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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족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800323
한자 豪族
영어의미역 Local Gentry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울진군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최인표

[정의]

경상북도 울진 지역에서 신라 말 고려 초에 독립된 세력을 형성하여 지배권을 행사하던 세력.

[성립 배경]

신라 말 고려 초에는 많은 호족들이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하고 지배권을 행사하며 지방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울진 지역에서도 이러한 호족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문헌 자료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고려 태조가 930년에 고창[지금의 안동] 전투에서 견훤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자 신라 이동 연해의 주군(州郡)과 부락들이 모두 항복해 왔다는 사실이 『고려사』 권1 세가에 기록되어 있다. 이때 항복한 성은 명주(溟州)로부터 흥례부(興禮府)에 이르기까지 모두 110여 개 정도였다. 고려에 항복한 110여 개의 성들은 동해안 각 지역 호족들의 근거지로, 이 가운데에는 울진 지역의 성들도 포함되었다.

이 시기의 호족들은 대개 군현을 단위로 하여 성립되었다. 예를 들면, 고울부 장군 황보능장은 경상북도 영천 지역에 해당하는 고울부를 지배 영역으로 하였고, 벽진군 장군 이총언은 경상북도 성주 지역에 해당하는 벽진을 지배 영역으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에서 추론해 볼 때 울진군 지역에는 적어도 옛 울진군을 기반으로 한 호족과 옛 근을어현[현 울진군 평해읍]을 기반으로 한 호족이 성립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들 울진 지역의 호족들은 관내의 성들을 근거지로 하여 외부 세력의 공격에 대항하고 안으로는 관할 지역의 지배자로 행세하였다. 그러나 울진군은 영현이 하나뿐일 정도로 군세(郡勢)가 그리 크지 않았고, 주변에 산이 많고 농경지가 적은 데다 울진 지역을 기반으로 한 호족의 이름도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 울진이나 평해를 기반으로 한 호족은 큰 세력을 지닌 대호족이라기보다는 대호족의 지배를 받는 군소 규모의 호족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대호족 명주장군 김순식]

군소 호족들은 형편에 따라 대호족에게 귀부하여 일정한 의무를 부담하고, 보호를 받아 다른 호족의 공격으로부터 자기의 세력을 유지하기도 하였다. 울진과 평해 지역을 근거로 하는 호족들도 군소 호족이었기 때문에 대호족과 일정한 연계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울진의 호족이 연계할 수 있는 대호족으로는 지리적인 위치로 미루어 볼 때 강릉 지역을 근거로 명주장군을 칭한 김순식(金順式)을 들 수 있다. 김순식은 강릉 지방으로 낙향하여 토착한 김주원 가문의 후손으로 3천 명 이상의 군대를 거느리며 명주장군을 칭하면서 호족으로 등장하였다. 궁예가 명주를 흡수하고 곧바로 후고구려를 건국하고, 태조가 즉위한 후에도 오래 동안 귀부하지 않아 태조의 큰 근심거리가 되었을 정도였으므로 동해안 지역에서는 가장 큰 호족이었다 할 수 있다.

울진군은 신라 지방 행정 조직인 9주 중 명주 관할 하에 있었고, 또 김주원이 강릉으로 낙향한 이후 김순식 대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쳐 김주원계의 식읍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관계를 고려할 때 울진 지역을 기반으로 한 호족은 김순식과 연계하여 활동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김순식은 922년(태조 5)에 왕건에게 귀부 의사를 밝히고 맏아들 김수원(金守元)을 태조에게 보냈다. 5년 뒤인 927년(태조 10)에 아들 김장명(金長命)에게 군사 600명을 주어 태조를 숙위하게 하고, 이듬해에 무리를 이끌고 친히 태조를 찾아갔다. 태조는 김순식에게 왕씨(王氏) 성을 하사하고, 대광(大匡)의 관등을 수여하였다. 이 시기에 태조가 호족에게 대광의 관등을 수여한 것은 김순식이 유일하다. 이렇게 볼 때 김순식 세력과 일정하게 연계하여 활동하고 있던 울진 지역의 호족도 왕건에게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에 통합]

930년(태조 13) 고려 태조가 후백제 견훤의 군대를 고창 전투에서 크게 격파함으로써 후백제와의 각축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동해안 지역의 호족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게 되었다. 영안·하곡·직명·송생 등 안동 주변 30여 개 군현이 고려에 항복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강릉에서 울산에 이르는 110여 개의 성들도 스스로 고려에 항복하였던 것이다. 이는 동해안 지역의 호족들이 지금까지 유지해 왔던 독자성을 상실하고 고려의 지방 행정 구역으로 편입된 것을 의미한다.

울진 지역의 호족도 이때 독자성을 상실하고 고려의 한 지방으로 편제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고려 태조는 후삼국을 통일한 후 주·군·현의 명칭을 개정할 때 고려왕조에 대해 협조적인 호족에 대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읍격(邑格)을 부여하였지만, 그렇지 않은 세력에 대해서는 읍격을 강등하기도 하였다. 울진 지역의 경우 종래의 군에서 현으로 개편하고 현령을 파견하였다. 이는 읍격의 강등이라 할 수 있는데 고려에 대한 울진 지역 호족의 협조가 소극적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평해의 경우 고려 때와 고구려 때의 지명인 근을어(斤乙於)에서 평해군으로 개칭되어 예주[영해]의 속군(屬郡)이 되었다. 속군은 속읍(屬邑)·임내(任內)·관내(管內) 등으로도 불리며,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군현을 말한다. 평해군은 비록 군으로 편제되기는 하였지만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아 예주의 속군이었으므로 행정 체계상 그리 중요한 지역으로 편제된 것 같지는 않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범**** 좋은정보 감사합니다. ^^
  • 답변
  • 디지털울진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이용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4.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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