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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피리 성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800496
한자 王避里城址
영어의미역 A Fortress Site in Wangpi-ri
이칭/별칭 왕피성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터
지역 경상북도 울진군 금강송면 왕피리 641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집필자 이희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산성 터
원건물 건립시기/일시 통일신라시대
소재지 주소 경상북도 울진군 금강송면 왕피리 641 지도보기

[정의]

경상북도 울진군 금강송면 왕피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토석 혼축 산성지.

[변천]

신라 경순왕(敬順王)이 고려에 항복하자 태자는 부왕에게 그 불가함을 역설했으나 불가항력으로 천년사직이 고려로 넘어갔다. 태자는 마의(麻衣)를 입고 모후(母后) 송씨(宋氏)와 함께 왕피리로 와 있다가 모후는 이곳에서 작고했으며, 태자는 금강산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후 고려 31대 공민왕도 전란을 피해 군병을 인솔하고 안동과 영양을 거쳐 이곳 왕피리로 피난하였다고 한다.

울진에 왕피성이 있었다는 옛 기록은 없다. 다만, 최근의 읍지나 군지에 실린 간단한 자료가 고작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왕피성은 석축성인데, 지금은 그 형태가 불분명하다. 다만, 부근의 마을 이름이 당시 군영(軍營)의 부서 단지로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역사적으로 큰 의의가 있다. 고려 31대 공민왕이 전란을 피해 군병을 인솔하고 안동과 영양을 거쳐 내주하였는데, 병위(兵衛)·포전(飽田)·거리고(巨里庫)·한천(寒川) 등의 마을이 군영의 부서 단지와 동일함을 알 수 있으며, 이곳을 흐르는 하천 이름도 왕피천이라 하여 피난의 슬픔을 말없이 안고 흘러내린다.”

[위치]

왕피리로 들어가는 길은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그 하나는 울진과 영주를 잇는 국도 36호선 부근인 금강송면 하원리 새터마을에서 통고산을 향해 개설된 임도를 따라 들어가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국도 7호선 주변에서 매화면 매화리로 들어와서 대령산을 넘어 왕피리로 들어가는 것이다.

울진읍에서 출발하여 국도 7호선을 따라 남쪽으로 조금 오면 수산교가 있다. 수산교에서 서쪽을 향해 포장된 국도 36호선을 따라 약 1시간 정도 가면 불영계곡이 나온다. 불영계곡을 따라 계속 가면 불영사가 있고, 다시 불영사에서 10여 분 정도 가면 세덕산 아래의 금강송면 새터마을에 이른다. 새터마을에서 남쪽으로 개설된 비포장의 임도를 따라 16㎞ 정도 가면 톱거리에 이른다. 이 고개를 넘어금강송면 멀리 임광터·병위·속사 등의 마을이 왕피천을 옆에 두고 산기슭에 무리지어 모여 있다. 이 마을들은 왕피리 성지와 관련된 옛 마을터에 최근에 다시 형성된 마을이다.

이 일대가 구전되고 있는 왕피리 성지이다. 이 일대에 있는 마을 이름은 병위[군사들의 병영]·포전[취장(炊場)]·거리고[군량고]·한천[음료수] 등으로 모두 군사와 관련되어 있다. 이 마을들은 개간 등에 의해 옛 모습은 찾을 수 없고, 다만 구전으로만 그 전설을 간직한 채 전해올 뿐이다.

톱거리에서 남쪽으로 난 산로를 따라 고개를 넘으면 왕피초등학교가 있는 거리에 이른다. 이 일대에서 왕피리 성지의 흔적을 다소나마 확인할 수 있다. 왕피초등학교 북쪽의 산기슭에는 김재희 정효각(金在禧 旌孝閣)이 있다. 정효각은 1803년에 건립되었으며, 단칸의 맞배지붕 와가이다. 이 정효각 북쪽에 동서로 길게 뻗은 구릉이 있고, 이 구릉 너머에는 왕피천이 흐르는 깎아지른 듯한 계곡이 있다. 왕피리 성지는 정효각 북쪽의 구릉성 산지 척추부를 따라가며 일부 남아 있다.

왕피리 성지가 위치한 곳의 지형은 북쪽의 토석 혼축 성벽 너머에 절벽이 있으며, 그 절벽 아래로는 왕피천이 흐르고 있다. 성의 동서로는 자연적으로 돌출한 구릉성 산지가 성과 연이어져 자연 방책을 만들고 있으며, 성 안은 매우 평탄하여 진(陣)을 치고 한동안 경작을 할 수 있는 비옥한 토지가 있다. 주 출입구는 성 안 마을의 서남쪽에 있다.

[현황]

성벽은 토석 혼축으로 성의 상면 폭은 3.8m, 높이는 약 2~2.5m이나, 대부분 망실되어 총길이 약 330m 가운데 약 60m 정도만 남아 있다. 이마저도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으면 토루(土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을 만큼 잔존 상태가 극히 불량하다. 성벽 상면에서 성 안을 바라보면 양팔로 감싸 안은 듯한 형상의 아늑한 지형을 이루고 있어 한눈에 군사적인 방어지 또는 피난처로 최적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왕피리 성지는 그 부근의 마을 이름들에서 왕의 피난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성지는 톱거리 일대에서 적을 일단 차단하거나 기습할 수 있는 최적의 방어 요새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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