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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원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800309
한자 金周元
영어의미역 Gim Juwon
이칭/별칭 명주군왕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울진군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집필자 홍영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진골 귀족
출신지 경상북도 경주시
성별
본관 강릉(江陵)
대표관직 시중

[정의]

통일신라시대 울진 지역을 식읍으로 받아 지배권을 행사한 진골 귀족.

[개설]

원성왕(元聖王)의 즉위와 김주원의 명주 퇴거는 무열왕계에서 부활 내물왕계로 왕권이 실질적으로 넘어가는 시점으로, 이때부터 사실상 신라 하대가 전개되는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 명주로 퇴거한 김주원명주군왕(溟州郡王)에 봉하여지고 아울러 강릉 등 인근 지역을 식읍으로 받아 지방의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함으로써 호족체제의 선구적인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김주원의 아들과 손자인 김헌창(金憲昌)김범문(金梵文)으로 이어지는 반란의 성격이 후백제와 후고구려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양상을 보이자 신라 조정에서 군진(軍鎭)을 확대 설치하고, 부(府)제도를 실시하여 지방을 유지·통제하였다. 이와 같이 김주원의 퇴거와 그 결과 확보된 중앙과 대립할 수 있는 독자적인 지역 기반은 궁예(弓裔)가 명주에 들어온 후 장군(將軍)으로 추대되어 자립 기반을 마련하는 데 도움을 주어 후삼국시대를 여는 바탕이 되었다.

[가계]

강릉김씨 족보에 의하면 고조할아버지는 무열왕의 셋째 아들 김문왕(金文王)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시중(侍中)을 역임한 김대장(金大莊)이며, 할아버지는 상대등을 지낸 김사인(金思仁), 아버지는 시중을 역임한 無月郞 김유정(金惟正, 金惟靖)이다. 김주원원성왕과의 왕위쟁탈전에서 패배한 후 명주로 퇴거하여 강릉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활동사항]

김주원은 777년(혜공왕 13) 이찬(伊湌)으로 시중에 임명되었으며, 혜공왕(惠恭王)이 살해되고 선덕왕(宣德王)이 즉위한 780년에 퇴임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 권2 기이(紀異) 원성대왕조(元聖大王條)에 의하면, 785년 선덕왕이 죽은 후에 김주원은 상재(上宰)로서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었는데, 이재(二宰)인 김경신(金敬信)[원성왕]이 때마침 북천(北川)의 물이 불어 김주원이 건너오지 못하는 틈을 타 왕궁을 점거하고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 10 원성왕 즉위년조에는 “군신들이 선덕왕의 뒤를 왕의 족자(族子) 주원으로 세우고자 하였으나, 알천(閼川)의 물이 불어 못 오게 되자 하늘의 뜻이라 여겨 상대등 김경신을 만장일치로 왕위를 계승하게 하고, 국인(國人)들이 만세를 불렀다”라고 전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4 강릉대도호부 인물조에는 “선덕왕의 어머니인 정의태후(貞懿太后)의 교지를 군신들이 받들어 김주원이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상대등 김경신이 무리를 위협해 자립하고는 먼저 입궁칭제(入宮稱制)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이러한 기사들은 공통적으로 김주원이 왕위 계승의 제1후보로 즉위해야 하나, 김경신김주원을 밀어내고 즉위하였음을 말해 주고 있다.

김경신과의 싸움에서 실패한 김주원은 화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명주로 퇴거하였다. 그러나 그의 세력기반이 만만하지 않았기 때문에 786년 원성왕김주원명주군왕(溟州君王)으로 봉하고 명주·양양·삼척·평해·울진 등을 식읍(食邑)으로 주었다. 식읍은 귀족·공신 등에게 주었던 영지(領地)를 말한다. 그러므로 양양에서 강릉을 거쳐 울진·평해에 이르는 동해안 일대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은 김주원이 행사하게 되었다.

김주원이 받은 명주군왕이라는 봉작과 식읍은 그 후손에게 세습되어, 김주원의 아들 김종기(金宗基)는 명주군왕으로, 김종기의 아들 김정여(金貞茹)명원공(溟源公)으로, 김정여의 아들 김양(金陽)명원군왕(溟源郡王)으로 각각 봉해졌다.

김주원이 명주를 퇴거지로 택한 배경은 『강릉김씨세보(江陵金氏世譜)』에 의하면 아버지 김유정이 명주에서 벼슬살이를 할 때 연화부인을 만난 인연과 관련이 있다. ‘명주군왕고도기적비문(溟州郡王古都紀績碑文)’에는 강릉을 ‘명주군왕의 어머니 고향(王之母鄕也)’이라 하였다. 연화부인과 무월랑 김유정의 설화는 이 밖에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에도 실려 있다. 즉 명주는 김주원의 외가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원성왕의 즉위와 김주원의 명주 퇴거 이후에도 신라의 중앙 정치계에서는 김주원의 아들인 김종기김헌창은 물론 그 후손들까지도 시중을 역임하는 등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심지어는 김헌창의 난(822)과 김헌창의 아들인 김범문의 난(825) 이후에도 신라 조정에서는 김주원계의 후손으로 사촌 간인 김흔(金昕)김양김명(金明)[민애왕]과 김우징(金祐徵)[신무왕] 간의 왕위쟁탈전에 서로 적대적인 주요 인물로 가담하는 등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묘소]

묘소인 명주군왕릉은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 삼왕동에 있으며, 1971년 12월16일 강원도 지방기념물 제12호로 지정되었다. 『증수임영지』에 따르면 김주원이 도읍한 명주성은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금산리에 속하는 남대천 중류 북안의 장안동(長安洞)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안동은 상장안(上長安)과 하장안(下長安)으로 구분되는데, 이 일대에서 ‘명주성(溟州城)’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실제 김주원의 도읍지인 명주성 터로 추정된다.

[상훈과 추모]

1931년 군수 주재로 명주군왕대제를 처음 올렸으며, 8·15 광복 후부터 강릉김씨 종중에서 정식으로 맡아 제례를 올리고 있다. 제례일은 매년 음력 4월 20일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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