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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801730
한자 張末翼神道碑
영어의미역 Spirit-path of Jang Malik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유적/비
지역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고성리 708[고성3길 31-68]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최인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건립시기/일시 1984년 3월연표보기
관련인물 장말익(張末翼)
재질 화강암
높이 257㎝
너비 68㎝
소재지 주소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고성리 708[고성3길 31-68] 월계서원지도보기
소유자 울진장씨 종중

[정의]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고성리 월계서원에 있는 장말익의 비.

[개설]

장말익(張末翼) 신도비장양수의 신도비와 함께 월계서원에 세워져 있다. 장말익(張末翼)의 호는 매계(梅溪)이며, 시호는 문성(文成), 본관은 울진이다. 1036년(정종 2)에 울진읍 고성리에 입향한 것으로 전한다. 장말익은 고려 정종(靖宗) 때 태어나 문과에 급제하였고, 벼슬이 호부상서문하시중평장사상주국(戶部尙書門下侍中平章事上柱國)에 이르렀으며, 울진부원군(蔚珍府院君)에 봉해졌다. 자손들이 이로 인해 울진을 본관으로 삼아 관시조(貫始祖)로 모셨다.

장말익은 울진에서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어 신망을 받았고, 삭방도(朔方道)[고려 때의 강원도] 안렴사(按廉使)로 있을 때, 울진군 읍성인 산내성(山內城)의 성내 지형이 좁아 성을 넓히고 성벽을 높이 쌓았다. 한편 여러 차례의 병란으로 장말익의 사적이 인멸되어 묘소조차 찾지 못하게 되자 후손들이 1774년 울진읍 고성리 남쪽 기슭 경좌(庚坐)에 제단을 설치하여, 매년 3월 3일 제사를 지냈고, 월계서원에 배향하였다.

[건립경위]

장말익 신도비는 많은 공적을 남긴 장말익의 행적을 문헌으로 고증할 수 없고, 심지어 묘소와 배위(配位)의 성씨(姓氏)마저 알 수 없게 되자 후손들이 이를 애석하게 여겨 제단을 축조하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1984년에 월계서원에 있는 장말익 신도비의 비문을 짓고, 이듬해인 1984년 3월에 비를 건립하였다.

[형태]

비석은 화강암으로 제작하였으며, 귀부와 이수, 비신을 갖추고 있다. 둘레는 철제 난간을 둘렀다. 비석의 높이는 257㎝, 너비는 68㎝이다.

[금석문]

비석의 전면에 세로 2줄로 ‘고려호부상서문하시중평장사상주국봉울진부원군문성공매계장선생신도비(高麗戶部尙書門下侍中平章事上柱國奉蔚珍府院君文成公梅溪張先生神道碑)’를 새겼고, 뒷면에 비문과 명(銘) 및 명(銘)의 해석문을 새겨넣었다. 비문은 외후손인 영양인 이용구(李龍九)가 지었다.

“그 옛날 왕씨가 나라를 일으켜 세울 때 태사 장공(張公) 휘 정필(貞弼)은 고창군 사람으로 김공(金公) 선평(宣平) 권공(權公) 행(幸) 등으로 더불어 고려 태조(太祖)를 도와 견훤(甄萱)을 토평(討平)했다. 이 공으로 태사 삼한벽상공신(太師 三韓壁上功臣)에 봉해져서 현재까지 안동삼태사묘(安東三太師廟)와 월계서원 사당에 모셔서 제사를 모시고 있으니 세상에서 이른바 삼태사(三太師) 가운데 한 분이다.

3대를 내려와서 휘 지현(之賢)은 호를 송계(松溪)라고 하며 벼슬은 평장사에 이르렀다. 지현공(之賢公)이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공은 막내이다. 휘는 말익(末翼)이요 호를 매계(梅溪)라고 하는데 정종(靖宗)조에 태어나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평장사 상주국(平章事 上柱國)에 이르렀고 울진군(蔚珍君)에 봉해져서 문성공(文成公)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삼가 고찰해 보니 공이 울진군으로서 채읍(采邑)하고 있을 때 청렴결백하게 지방 사람들을 보살펴 다스리고 은혜가 골고루 돌아갔기에 온 고을 사람들이 교화되어 자손들이 관향으로 삼았다고 했다. 천일(天鎰)이란 아들이 있었는데 문과에 급제하여 숭록추밀직학사(崇祿樞密直學士)에 이르렀으며 휘 원흡(元洽)을 낳았다.

원흡(元洽)은 벼슬이 병부상서 문하시중에까지 올랐으며 휘 취정(就正)을 낳았으니 호부상서를 지냈고 둘째 아들 균정(均正)은 상호군 벼슬을 지냈다. 취정의 아들 영의(令宜)는 영동정판문하성사(令同正判門下省事)를 지냈으며 다음 아들 존려(存呂)는 좌군병마사 동지추밀원사를 지냈고 그 아래로 벼슬에 현달한 자손이 많으나 다 적지 못한다.

아! 공이 살던 시대가 너무 오래되어 많은 공적과 위대한 면모가 역사에 빛을 전해야 마땅할 것인데 문헌으로 고증할 수 없고 심지어는 묘소와 배위(配位)의 성씨(姓氏)마저 전해 오지 않아서 제사를 모시지 못한 지가 여러 세대가 흘렀다. 후손 여러분이 군(郡) 서쪽 가원(佳原) 남록(南麓)에 단을 만들고 제사를 드리고 있으며, 사림들이 월계(月溪)에 서원을 세워 판서공(判書公)도 같이 배향하여 제사를 드렸다.

지금 또다시 그 옆에 신도비를 세우고 후손 영진(永震), 형중(亨重), 현석(鉉石), 상록(相錄)으로 하여금 화성동(花城洞) 나의 집으로 찾아와서 신도비문을 지어달라고 한다. 늙고 글재주도 없어 감히 허락할 수 없어 거절했으나 그들의 간청에 이기지 못하여서 원본을 참고하여 위와 같이 간단히 적고 명(銘)을 지어 붙인다.

빛나는 선생이여 산악(山嶽) 같은 기상으로/ 밝은 세상 만나서 가장 높은 벼슬 올라/ 울진군(蔚珍君) 혁혁한 공 아직도 사람들 칭송하네 / 지난 자취 구름처럼 흩어져 변천무상 어이하리/ 자손들은 백세토록 수없이 뻗어져/ 증손지손들은 할 것 없이 동기처럼 정 두터워/ 단을 모아 제사 모시고 원(院)을 지어 향사치네/ 신도비 없어질까 자손도리 번쩍이니/ 내 여기 명(銘)을 지어 끝없이 전해가리.

1983년 계해(癸亥) 모춘(暮春) 외예영양후인(外裔永陽後人) 이용구(李龍九) 근찬(謹撰) 인주(仁州) 장병훈(張炳壎) 근서.”

[현황]

울진장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는데, 비교적 최근에 건립되어 보존 상태가 매우 좋다.

[의의와 평가]

울진장씨 울진 입향조로서의 지위와 함께 고려시대 인물에 대한 자료가 부족한 현실에서 인물 자료의 정리와 함께 보존을 꾀하고 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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