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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송만호진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800498
한자 越松萬戶鎭址
영어의미역 Wolsong Fort of Joseon Navy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터
지역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 303-5[월송정로 400-67]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희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군사 유적 터
소재지 주소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 303-5[월송정로 400-67]지도보기

[정의]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에 있는 조선시대 수군 병영진지.

[변천]

월송포진은 문헌 사료에 "평해군의 동(북) 7리의 거리에 돌로 만든 수군 진이 있었다. 높이는 6(7)척, 둘레는 628(489)척이다. 만호(萬戶) 1인과 수군 400명 정도가 주둔하였는데, 전선(戰船)은 없고 바다쪽의 왜구를 막기 위함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만호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무관직(武官職)의 하나이다. 만호는 본래 그가 통솔하여 다스리는 민호(民戶)의 수에 따라 만호·천호(千戶)·백호(百戶) 등으로 불렸으나, 차차 민호의 수와 관계 없이 진장(鎭將)의 품계와 직책 등으로 변하였다. 원나라의 제도에서 유래한 것으로 육군보다는 수군에 그 명칭이 남아 있었다.

고려 충렬왕 때 포도(捕盜)와 금란(禁亂)을 맡아보던 순군만호부에 도만호(都萬戶)·만호·부만호(副萬戶) 등의 관직을 두었는데, 이들은 순군부(巡軍府)의 우두머리로 순군을 통할하였다. 한편, 지방은 고종 때부터 왜구의 침범이 잦아지는 상황에서 원나라와 함께 일본 정벌을 목적으로 합포[지금의 마산]와 전라도 두 지역에 만호부를 두어 만호와 천호 등으로 통솔하게 한 것이 처음이다. 그러나 일본 원정이 실패한 후에도 탐라와 서경 등을 비롯한 외적의 침입이 예상되는 연해와 해도 지역에 만호부를 설치하여 만호가 지휘·감독하게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각 도별로 수군절제사에 의해 기선군[수군]이 통할되고, 영·진체제가 갖춰지면서 각 도의 요새수어처(要塞守禦處)별로 군사 조직이 편성됨에 따라 고려시대 이래로 두어온 만호에게 외침 방어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또한 북방족 등을 무마하기 위해 야인들에게 명예직으로서 만호직을 수여하여 각종 혜택을 주는 경우도 많았다. 초기의 만호는 3품관이었으며, 부만호는 4품관이었다. 그러나 1458년(세조 4)에 영·진체제가 진관체제로 바뀌면서 각 도 연해안의 요해처나 북방 내륙의 제진(諸鎭)에 동첨절제사·만호·절제도위 등을 두어 그 진을 다스리게 하였다.

동첨절제사와 절제도위 등은 대개 독진(獨鎭)이 아닌 경우에는 지방 수령이 겸했으나, 만호만은 무장이 별도로 파견되어 사실상 일선 요해처의 전담 무장이 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법제화된 만호를 보면 경기도에 수군만호 5인을 비롯하여 충청도 3인, 경상도 19인, 전라도 15인, 황해도 6인, 강원도 4인, 평안도[함경도] 3인과 평안도에 병마만호(兵馬萬戶) 4인이 있었다. 그 뒤 만호의 수는 제도의 변천 등으로 증감이 이루어졌다.

만호의 임기는 진에 가족을 데려가지 않는 경우 900일이었으며, 대개 무예를 시험하여 임명하되, 무과 합격자나 겸사복(兼司僕), 내금위(內禁衛)는 시험과 관계 없이 임명되었다. 만호를 거친 자는 수령을 거치지 않아도 품계를 올려주었다. 지방 일선의 요해처에 배치되었던 만호제는 뒤에 진관체제가 무너지면서 여러 가지 폐단을 야기하였다.

[위치]

평해읍에서 국도 7호선을 따라 북쪽으로 약 2㎞ 가면 월송리 달효(達孝)마을이 있다. 달효마을 동쪽으로 개설된 포장된 소로를 따라 가면 월송리 솔머리마을의 동쪽 얕은 구릉지대에 있는 월송정마을의 신혼예식장이 있다. 월송만호진지는 이 신혼예식장 일대에 위치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월송진에서 동쪽 해안까지는 불과 500m 미만의 거리이며, 평해읍성은 남쪽으로 2㎞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다. 지금은 예식장 건물이 월송만호진지의 대부분에 자리해 있고, 성벽 바깥으로는 3채의 민가가 성벽에 붙어 있어 원래의 형태를 알 수 없다.

[현황]

성벽은 20년 전 신혼예식장을 신축할 때 대부분 유실되었으나, 현재 예식장의 식당 동쪽에 일부가 남아 있다. 성벽은 매우 잘 다듬은 돌로 쌓은 4~5단이 남아 있다. 장방형의 석재 한 변의 길이는 80㎝ 전후이며, 높이는 50㎝ 전후이다. 성벽은 협축법으로 축조했으며, 상면 폭 2m, 잔존 높이 1.8m이다.

현존하는 성벽의 길이가 불과 30m밖에 되지 않아 전체적인 모습을 알 수 없다. 예식장의 서쪽에 연접하여 원래의 월송정이 자리하고 있었으나, 현재 월송정은 해변에 가까운 362-6번지[임]로 옮겼다. 성지 내외에서 특기할 만한 유물은 채집되지 않았다.

[의의와 평가]

마을 주민에 의하면 30년 전만 하더라도 성 안에는 5가구가 살고 있었고, ‘월송만호’라는 현판을 단 매우 오래된 건물이 303-9번지에 있었다고 한다. 성은 매우 튼튼한 돌로 높게 쌓여 있었고, 출입구는 남쪽으로 난 성문으로 613-9번지 일대였으며, 성문 위에도 기와집이 있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성 앞까지 물이 들어왔고, 성의 동남쪽에 연접하여 큰 호수가 있었으며, 성 앞을 지나는 제방의 강 물줄기는 곧바로 바다로 연결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주민의 기억을 토대로 월송만호진의 옛 모습을 재현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 여겨진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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