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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굴이 있던 옛 집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8C030301
지역 경상북도 울진군 서면 소광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여수경

화전민촌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산골에서 태어난 최순호는 1968년 공비사건으로 화전촌으로 함께 집단 이주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봄이 되면 화전을 만들고 그곳에서 한해의 농사를 지었다. 감자와 옥수수, 콩 등이 주식이었지만, 비교적 좋은 땅에서는 쌀농사도 지었다. 화전민가들은 다른 마을과는 떨어져 생활하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쌀을 생산하지 않으며 평생 쌀을 구경하기가 힘들다. 이로 인해 몇 화전민가에서는 좋은 땅에는 쌀농사를 짓기도 하는데, 최순호의 집안도 화전으로 일군 땅 중 가장 좋은 것을 선별하여 이곳에 쌀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화전의 위치상 물이 부족하기 때문에 쌀농사는 그렇게 많이 짓지 못한다. 밭농사가 대부분이었으며, 자라나면서 쌀밥은 구경하기 힘든 것이었다. 주식으로 먹는 것은 대부분 옥수수와 감자였다. 옥수수와 감자도 배불리 먹는 것은 어려웠다. 늘 먹을 것은 부족하였지만 굶거나 힘든 생활은 아니었다. 풍족하게 먹지 못할 뿐 생활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산골생활은 나름대로 자연에 순응하면서 생활을 이끌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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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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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호

너무 어려 화전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최순호에게도 생각나는 것은 코굴이 있는 집이었다. 두 개의 방으로 이루어졌던 방에는 하나는 부모님 하나는 8남매가 함께 생활하던 곳이었다. 방의 구석에는 코굴이 자리 잡는데, 이는 방의 불을 밝히는 용도로 사용된다. 방의 한 구석에 흙을 빚어 코 모양의 연통을 만들어 연기를 밖으로 배출하고 연통의 아랫부분에 널찍한 돌을 얹어 고정하고 그 위에 솔갱이(솔가지)를 말린 것을 가늘게 쪼개어 불을 지키면 밤에 불을 밝힐 수 있는 기능이 있다. 뿐만 아니라 추운 겨울에는 온도를 높이는 기능도 있어 벽난로 겸 전등의 역할을 겸하는 것이 코굴이다. 그 모양이 코처럼 생긴 굴이라고 하여 코굴이라 부른다.

정부가 친절하게도 똑같이 만들어 준 집에는 코굴이 없었다. 이곳에서는 호롱불과 남폿불로 불을 밝혔으며, 이곳에서 8남매와 부모님 총 10식구가 함께 생활하였다. 처음 화전민촌에 왔을 때 호롱불과 남폿불이 신기하였다. 코굴은 온도를 높이고 불을 밝히는 기능이 있었지만 방안에서 연기가 나고 불을 피워야 하는 점에서 불편하였다. 이것에 반해 호롱불은 비교적 안전하면서 편리한 것이었다. 그때는 그 신기한 호롱불과 남폿불이 정말 편리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코굴보다는 좋았지만 코굴이 더 멋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1980년대까지 불을 밝히는 데 호롱불과 남폿불이 사용되었고, 경제력이 되는 집에서는 촛불을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전기는 상상도 구경도 못한 시절이었다. 그가 전기를 처음 구경한 것은 중학교를 다니기 위해서 면소재지인 삼근리로 가면서이다. 이곳에서 처음 전기라는 것으로 보게 되면서, 코굴도 호롱불도 남폿불도 아닌 전기로도 불을 밝힐 수 있음을 처음 알았다. 화전민촌에 전기가 들어온 것은 그로부터 한참 더 있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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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굴

공비사건이 터졌을 때 군인들이 마을로 들어왔었다. 당시 가을에 콩 추수를 하고 있었는데, 사실 우리들은 공비사건에 터졌는지도 모르고 생활하였다. 갑작스럽게 군인들이 마을로 들어오고 총소리가 들리고, 부녀자들과 노인, 아이들은 모두 집안으로 피하고 남자들은 집밖에서 보초를 섰다. 군인들은 가끔 마을에 있는 무를 모두 뽑아먹고 마을 사람들에게 공비들이 어디 갔는지를 물어보기도 하였다. 그때는 모두 다 이렇게 해서 죽는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몇 달을 무장공비들을 소통하기 위한 총소리가 산에서 울렸고, 밖에서 다니는 것을 부모님이 못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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