에도 새로이 설립 인가를 받고 설립된 초등학교로는 1946년 서귀 남 국민학교, 1946년 강정 국민학교, 보목 국민학교, 토평 국민학교 등 4개교가 있다.
그리고 중등 교육 기관으로는 대정 공립 초급 중학교[현 대정 중학교]를 비롯하여, 1945년 중문 중학원, 1947년 남원 중학원, 1948년 성산 중학원이 설립되었다. 정부 수립 이후에 중문 중학원과 성산 중학원은 각각 부문 중학교[현 중문 중학교], 성산 초급 중학교로 승격되었으며, 남원 중학원은 남원 고등 공민학교의 과정을 거쳐 남원 중학교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1948년 제주 4·3 사건으로 인해 당시 설립되었던 학교 시설이 직․간접적으로 소실되거나, 임시 또는 완전 폐교에 이르는 상황을 초래하기도 했다.
이처럼 1940년대 후반 서귀포의 교육은 정치적․사회적 혼란과 수난기였으나, 1950년대에 들어와서는 서귀포 교육의 재건을 도모하여, 교육 시설에 대한 복구 활동과 더불어 새로운 학교 설립 운동으로 이어져갔다. 1949년 하례 국민학교 신례 분교장의 설립을 시작으로, 서귀 국민학교 서홍 분교장, 신도 국민학교 보흥 분교장, 가파 국민학교 마라 분교장 등이 개교하였다. 1960년대 들어와서는 의무 교육이 중요한 관심사로 부각되었으며, 토평 국민학교 영천 분교장, 서귀 북 국민학교, 창천 국민학교 상천 분교장, 서귀 중앙 국민학교, 보성 국민학교 신평 분교장, 도순 국민학교 하원 분교장 등이 설립되었다.
1980년대 이후 문교부에서는 국민 신교육과 함께 과학 기술 교육을 2대 시책으로 설정하고 기초 과학 교육의 진흥을 위한 대책 수립에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1990년대 이후부터는 본격적인 지방 교육 자치제가 시행됨에 따라 과거의 남제주군 교육청을 흡수·통합하여 서귀포 교육 지원청이 설립되었고, 현재까지 서귀포 초등 교육의 미래를 책임지고 있다.
한편 서귀포 대학 교육의 효시는 한국 대학 서귀포 분교로서, 6·25 전쟁이 발발하자 전국에 있는 대학교들은 휴학령이 내려져 1950년 9월 한국 대학 서귀포 분교[분교장 한관섭]가 정방 폭포정방사 입구에 초가집 1동을 피난민 학교로 운영하다가 1953년 3월 부산 전시 연합 대학으로 통합, 1953년 휴전과 동시에 같은 해 9월 한국 대학으로 복귀, 개강한 바 있다. 1962년 3월 제주 대학이 국립 대학으로 승격되자, 1964년 서귀포시 동홍동 1470번지 일대에 제주 대학 농학부를 신축 이전하여 서귀포와 제주시에 분산·운영하게 되었다. 그러나 1979년에 대학 캠퍼스의 분설 상황에 문제점이 상정되어, 농학부와 수산학부가 제주시로 이설․통합하게 되었다.
이후 1996년 12월 학교 법인 동원 학원이 동원 산업 대학교 설립 인가를 받고 이듬해 3월 서귀포시 하원동 산 70번지에서 개교하였다. 같은 해12월 5일 일반대학으로 탐라 대학교 설립 인가를 다시 받고 1998년 3월 4일 개교하였다. 당시 정진․창조․발전이라는 교육 목표 아래 현대식 건물과 첨단 정보 처리시설 어학관, 40여개의 실험 실습실 등을 완비하여 관광 자원화 대학으로 각광을 받았다. 그러나 2012년 2월 27일 탐라 대학교와 제주 산업 정보 대학교가 통·폐합되어, 제주 국제 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고, 현 제주 산업 정보 대학교 일대에 개교하여 새로 출범하였다.
2000년대 들어오면서 서귀포 교육 지원청에서는 교육 지향을 ‘희망과 감동을 주는 서귀포시 교육’으로 정하고, 이를 구현하기 위해 기본이 충실한 창의․인성 교육, 더불어 살아가는 세방화 교육, 공동체가 만족하는 교육 복지, 소통과 공감의 지원 행정을 주요 시책으로 삼고 다양한 교육 정책을 실현해나가고 있다.
[현황]
2012년 4월 현재 서귀포 지역의 교육 기관 현황을 보면 유치원 42개원, 초등학교 45개교, 중학교 15개교, 고등학교 10개교, 대학교 1개교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