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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800319
한자 高麗時代
영어의미역 Goryeo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울진군
시대 고려/고려
집필자 심현용

[정의]

918년에서 1392년까지 고려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의 경상북도 울진군의 역사.

[개설]

현재의 울진 지역은 고려시대에 들면서 남쪽의 평해와 북쪽의 울진이 구분되어 읍격의 변화를 보인다. 남쪽의 평해는 고려시대 이전의 역사적 상황을 뚜렷하게 확인할 수 없으나, 고려시대에 들면서 북쪽의 울진과 구분되어 문헌에 기록되어 나온다. 이때부터 울진과 평해는 서로 다른 행정체계를 분명히 보인다.

[울진의 행정구역 개편]

고려 995년(성종 14)에 전국을 10도로 나눌 때 강원도는 대부분 삭방도(朔方道)가 되었으며, 울진은 이 삭방도에 소속되었다. 이후 지방제도는 몇 차례 개편되면서 현종[1009~1031] 때 오도양계제(五道兩界制)로 정리되었다. 이때 지금의 강원도는 대체로 태백산맥 동쪽은 동계(東界)로, 서쪽은 교주도(交州道)로 분리되었으며, 울진은 동계에 소속되어 명주 관할이었다.

『세종실록』·『고려사』·『신증동국여지승람』·『대동지지』의 기록을 보면, 울진은 군에서 현으로 강등되어 현령이 두어졌다. 울진이 현으로 강등된 시기는 1018년(현종 9) 지방제도를 개편할 때로 추정된다. 울진현은 현령이란 외관이 파견되었으나 속현은 없었다. 1036년(정종 2)부터 동계로, 1047년(문종 1)에 동북면(東北面)으로 불렸다. 1178년(명종 8)에 강원도는 대관령 동쪽은 연해명주도(沿海溟州道)로, 서쪽은 춘주도(春州道)라 했으며, 이후 춘주도는 동주도(東州道)로 바뀌었다.

또 경상도 예주 영양군 소속이었던 수비부곡은 문종[1046~1086] 때 잠시 울진에 이속되었다가 다시 영양군으로 복구되었다. 1263년(원종 4)에는 연해명주도가 강릉도(江陵道)로, 동주도가 교주도(交州道)로 변경되었다. 1356년(공민왕 5)에는 강릉도가 강릉삭방도(江陵朔方道)로 되었다가 같은 해 7월에는 동북면으로 불렸다. 1357년(공민왕 6)에 다시 강릉도로, 1360년(공민왕 9)에 삭방강릉도로, 1366년(공민왕 15)에 다시 강릉도로 바뀌었다. 또 1388년(우왕 14)에는 영동과 영서를 합하여 교주강릉도로 불렸다.

이처럼 고려시대 강원도 지역은 여러 차례 대관령 동쪽과 서쪽으로 분리되기도 하고 합해지기도 하면서 삭방도·강릉도 또는 합하여 연해명주도·교주강릉도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렸다. 이에 따라 그곳에 속해 있던 울진도 함께 그 연혁이 변경되었다. 한편, 울릉도는 고려 초부터 울진 관할 행정구역으로 포괄되었다. 그러나 임오군란이 수습된 직후인 1882년에 울진현에서 평해군으로 소속이 변경되었다.

[평해의 행정구역 개편]

경상도는 고려 995년 10도제를 시행할 때 경주·금주 소관은 영동도(嶺東道), 상주 소관은 영남도(嶺南道), 진주 소관은 산남도(山南道)라 하였다. 1106년(예종 1)에는 경상진주도(慶尙晋州道)라 하였으며, 1171년(명종 1)에 경상진합주(慶尙晋陜州)를 2개 도로 분리하였다. 1186년(명종 16)에는 경상주도로, 1204년(신종 7)에는 상진안동도(尙晋安東道)라 했으며, 그후 다시 경상진안도(慶尙晋安道)로 개칭하였다. 1314년(충숙왕 1)에는 경상도로 정하였다.

평해에는 1172년(명종 2)에 처음으로 감무(監務)가 임명되었다. 고려 정부는 영현으로 승격된 지역에만 현령관을 파견하고 감무는 속군현에만 파견했는데,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평해에 감무를 파견시킨 것은 이 지역에 대량으로 발생한 유민(流民)를 안집(安集)시키려는 의도에서 취해진 조치로 판단된다.

1259년(고종 46)에 명주도의 화주·등주·정주·장주 4개 주가 몽고 침략자들에게 강점되었다. 이에 따라 경상도에 속해 있던 평해·덕원[지금의 영해]·영덕·송생 등을 나누어 명주도에 소속시켰으며, 1290년(충렬왕 16)에 다시 덕원·영덕·송생을 동계에 이속시켰다.

이 기록은 『고려사』에만 보이는 것으로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평해가 1259년(고종 46)에 경상진안도의 예주 소속에서 명주도로 이관되었으며, 이후 언제인가 평해를 제외한 세 지역은 경상도로 환속되었고, 평해는 그대로 명주도인 강릉도에 종전대로 예속되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울진현은 연해명주도에, 평해현은 경상진안도에 소속되어 그 영속 관계를 달리해왔으나, 고려 말 1259년(고종 46)에 평해현이 [연해]명주도 영역에 포함되면서 비로소 울진과 영속 관계를 같이 하게 된 것이다.

1. 평해 개명과 유린군

평해에 관한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에 처음 나온다. 평해군은 지군사가 1인이며, 본래 고구려의 근을어로 고려시대에 평해군으로 승격되었고, 현종 대에 예주의 임내가 되었다고 한다. 『고려사』에는 고구려 때 근을어였다가 고려 초에 평해로 개명되었고, 현종 대에 예주에 소속되었으며, 1172년(명종 2)에 감무를 두고 충렬왕 때 지군사를 두었다고 되어 있다.

위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평해는 고구려의 근을어였는데, 신라에 복속되고도 명칭이 변경되지 않고 지속되어오다가 고려 초에 개명된 것이다. 평해로 개명된 시기는 주·부·군·현의 명칭을 개정한 때인 940년(태조 23)이나 지방제를 10도로 개편한 995년으로 추정된다. 이때 근을어가 평해로 개명되고 현으로 승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평해는 소규모 지역이었으므로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다.

당시 이 지역이 고구려의 근을어에서 고려 초 평해로 개명될 때까지 어떠한 상태로 존재하고 있었는지 현재로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후대의 기록이긴 하나 『대동지지』에 “신라 757년(경덕왕 16)에 평해로 개명하고, 유린군[지금의 영해]의 영현으로 삼았다”는 새로운 내용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유린군은 본래 고구려의 우시군으로 경덕왕이 개명했으며, 지금의 예주이고, 청하현[지금의 청하]을 영현으로 삼고 있었다”는 기록만 보인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1145년(인종 23)경까지 울진과 영해 사이에 위치한 평해에 대한 기록을 전혀 찾을 수 없다.

『세종실록지리지』[1432]와 『고려사』[1451]는 『대동지지』[1864]보다 먼저 편찬되었다. 따라서 757년에 평해로 개명하고 유린군의 영현으로 삼았다는 『대동지지』의 내용보다 고려 초에 평해로 개명하고 현종 대에 예주의 임내가 되었다는 『세종실록지리지』와 『고려사』의 내용이 더 신빙성이 있다.

평해가 현종 대에 예주에 소속되었다는 것은 고려 초인 940년이나 995년에 평해현으로 승격되고 개명된 것으로 보아 그전까지 소규모의 지역이었기 때문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다가 현으로 승격된 후 1018년 지방제도 개편 때 정식으로 예주의 속현이 된 것을 뜻한다. 이는 평해가 이전부터 예주의 소속이 아니었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에 『대동지지』의 견해대로 평해는 일찍부터 유린군[후에 예주]의 범위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2. 평해군 승격

1309년(충선왕 1) 8월에 강릉도존무사 김천호 이하 지방관들이 주도하여 동해안의 9곳에 매향(埋香)을 하는데, 이 가운데에 평해군과 울진현이 나온다. 『근재선생집(謹齋先生集)』[1680] 권1 「관동와주(關東瓦注)」에는 안축[1287~1348]이 1330년(충혜왕 1) 강릉도존무사의 직무와 관련하여 여행한 지역에 울진과 평해가 나온다. 또 『가정집(稼亭集)』[1349] 권5 「동유기(東遊記)」에는 이곡이 1349년(충정왕 1)에 “평해는 강릉도의 남계다(平海郡者 江陵道之南界也)”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에서 평해와 울진은 1309년에는 벌써 강릉도에 속하여 강릉도존무사의 관할을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충렬왕[1274~1308] 때 평해에는 현인(縣人)인 황서(黃瑞)의 공으로 지군사가 파견되었다는 『세종실록』·『고려사』·『신증동국여지승람』·『대동지지』의 기록으로 볼 때, 이때 평해는 평해현에서 평해군으로 승격된 것이다.

평해군으로 승격된 시기는 고성 삼일포 매향비에 따르면 1309년 8월에 평해가 군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297년 1월 이후부터 충렬왕의 마지막 재위 해인 1308년 사이일 것으로 추정된다. 시기를 더 좁혀 본다면, 중국 원(元)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직후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왜냐하면 중국에 갔다 온 직후에 신하들의 업적에 대해 왕이 위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고려사』권31 세가31 충렬왕4 충렬왕 23년조에 기록된 1297년 5월과 6월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5월 정묘일에 왕과 공주가 원나라로부터 개성으로 돌아와서 그 길로 신효사에 갔다”, “6월 정유일에 우박이 내렸다. 무술일에 왕의 명령으로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던 신하 관료들에게 각각 4등급을 올려 관직에 임명하도록 하였다”는 내용으로 보아, 왕이 5월에 돌아와서 6월에 공적을 올린 신하들 가운데 한 사람인 황서에 대해서도 계급을 올려주고, 공을 높이 평가하여 그의 고향인 평해를 군으로 승격시켜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다면 1297년 6월경에 평해현에서 평해군으로 승격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또 평해군으로 승격될 당시는 경상진안도가 아닌 강릉도에 소속되어 있었다.

3. 영해 소속이었던 평해

『고려사』권57 지11 지리2 경상도 예주·평해군조에는 “영해부에는 평해군·영양군·영덕군의 3개 군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해는 1259년(고종 46)에 덕원도호부로 승격되었고, 후에 예주목이 되었으며, 1310년(충선왕 2)에 영해부로 되었다. 따라서 『고려사』의 기록대로라면, 평해군은 1310년 이후에도 계속 영해부의 속군으로 있었던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러나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속현으로 영양현과 청기현만 거느리고 있었으며, 영해의 북쪽 경계가 강원도 평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세종실록지리지』가 편찬된 1432년 이전에 평해는 벌써 예주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 즉, 평해와 영덕은 1259년(고종 46)에 명주도로 이관되면서 경상도 예주[지금의 영해]의 소속에서 벗어났으며, 영덕은 1314년에 경상도에 다시 복구되어 예주에 소속되었고, 평해는 그대로 명주도인 강릉도에 남았다.

한편, 평해는 1018년 지방제도를 개편할 때 예주방어사의 속현이 되어 예주의 통제를 받았으며, 1172년(명종 2)에 감무가 파견되는 것으로 보아 아직 주현이 아닌 속현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1297년에 지군사를 두면서 황서를 현인으로 부르는 것으로 보아 당시까지는 현이었으나 지군사를 두면서 군으로 승격된 것을 알 수 있다. 즉, 평해는 1018년부터 1258년까지 예주의 속현으로 있었으며, 1259년(고종 46)에 예주에서 벗어났으나 현으로 그 읍격을 계속 유지해오다가 1297년에 군으로 승격되었던 것이다.

그동안 편찬된 사서(史書)들은 이러한 평해의 역사적 변동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평해에 대한 잘못된 기록들을 싣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영해부에는 평해군·영양군·영덕군의 3개의 속군이 있다”라든가 『고려사』권5 세가 5 현종2 현종 19년(1028)조와 권8 세가8 문종2 문종 18년(1064)조의 ‘평해군’이라는 기록은 잘못된 기록들이다.

[왜구의 침략]

동해안에 위치한 울진과 평해는 왜구의 침략으로 인한 피해를 상당히 입었다. 우왕 7년 3월에 왜구는 울진과 평해를 비롯한 송생(松生)·삼척(三陟)·영해(寧海)·영덕(盈德) 등지를 침략하였다. 3개월 후인 6월에 왜구가 다시 울진현에 침입하였는데, 권현룡(權玄龍)이 싸워 패퇴시키고 왜구 20여급을 참하고 말 70필을 획득하였다. 우왕 8년 2월에 왜구는 평해군을 침략하였다. 그 한달 후인 3월에는 삼척·울진·우계(羽溪) 등의 현을 침략하였다. 우왕 11년 6월에는 왜구가 평해군을 침략하자 강릉도체찰사 목자안(睦子安)이 격퇴하였고 왜구 5급을 참하였다.

울진과 평해는 이처럼 우왕대에 왜구의 집중적인 침략을 당했다. 당시 울진과 평해의 피해 사례는 구체적으로 기록된 자료가 없어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살인·약탈·방화 등의 피해를 겪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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