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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801717
한자 -城隍祠
영어의미역 Village Guardian Shrine in Saetjae Pass
이칭/별칭 조령 성황사,조치 성황당,조령 성황당,조령 성황재사
분야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민간 신앙 유적
지역 경상북도 울진군 금강송면 소광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도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성황사
건립시기/연도 1868년 이전연표보기
소재지 주소 경상북도 울진군 금강송면 소광리

[정의]

경상북도 울진군 금강송면 소광리 샛재에 있는 조선 후기에 지어진 성황사.

[개설]

샛재 성황사샛재 바로 아래에 있는 성황사로서 처음에는 부상(負商)들이,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선질꾼들이 십이령을 오가며 장사를 할 때 이들이 주도하여 제물을 준비하여 제를 지냈으며, 선질꾼들이 사라진 이후에는 빛내마을에서 제당을 관리하고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 샛재 성황사 내에 걸려 있는 중수기나 성금 방명록 등을 종합해 보면 샛재 성황사는 조령 성황사·조령 성황당·조령 성황재사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1967년 문화재관리국에서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조치(鳥峙) 성황당(城隍堂)으로도 불렸다.

현재 샛재 성황사 내에 보관된 현판을 중심으로 연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조령성황사중수기(鳥嶺城隍祠重修記)」에 따르면, 샛재 성황사는 1868년(고종 5)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처음 만들어진 것은 1868년 이전임을 알 수 있다. 행상임소(行商任所)·반수(班首)·접장(接長)·도감(都監)·본방공원(本房公員)·문서공원(文書公員)·별공원(別公員)·도집사(都執事)라는 직책이 있었다는 사실로 볼 때 십이령을 넘나들며 봉화와 울진의 장시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보부상단이 샛재 성황사 중수를 주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목수와 함께 ‘화공(畵工) 황순기(黃順基)’가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중수하면서 당신도(堂神圖)를 그려 봉안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령성황사개와시(鳥嶺城隍祠蓋瓦時)」[1878]에 따르면, 반수·접장·반수공원·본방공원·문서공원·성주도감·도집사·도공원·별공원·별임(別任)·장재(掌財)·수전유사(收錢有司)·칠읍도공원(七邑都公員)·도집사·대방(大房)·비방(俾房)이라는 직책이 나타나고 있어 이전보다 체계적인 조직을 갖춘 보부상단이 주도하여 개와(蓋瓦) 공사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1888년(고종 25)에 성황사를 중수하였는데, 이를 기록한 현판에는 중수에 참여한 보부상단의 직책과 명단이 기재되어 있다. 반수·접장·전함(前啣)·본방·도공원·성주도감·서기·유사(有司)와 함께 본소(本所) 및 삼장시(三場市) 소속 간부들이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1894년에 성황당 당신도를 바꾸었는데, 이를 기록한 현판에 따르면 화공 이치윤(李致潤)이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보부상단의 조직과 관련한 각종 직책과 이름이 열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도 샛재 성황사를 중심으로 울진·봉화 지역 보부상단의 활동이 매우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십이령(十二嶺)’이라는 표기 하에 9명의 명단을 기재하였다는 것이다. 주막을 운영하던 사람들인지 각 고갯마루마다 책임자를 배치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다른 지역과 비교된다. ‘동몽(童蒙)’이라 표기한 후 5명의 명단을 적었는데, 이들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조직원들이다.

1895년이나 그 이전 음력 10월 상순에 중수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조령이 십이령 중 제일 명산인데, 성황사 사우가 퇴락하여 매우 안타까이 여겨 새롭게 고치려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에 참여한 목수와 각수(刻手) 외 100명의 명단이 적혀 있다. 1916년 4월 20일에 샛재 성황사를 중수하였는데, ‘전공사원(前公事員)’·‘전장무원(前掌務員)’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이외의 직책 명칭이 없는 것으로 보아 보부상단이 해체된 이후에 성황사를 중수하였음을 알 수 있고, 중수와 관련한 총 66명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현판에 기록된 김진호(金震浩)라는 인물이 ‘재소중수발기인(齋所重修發起人)’[1919년 4월 21일 제작] 첫줄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1916~1919년 사이에 조령 성황 보호금을 모았음을 알 수 있다.

1919년 재소중수발기인 모임이 있어 성금을 모았는데, 재소중수발기인으로 총 45명의 명단이 기재되어 있다. 1935년 4월 20일에 샛재 성황사를 중수하였는데, 성황사 내에는 성금을 기부한 사람들을 기록한 현판이 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일본인 이름을 지닌 사람 1명이 기부자 명단에 있다는 사실과 여성들이 주무와 기부자 명단에 두루 등장하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이다. 중수를 주관한 간부를 ‘주무(主務)’라 하였으며 성금을 낸 사람은 총 121명이다. 이 현판에 ‘조령성황재사(鳥嶺城隍齋舍)’라 표현한 것으로 보아 샛재 성황사를 보부상단에 참여하였던 선조들을 기리는 장소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48년 성황당을 중수하였는데, 성금을 기부한 사람들을 기록한 현판이 있다. 여기에 기록된 주무 최순여(崔順汝)와 김춘화(金春化)는 『조령성황재사중수시기부인방명록(鳥嶺城隍齋舍重修峕寄附人芳名錄)』[1935]에도 등장하는 인물이다. 1961년에 중수하였는데, 주도한 간부들의 직책이 주무와 유사임을 알 수 있고, 주무와 기증자를 중심으로 그 명단을 기재한 현판이 있다.

1962년에 조령성황사영정(鳥嶺城隍祠影幀)을 봉안하였다. 당시의 샛재 성황사의 당신도 봉안을 주도한 주무·유사와 함께 영정을 그린 화사 이택룡(李澤龍), 성금을 낸 사람들의 명단을 적은 현판이 있다. 현재 샛재 성황사 건물 내에 1983년 중수하는 과정에서 쓴 상량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현재의 건물은 1983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치]

샛재 성황사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흥부역과 경상북도 봉화군을 연결하는 십이령샛재에 있다.

[형태]

샛재 성황사는 지붕은 기와를 엊은 맞배지붕으로 홑처마에 정면 1칸 측면 1칸의 제당이다. 정면 입구에는 ‘조령성황사(鳥嶺城隍祠)’라 쓴 편액을 걸었으며, 성황사 내부의 제단 정면에는 ‘조령성황신위(鳥嶺城隍神位)’라 쓴 위패를 모셔 두었다.

[현황]

신목으로는 제당 동쪽에 있는 높이 20m의 들미나무가 있고, 제당 둘레에는 파손된 기와와 돌로 나지막한 돌담을 쌓았다. 제당에서 찬물내기로 넘어가는 고갯마루 아래에 보부상이나 선질꾼들이 지나며 돌을 던져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돌무지가 남아 있다. 인근의 안일왕 산성과 관련하여 아밀왕이 성을 쌓기 위해 돌을 나르던 곳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제당 주변에 1842년에 세운 ‘이광전영세불망비(李光筌永世不忘碑)’가 세워져 있다. 샛재 성황사와 함께 이 불망비는 샛재가 주요 교통로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제사는 1년 중 봄과 가을에 지냈으며, 연장자를 제관으로 선정하였으며, 제비(祭費)는 위답(位畓)에서 부담하였다고 한다. 준비한 제수는 술·메·백설기·소고기·과실이었으며, 고사를 지낸 후 별신굿을 하였다고 한다. 두천리 주민들에 의하면 샛재 서낭당에서 3년에 1번 정도 10월경에 좋은 날을 받아 굿을 하였는데, 소요되는 경비는 위답(位畓)을 경작하는 사람에게 소작료를 받아서 모으고, 찬조도 받아서 하였는데, 하루 굿을 하였고, 무당 3~4명이 와서 진행하였다고 한다.

굿을 하면 인근의 빛내·장평·홈교·소광2리·찬물내기·소광1리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굿을 보러 왔으며, 선질꾼들은 여유 시간이 있으면 보고 갔으며, 일부는 시주를 하였다고 한다. 선질꾼들이 더 이상 십이령을 다니지 않으면서 샛재 성황사 운영은 인근 마을인 소광1리소광2리, 소광3리가 함께 지냈고, 이때 장평과 찬물내기에 거주하는 주민들도 참여하였다. 30여 년 전에 더 이상 인근 마을 모두가 유지하기 어려워 소광3리의 빛내마을에 넘겨주었다. 원래 빛내마을 서낭당이 있었으나 샛재 서낭당을 큰서낭으로 모셨는데, 지금은 빛내 서낭당은 없고 샛재 성황사 운영 또한 마을에서 더 이상 관여하지 않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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