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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여일 신도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801733
한자 黃汝一神道碑
영어의미역 Spirit-path of Hwang Yeoil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유적/비
지역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사동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최인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건립시기/일시 1997년연표보기
관련인물 황여일
재질 화강암
높이 307㎝
너비 68㎝
소재지 주소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사동리 지도보기

[정의]

1997년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사동리에 건립된 해월 황여일의 신도비.

[건립경위]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임진왜란의 국난을 극복하는데 이바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명외교에도 큰 몫을 한 해월 황여일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기고 기리고자 후손들이 신도비를 건립하였다.

[위치]

해월 황여일의 생가가 있는 기성면 사동리 마을 입구 좌측의 조그만 언덕에 위치한다. 국도 7호선에서 해월헌 표지판을 바라보고 오른쪽 일방통행 도로를 따라 약 50m 지점 좌측 편 언덕에 있다. 동남쪽에는 사동초등학교사동항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기성망양해수욕장이 자리하고 있다.

[형태]

화강암으로 제작한 기단과 비좌, 비신, 이수를 갖추고 있는데 2단의 기단 위에 비좌를 두고 비신을 고정했으며, 이수에는 용을 부조하였다. 기단은 높이 50㎝, 폭 35㎝이고, 비석의 높이는 비 257㎝, 너비 68㎝이다. 황여일 신도비 주변은 철근을 용접하여 울타리를 세웠는데 앞면만 트여 있다.

[금석문]

비신의 전면에는 “통정대부공조참의증가선대부이조참판해월황선생신도비(通政大夫工曹參議贈嘉善大夫吏曹參判海月黃先生神道碑)”라고 새겨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명(明)나라 만력(萬曆) 26년은 우리 선조(宣祖) 무술년으로 모함을 바르게 변명하는 변무사가 명나라로 가야되는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래서 조정에서 의논하였으나 적합한 인물을 찾기가 어려웠는데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을 진주정사(陳奏正使)로, 월사(月沙) 이정구(李庭龜)를 부사로,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정하니 당시의 중망(重望)이 세분 선생에게 맡겨지게 되니 국가의 안위가 달려있게 되었다.

백사 이공(李公)이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동행한 월사해월은 모두 문장으로 소문이 높았었는데 실지(實地)에서 나로서는 도저히 따르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아! 해월 선생은 두 분과는 도의(道義)의 교분으로 국사에 올라있고 사림(士林)들이 전하고 있으며 사람들의 이목에 밝게 알려져 있는데도 아직까지 신도비를 세우지 못하고 있더니 사손(祀孫) 면구(冕九)가 사종질(四從姪) 정(瀞)과 함께 천리 길을 찾아와 나에게 새길 글을 청하니 내가 공손하게 대답하기를 나는 백사의 후손인데 우리 집에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공(公)의 신도비명을 오천(梧川) 이상공(李相公)에게 청하려 했으나 미루다가 백년 뒤에 다시 나에게 당부하여 하게 하니 면구는 지금에야 선대(先代)의 뜻을 이루는 셈이고 또 다시 세의(世誼)를 다지고저 함이지만 나로서 본다면 글을 제대로 할줄 모르는 내가 감히 공의 업적을 잘 묘사하는데 적당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으리요. 그러나 공의 자손을 만나고 보니 도저히 사양만 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행장을 살펴보니 공의 휘(諱)는 여일(汝一)이요 자는 회원(會元)이며 해월은 그의 호이다. 기성황씨(箕城黃氏)는 대대로 비망족(望族)인바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첨의평리(僉議評理)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시(諡)는 충절(忠節)이요, 휘는 서(瑞)인데 익대원훈(翼戴元勳)이 되어 현(縣)을 군(郡)으로 승격하였으니 상조(上祖)이시고 휘 종량(宗亮)은 호부전서(戶部典書)요, 휘 용기(龍起)는 내자소윤(內資少尹)이요, 조선시대에 와서 휘 유보(有甫)는 중랑장(中郞將)인데 휘 후(厚)를 생하니 예빈시판관(禮賓寺判官)이요, 휘 옥숭(玉崇)을 생하니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이니 판관이 곧 공의 고조이다. 증조의 휘는 보곤(輔坤)이니 성균생원(成均生員)이요, 조의 휘는 우(瑀)니 성주목사(星州牧使)요, 고의 휘는 응징(應澄)이니 호는 창주(滄洲)요 장예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이며, 비(妣)는 숙부인(淑夫人) 영덕정씨(盈德鄭氏)니 충무위사직(忠武衛司直)인 창국(昌國)의 따님이요 성균사성(成均司成)인 자함(自咸)의 증손이다.

가정(嘉靖) 병진은 우리 명종(明宗) 11년인데 공이 평해군 사동리(沙銅里)에서 태어나시니 아버지 창주공(滄洲公)의 관후함을 닮았다. 어려서부터 영오(穎悟)하였고 조금 커서는 중부(仲父)이신 대해공(大海公)에게 수학하여 듣기만 하면 외우고 말만하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나이 겨우 열살에 문리(文理)와 문장이 날로 높아져서 부실한 끼니에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였기에 열세살에 경사(經史)를 모두 독파하였다.

선조(宣祖) 기사(己巳)에 간성향시(杆城鄕試)에 응시하여 제일을 차지하였는데 돌아오는 길에 죽서루(竹西樓)에 올라가 시 한수를 지으니 ‘어젯밤 은하수 신선쪽배 나렸는데 삼척땅 취한 객이 흥이 절로 나는구나. 나혼자 죽서루에 올라 아무도 없는데 옥피리 길게 불며 능파를 향한다네(銀河昨夜下靈⏟ 醉入眞珠興漸多 獨上竹樓人不見 還吹玉⏟向凌波)’라 하였다. 당시 양봉래(楊蓬萊) 사언(士彦)이 삼척부사로 있었는데 이 시를 보고 깜짝 놀라 불러 맞이하여 말을 걸어보고 대단히 귀중하게 생각하였고 조운강(趙雲江) 원(瑗)이 그 운을 따라 시를 지으면서 만나보지 못한 아쉬움을 나타내 보였다.

열일곱 되는 해[임신]에 수진사(修眞寺)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3년을 문밖에 나오지 아니하였으니 후에 차오산(車五山)이 공에게 시를 주었는데 ‘평생을 시전삼백편(詩傳三百篇)에 입술이 닳았다’라는 구절이 있다.

공이 20세 을해에 시전과 서전을 손수 써서 토를 달아놓고 시서아사(詩書亞師)라 이름하였다. 송대(宋代) 유현(儒賢)들의 학설에 더욱 치력하여 자세히 연구하기를 생각하니 구봉(龜峯) 김공(金公)이 한번에 영재임을 알아보고 딸을 주어 사위가 되었다. 처가에 머물고 있을 때 마침 안동(安東)에서 도시(道試)가 있기에 뒤늦게 참가하여 장원을 하였으니 문집 중에 치술령부(⏟述嶺賦)가 바로 그것인 바 석천(石泉) 권공(權公)이 그 글을 보고 찬탄하기를 맥맥히 문장가의 유향이 보인다 하였다. 그해 가을에 관동감시(關東監試)에서 수괴를 차지하였으며 이듬해 22세 정축에 진사 복시(進士覆試)에 합격하고 다음해(정축)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차오산(車五山) 임백호(林白湖) 등과 더불어 같이 공부하게 되었다. 10월에는 사인(舍人)들만 모이는 자리에 참석하니 원래 사인을 거치지 못한 사람은 참석치 못하게 되어있는 자리인데도 공이 평상복으로 참석하였다는 것은 그 당시 시문의 명망이 높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공이 28세인 계미에 학봉(鶴峯)선생을 찾아 뵙고 『근사록(近思錄)』의 강의를 들었는데 이때부터 성리학(性理學)을 연마하여 상당한 성취를 보였다. 이해 8월에 오현(五賢)을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하기를 청하는 상소에 찬성하였던 20여인이 처음에는 같이 하기로 굳게 약속하였으나 나중에는 흐지부지 꼬리를 감추려 하기에 홀로 의연하게 주장하며 말하기를 이같은 정도(正道)와 이같은 공론(公論)을 그렇게 미적미적 소극적으로 대처하면 조정에 나가나 사림에 있으나 무엇이 도움이 되겠는가 하고 드디어 소(疎)를 지어 상소하였고 학봉선생을 한강에서 전송하면서 우복(愚伏) 정공(鄭公)에게 말하기를 표연이 동해 바다를 밟고 싶다 하였으니 당시 학봉에게 쏟아지는 여론이 분분하여 곱지 않기 때문이였다.

다음해 갑신에 별시(別試)인 동당과(東堂科)에 수석을 차지하였고 다음해 을유에는 대책별시(對策別試)에 을과(乙科) 제일을 차지하여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에 발령받고 출사를 시작하니 집을 떠나면서 집사람에게 시를 지어 주어 「만리 푸른바다 백구의 몸으로 인간의 추잡한 세계로 잘못 들어가네(滄波萬里白鷗身 偶落人間滿目塵)」하였다. 다음해 병술에 휴가를 빌어 부모님을 찾아 뵙고 2월에는 구백담(具栢潭)을 찾아 뵈었으며 다시 백운정사(白雲精舍)를 찾아가 주자전서(朱子全書)를 강하였다.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조금 늦게 태어나서 퇴계(退溪) 문하에 가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이라 하더니 때마침 도산(陶山)에서 퇴계선생의 문집을 간행하기에 공이 그곳에 가서 편수에 힘을 다하였고 10월에는 예괴원(隸槐院)에서 임시로 부정자(副正字)를 맡아 보셨으며 11월에는 호당(湖堂)에 파견되어 근무하게 되었다. 정해에는 예문관 대교(待敎)에 발령되었고 무자년 어느날 밤에는 주상을 모시고 강(講)을 하시다가 말씀 올리기를 근자에 사림이 두 편으로 갈라져 있어서 국론이 안정되지 못하고 있으니 원하옵건데 화평(和平)정책을 쓰도록 하옵소서. 이러한 때 인재가 절실하게 필요하니 유성룡(柳成龍) 같은 인물은 경륜이 있는 사람이니 거두어 쓰심이 어떠하시올지 하였다. 8월에는 명을 받들고 태백산사고(太白山史庫)에 가서 책들을 거풍하고 돌아왔다. 10월에는 해월헌(海月軒)이 낙성을 하니 아계(鵝溪) 이공(李公)이 기문(記文)에 이르기를 군자의 마음이 바다와 달과 같이 광대고명하여 변함이 없는 것이니 군(君)이 해월(海月)로 이름한 것은 이미 작심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였다.

기축에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으로 부름을 받고 입조하였는데 8월에 왜놈들이 침략할 조짐이 있기에 정언신(鄭彦信), 이일(李鎰), 신립(申砬) 등을 따라 주상 앞에 나아가서 전쟁에 대비할 문제들을 논하였다. 그후 일본 사신 현소(玄蘇)가 와서 우리에게 통사(通使)할 것을 청하니 조정대신들이 허락하자는 쪽으로 의논이 정해져 가는데 공이 홀로 반론을 제기하면서 통사를 하여도 전쟁은 터지고 통사를 안하여도 전쟁은 날 것이니 차라리 통하지 않고 작게 당하는 것이 낫다 하였다.

학봉이 이 소문을 듣고 시를 지어 주었으니 ‘동해에 노연자 있어, 그 사람 또한 바른 말 하였네. 많은 사람이 진을 높이는데, 너 홀로 주나라 섬겼네. 변설로 삼군을 물리치니, 무기 아닌 석자 혀였지. 나의 일편심도 천추에 그대와 같다네.(東海有魯連 其人亦抗節 擧世欲宗秦 爾獨載周日 談笑却三軍 其機在寸說 我有一片心 千秋與君說)’하였다.

겨울에 사초(史草) 사건으로 파직되어 집에 돌아와서 주서절요(朱書節要)의 주(註)를 내시고 다음해 경인에 서용(敍用)으로 풀려나니 양사(兩司)에서 한결같이 고집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고 5월에 예문관봉교(藝文館奉敎)로 발령하면서 옛 직책을 모두 겸직하게 하고 운학대성(韻學大成)을 하사하였다. 공이 항상 점필재(佔畢齋)선생의 기절을 좋아하더니 점필재의 죽음을 원통하게 생각하여 지은 임백호(林白湖)의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에 발문(跋文)을 지었다. 그 내용이 당시로서는 모두 감추고 피하는 문건인데도 공이 분연히 발문을 하였다는 것은 공의 뜻이 강개함을 볼 수 있다 하겠다.

신묘에 다시 예문관봉교로 제수하고 특별히 경악관(經幄官)으로 초대하여 대학전서(大學全書)를 하사하였다. 임진에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머물게 하고 고산도찰방(高山道察訪)을 제수하였다. 4월에 왜적이 우리의 주군(州郡)을 연파(連破)하고 우리의 군대는 소문만 듣고도 무너져 도망한다는 소식을 듣고 관찰사(觀察使) 유영립(柳永立)에게 말하기를 미리 우리 병사들을 정비하여 부성(府城)을 방비하는 것이 좋다 하였으나 관찰사가 듣지 않고 있다가 왜병이 철령(鐵嶺)을 넘어온 후에야 후회막급으로 후퇴하여 간신히 한 곳만을 보전하고 있는데 또다시 토적(土賊)들이 작란을 하여 군량을 도적맞고 나서야 처음으로 공의 계책에 경복하였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이 달 29일에 주상께서 피난을 떠나시고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전하여 듣고 공이 통곡을 하면서 주상이 욕을 보면 신하된 자 죽는 길 밖에 없다 하고 말을 타고 서쪽을 향하여 달렸으나 길이 막혀서 갈 수가 없었다. 5월에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귀영(金貴榮)칠계부원군(漆溪府院君) 윤탁연(尹卓然)이 왕자를 모시고 북쪽으로 오다가 안변부(安邊府)에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공은 말을 달려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두 분을 만나 그간의 고초를 서로 위로하였다.

선전관(宣傳官) 이규문(李奎文)은 공과는 동갑인데 검찰사(檢察使) 이양원(李陽元)을 따라 관서(關西)로부터 와서 공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은 노부모가 모두 남쪽에 계시는데 서쪽으로 주상을 찾아가야 하지만 길이 막혀 있으니 배를 하나 구하여 곧장 남으로 가자고 하기에 공이 만류하면서 말하기를 불가하다 지금 같이 국가가 판탕(板蕩)되는 날에 마땅히 주상을 먼저 하고 부모가 다음인 것이니 나는 설한령(雪寒嶺)을 넘어 서쪽으로 주상을 찾아갈 것이라 하였더니 규문(奎文)이 억지를 부리기에 공이 울면서 말하기를 오늘 나의 길이 주상을 다행히 찾아뵙고 생명을 부지한다면 부모는 얼마든지 뵈올 수 있는 날이 있을 것이라 하였다.

6월에 왕자를 모시고 비를 맞으며 덕원부(德原府)로 향하는데 영흥부(永興府)에 도착하니 북쪽 오랑캐놈들이 삼수(三水)에서 난동을 한다기에 사상(使相) 윤공(尹公)이 공에게 묻기를 눈앞에 호(胡)와 왜(倭)가 함께 침노하여 배와 등으로 적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무슨 계책으로 대처하면 좋겠소 하니 공이 답하기를 모든 일에는 완급(緩急)을 알아서 선후를 정해야 하는 법 함흥(咸興)의 적은 심장의 병이요 삼수(三水)의 도적은 지엽적 근심이 라 하고 곧바로 초유문(招諭文)을 지어 사방의 관문(關門)의 관리들의 처소에 효유하였다. 때마침 국경인(鞠景人)이란 자가 왕자와 호종관(扈從官)들을 사로잡아 적에게 항복하였다. 공은 크게 통탄하고 원망하면서 의병 이성임(李聖任)에게 밀통하면서 때에 따라 계책을 세우고 회령(會寧) 유생 신세준(申世俊) 등께 장사를 규합하여 국경인과 연수(連守) 등을 죽이게 하였으니 당시 윤공은 유영립(柳永立)을 대신하여 신임 감사가 되어 있었다. 윤공이 처음부터 공을 잘 아는 터라 주상께 고하고 종사관(從事官)으로 추천하여 작전에 참모를 하게 하니 공이 소모문(召募文)을 사방으로 돌려 백성을 보호하고 적을 막는데 많은 공을 세우니 윤공이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였다.

토적 진대유(陳大猷)는 함흥의 건달배로 자기 딸을 두목에게 바치니 그 형세가 사뭇 감당하기 어려웠다. 공이 진(陳)을 잘 아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달래 보았으나 소용이 없기에 김수준(金秀俊) 등을 특공대로 파견하여 진을 잡아 사상부(使相府)로 압송하였다. 처음에 도사(都使) 박순남(朴順男)이 진(陳)의 아들 계수(桂樹)를 아장(亞將)으로 삼고 매우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공이 순남에게 말하기를 그 사람은 불순한 기미가 보이니 후에 반드시 좋지 못한 일이 있을 것이라 하였는데 지금 와서 그 말이 사실이 되자 공의 선견지명에 모두 감복하였다. 8월에 행재소(行在所)와 연락이 되어 공이 눈물로 글을 지어 병사들에게 보이니 모두 조금씩 안심하기 시작하였다. 10월에 사상(使相) 윤공(尹公)이 대군을 출동하고자 남루(南樓)에 올라가 군사를 조발하는데 공이 작전과 법령을 발표하니 모든 장군들이 명을 따르지 않는 자 없었다.

계사년에 의주(義州)의 행재소(行在所)에 당도하니 형조정랑(刑曹正郞)을 제수하였고 5월에 공으로 하여금 해서(海西)에서 황장목(黃腸木)을 감시하게 하니 주상께서 직접 명하신 것이다. 6월에 병조정랑에 옮겨지고 지제교춘추관기주관(知製敎春秋館記注官)을 겸하게 하였다. 7월에 근친(覲親)을 하고 8월에 행재소에 돌아와서 10월에 대가(大駕)를 모시고 서울에 입성하였다.

갑오에 다시 형조정랑이 되었고 3월에 독운사(督運使)에 차출되어 명나라 장수 이영춘(李榮春)과 같이 화전(火戰)의 비방(秘方)을 논하여 그 방법을 자세하게 터득한 후에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에게 보고하고 또 글을 올려 군량미 쌓아둔 곳에 방어하는 방법 등을 조목조목 논하니 분명하고 확실한 의논이었다. 8월에 다시 병조정랑에 발령되고 현재 직함을 모두 겸임하게 하였다. 9월에는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이 장계를 올려 말하기를 변방의 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어서 작전상황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기 때문에 문무를 겸비한 군사(軍師)가 필요로 하니 공을 종사관(從事官)으로 보내달라 요청하여 다음 해 을미에 진주(晉州)의 도원수 막하로 부임하였다. 공은 부임하는 즉시 갈점산성(葛岾山城)에 올라가 지형지물을 살펴보고 나서 작전을 의논하니 권 원수가 크게 칭찬하였다.

병신에 세자익위사사어(世子翊衛司司禦)에 제수하고 겨울에 다시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이 되었고 또 다시 권 원수 막하로 가서 작전을 도와 주었다. 12월에 명나라 장수 양경리(楊經理)와 마제독(麻提督) 등이 권 원수와 같이 합동으로 울산(蔚山)의 적을 토벌하는데 비바람이 몹시 춥고 눈까지 오고 있었다. 연합군이 진격하여 외채(外寨)를 탈환하니 적이 내성으로 도망가서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여러 무대가 성 밑에 나누어 진을 쳐서 성을 포위한지 십여 일이 되도록 적이 나오지 않았다. 공이 밤낮으로 맨발 맨손으로 고생하다 보니 수족이 모두 동상으로 얼어 터져도 조금도 쉬거나 풀어질 줄 몰랐다.

다음해 정유에 숭문원교리(崇文院校理)가 되었고 무술에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에 제수되었으나 어버이의 노환으로 사양하였고 다시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승진하여 세자시강필선(世子侍講院弼善)을 겸하였고 다시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로 장령을 겸임하고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으로 전보되었다. 그때 명나라 지원군 작전참모인 정응태(丁應泰)가 우리 주상을 본국에 무함하였는데 그 말이 너무 망칙하여 나라 안이 발칵 뒤집어졌다. 그리하여 조신을 극히 엄선하여 무고함을 밝히도록 명하자 공은 정부사(正副使)와 같이 밤을 도와 달려가서 다음해 기해 2월에 장계를 지어 올리고 4월에 복명을 하니 장악원정(掌樂院正)에 배하였고, 경자에는 집에 와서 있다가 의인왕후(懿仁王后)의 부고를 받고 군청(郡廳) 빈소에 가서 성복(成服)을 하였다. 신축에는 울진 박곡(朴谷)에 별장을 짓고 그 곳에서 글을 읽으니 그 마을 이름이 고박(古朴)함을 좋아해서였다. 다시 고을 사람들과 모임을 만들어 남전여씨(藍田呂氏)의 향약(鄕約)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가을에 예천(醴泉)군수로 발령되어 다음해 임인에 감사(監司)인 벽오(碧梧) 이공(李公)이 안동부 소속 수령들을 모아 잔치를 베푸니 공도 모당(慕堂) 홍공(洪公)과 같이 참석하여 모양을 그리고 계축(契軸)을 만들어 돌아왔다. 6월에 김부인(金夫人)의 상을 당하였다.

계묘년 봄에 벼슬을 버리고 집에 돌아와서 있다가 다음해 갑진에 이부인(李夫人)을 맞이하였고 금성(金城)현령에 발령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열성실록낭청(列聖實錄郎廳)으로 차출되어 갔다. 여름에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과 양유년(梁有年)이 나와서 문학이 훌륭한 대신들을 선발하여 한강에서 뱃놀이를 하는데 공도 참여하였고 얼마 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임명되었다가 조금 후에 사헌부장령으로 다시 발령되어 중학교수(中學敎授)를 겸하게 하였고 7월에 감시(監試)의 시관(試官)에 차출되어 동당시(東堂試)의 시관(試官)이 되었고 다시 복시의 시관도 되었다. 영천(永川)군수로 발령되니 토적(土賊)들이 부임해 온 다는 소문을 듣고 사방으로 달아나서 치적이 훌륭하였다. 정미에는 포은(圃隱)선생의 문집을 임고서원(臨皐書院)에서 출간하였고 7월에는 선무원종이등훈(宣武原從二等勳)에 책록되고 철권(鐵券)을 하사 받았다.

무신 2월에 선조(宣祖)대왕께서 승하하시니 더 이상 벼슬에 뜻이 없었는데 6월에 친병(親病)으로 사표를 던지고 수락을 기다리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9월에 선친상(先親喪)을 당하고 10월에 또 자친상(慈親喪)을 당하여 하나 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준하고 여묘(廬墓)를 3년 하면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삭망(朔望)에는 꼭 집에 와서 궤연(几筵)에 전(奠)을 올렸다. 경술에 선생이 55세니 백사(白沙) 이공(李公)이 정권을 장악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글을 올려 관동의 여건과 정치적 고질들을 상세히 보고하니 상당 부분이 수용되어 해결되었다. 신해에는 아들 중윤(中允)을 보내 회재(晦齋)와 퇴계(退溪) 두 선생이 정인홍(鄭仁弘)의 무함(誣陷)을 입은 것을 해명하게 하였고 10월에 길주(吉州)목사에 제수되고 통정(通政)으로 승진하였으나 사양하였다. 임자에 창원부사(昌原府使)가 되었는데 화교(華僑)의 상인들이 자주 창원지경에서 도적의 공격을 받았다고 고발해 오기에 공이 색출하여 다시는 못하게 하니 영남지방의 모든 화교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워 주었다.

계축에 집에 돌아와 춘추연의(春秋演義)를 짓고 또 주역연의(周易演義)도 지었다. 을묘에 동래부사(東萊府使)에 추천되어 부임하니 당시 큰 난리를 치룬 뒤라 백성이 사방으로 흩어져 돌아오지 못하고 있고 농지가 모두 황폐하여 있는지라 공이 백성들의 마음을 정하는데 주력하고 사방으로 흩어진 백성을 모아오며 학자를 찾아서 백성들을 훈도하는 임무를 수여하고 공의 봉급을 모두 나누어 농사와 공부에 열중하니 고을 인심이 크게 좋아지고 왜인(倭人)까지도 경복하였다.

병진에 시를 지어 집으로 돌아갈 뜻을 비치니 그 해가 바로 환갑이었다. 정사에 조신(朝臣)들이 동서(東西)로 나누어 정쟁이 심화되자 탄식하며 시를 지으니 ‘소부의 들리는 귀보다 차라리 갈관의 안들리는 귀가 좋겠고 기자처럼 종이 되기보다 차라리 집이나 지키는 일꾼이 낫겠네.(與有巢父耳 寧爲?冠聾 與爲箕子奴 寧爲樹屋傭)’라고 하였다.

임기도 끝이 나고 하여 사표를 내고 집으로 돌아왔더니 동래(東萊) 백성들이 청원을 올려 일년만이라도 더 있게 하여 주십시요 하니 나라에서 1년을 연기하여 주기에 사양하다가 부득이 1년을 더 있다가 무오 8월에 마치고 집에 와서 다시는 벼슬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도교시(渡橋詩)를 지어 뜻을 보였다. 9월에 공조참의(工曹參議)를 배하고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여 주었으나 공이 말하기를 새들도 마시고 쪼는 것이 모두 때가 있는 법 무엇 때문에 허둥댈 필요가 있겠는가 하고 이백(李白)의 백수와송운(白首臥松雲)이란 시귀(詩句)를 취하여 앞으로 은퇴할 것을 분명히 하였다. 을미에는 불이설(不移說)을 지어 자제들에게 보이고 벼슬에 뜻을 빼앗겨서 마음 공부가 독실하지 못함을 후회하였다. 경신에 아들 중윤을 진주특사(陳奏特使)로 중국에 보내고 가을에 대신들이 영백(嶺伯)으로 추천하였으나 시로써 사양하기를 ‘그대들은 번거롭게 인간의 부침을 말하지 마시오 이 몸은 본래부터 강호에 사는 몸이라오.(煩君莫道升沈事 本是江湖自在身)’하고 마침내 나가지 않으니 당시의 공론이 높이 평가하였다.

임술에 중윤(中允)이 승지(承旨)가 되어 근친(覲親)을 왔다. 몇 달 전에 오랑캐놈들이 철기(鐵騎) 천여기로 압록강을 건너와 용천(龍川)까지 노략질을 하니 계책을 올리는 자가 말하기를 조금 천천히 대처하자기에 중윤이 계(啓)를 올려 말하기를 우선 담략이 있는 자를 골라 정탐을 하게 하고 한편으로 지연작전을 쓰는 것이 좋겠다 하였더니 박승종(朴承宗)이 큰 소리로 황모가 화친을 주장한다 하였다. 공이 중윤을 보는 자리에서 너의 말은 참으로 주상이 적당하게 묻는 것을 신하된 자가 꼭 맞는 대답을 하였지만 언젠가 말썽의 소지가 될 것이라 하더니 과연 다음해 시세 사람들의 농간의 대상이 되었으니 공의 세상 보는 안목이 출중한 것을 이러한 유에서 엿볼 수 있다 하겠다.

4월 2일에 병이 심하여 가인(家人)을 모아 훈계를 끝으로 자리를 바로 하고 서거하시니 향년이 67세이시다. 부음이 들리자 공훈(功勳)으로 위로하는 차원에서 가선대부이조참판(嘉善大夫吏曹參判)을 추증하고 겸하여 동지경연 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 홍문관제학 예문관제학 세자좌부빈객(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世子左副賓客) 등을 추증하였다. 이해 8월 13일에 군의 서쪽 오대산(五台山) 간좌(艮坐)에 장사하니 사방에서 학자들이 조문하러 오는 자가 한두 고을이 아니었다. 농부에서 하인까지 산역(山役)을 돕지 않은 자 없었고 제문과 만장(輓章)이 수없이 많았지만 병화에 모두 불타고 단지 월사(月沙) 이공 백주(白洲) 이공 청계(淸溪) 오공 등 제공의 글 몇 편만 집에서 전하고 있을 뿐이다. 공의 품성이 탁영하여 보통 사람과는 많이 다르고 포부는 광달(曠達)하여 구애됨이 없었으며 준정(雋正)한 기량과 굉원(宏遠)한 식견이 하해와 같아서 얼마라고 헤아릴 수가 없다.

일찍이 가정의 교육으로 시례(詩禮)에 습성이 되었고 나중에는 사우(師友)들을 좇아 의리의 대개(大槪)와 쇄소응대(灑掃應對)에서부터 수신제가(修身齊家) 치국격치(治國格致)의 요체에까지 모두 실지 행동으로 깨달아 얻었으며 심학도(心學圖) 및 동서명(東西銘) 등을 좌우에 붙여두고 항상 보면서 성찰의 자료로 하였다. 문장에 있어서는 혼후방일(渾厚放溢)하여 유속(流俗)의 얕은 재치와는 비교할 수 없다 하겠다. 소시에는 양봉래(楊蓬萊), 이아계(李鵝溪), 김주은(金酒隱) 제공들이 모두 외우(畏友)로 칭하셨고 윤월정(尹月汀), 유서애(柳西厓), 이한음(李漢陰), 김학봉(金鶴峯), 신상촌(申象村), 김동강(金東岡), 정약포(鄭藥圃), 서약봉(徐藥峯), 정한강(鄭寒岡), 한유천(韓柳川), 이월사(李月沙), 장여헌(張旅軒), 홍만전(洪晩全), 송호봉(宋壺峯), 홍모당(洪慕堂), 이지봉(李芝峯), 우리 백사공(白沙公) 등 여러 선배들이 서로 더불어 연원을 강구하고 마탁상자하여 혹은 시를 주고받았고 혹은 편지들이 오고 갔다.

공이 과거로 출사하여 나라일로 30여년 한결같이 충근(忠勤)으로 일관하였고 국방에 보좌할 때는 죽음을 각오하였으며 명을 받고 일에 임하면 분명하고 명쾌하게 칼로 짜르듯 하여 나라를 편안하게 하였고 나라의 억울한 무함(誣陷)도 시원하게 해결하였으니 이것이 공의 대개이다.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 같은 것은 사람들이 모두 피하고 꺼리는 문건인데 공은 능히 발문을 지었고 조정이 붕당으로 갈라져 그 화를 피하기 어려웠는데 공은 그 기미를 미리 보고 물러나서 한 점의 누도 없으니 그 마음은 얼음처럼 차고 투명하여 구름을 헤치고 만리창공(萬里蒼空)을 보는 것 같았으며 양친을 뜻으로 봉양하면서 육순의 나이에도 친히 돌보시며 성(誠)과 경(敬)을 극진히 하였기에 사람들이 모두 효자라 칭하니 창주공(滄洲公)에게 그렇게 하셨다.

공이 처음에는 호를 하담(霞潭)이라 부르다가 해월(海月)로 하였고 만년에는 다시 만귀(晩歸)라 하였으며 좋은 천석(泉石)을 찾아 여생을 보내면서 평민의 의관으로 촌로(村老)들과 어울려 농담도 하고 술도 마시니 아무도 조정대신임을 알지 못했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진퇴소장(進退消長)의 이치를 살펴서 벼슬할 수 있을 때 나가고 불가면 물러난다 하였으니 공이야 말로 실천하신 분이라 할 수 있다. 후에 고을 사람들이 공을 명계서원(明溪書院)에 배향하여 추모하고 있다.

공이 평일 저술한 글들이 모두 불에 타고 남은 것이 시(詩) 몇 권 부(賦)·서(書)·소(疏)·서(序)·발(跋)·찬(贊)·전(箋)·잡저(雜著) 등이 2권, 행장(行狀)·묘지(墓誌) 및 은사일기(銀⏟日記) 3권 등이 발간되어 세상에 전하고 있다.

배(配)는 증정부인(贈貞夫人) 의성김씨(義城金氏)니 찰방(察訪) 수일(守一)의 따님이며 이조판서 진(璡)의 손으로 처음에 안동 수곡(水谷)에 장사하였다가 후에 다시 오대산(五台山)으로 이장하였고, 유처취처(有妻娶妻)인 한양최씨(漢陽崔氏)는 병사(兵使) 원(垣)의 따님이니 묘는 옥락동(玉落洞)에 모셨고, 계배(繼配)에 정부인 완산이씨(完山李氏)니 덕원도정(德原都正) 추(樞)의 따님이요 경흥군 수방(秀芳)의 손이니 묘는 계하(階下)에 부장하였는데 단아하고 현숙하며 마음이 곱고 자애하였다. 8남 2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중윤(中允)이니 승지요, 다음은 중직(中直)이니 종사랑(從仕郞)이요, 중민(中敏)이니 승사랑(承仕郞)이요, 중헌(中憲)이니 선교랑(宣敎郞)이요, 중순(中順)이니 종사랑이요, 중경(中敬)이니 장사랑(將仕郞)이요, 중원(中遠)이니 장사랑이요, 중량(中亮)이니 무과(武科)이다. 여는 이영명(李榮明)·이유필(李有馝)에게 출가하였다.

중윤이 중헌의 아들 석래(石來)를 입사하였고 유자(幼子)에 석우(石友)와 석심(石心)이요, 두 딸은 군수 조정융(曹廷融)과 사인 정기덕(鄭基德)에게 출가하였다. 석래의 자에 규(圭)와 기(基)와 근(⏟)이요, 규의 자에 세중(世重)과 세항(世恒)과 세태(世泰)니 첨추(僉樞)요, 세중의 자에 상하(相夏)와 헌하(憲夏)와 경하(景夏)요, 상하의 자에 선(璇)이요, 선의 자에 치문(致文)과 치응(致應)이요, 치문의 자에 면구(冕九)와 진구(振九)이다. 중직의 자에 석립(石立)이요, 석립의 자에 재호(載浩)요, 재호의 자에 익한(翼漢)이요, 익한의 자에 창하(昌夏)이다. 중민의 자에 석흥(石興)이요 두 딸은 정수석(鄭綏碩)·박서규(朴瑞奎)에게 출가하였다. 석흥의 자에 박(?)과 배(培)요, 박의 자에 세겸(世謙)이요, 세겸의 자에 운하(運夏)이다. 중헌의 자에 석래(石來)니 백부에게 출계하고, 석평(石平)이니 증사복시정(贈司僕寺正)이요, 석붕(石朋)이요, 석보(石寶)니 호군(護軍)이요, 석령(石齡)이요, 여는 권덕여(權德輿) 이문윤(李文胤)에게 출가하였다.

석평의 자에 숙(塾)이니 증좌승지(贈左承旨)요, 승지의 자에 세원(世元)이니 증호조참판(贈戶曹參判)이요, 참판의 자에 수하(受夏)니 동중추(同中樞)이다. 중순의 자에 석로(石老)요, 두 딸은 사인 이영(李英)과 생원 변지두(邊之斗)에게 출가하였다. 석로의 자에 사자(嗣子) 옥(⏟)이요, 옥의 자에 세용(世鎔)이요, 세석(世錫)이요, 세용의 자에 승하(承夏)요 시하(始夏)이다. 중경의 자에 석운(石云)이요 석금(石今)이요 여는 사인 박소(朴沼)에게 출가하였다. 석운의 자에 해(垓)요 증(增)이요, 해의 자에 세빈(世⏟)이요 세흠(世欽)이요 세탁(世鐸)이요, 세빈의 자에 명하(鳴夏)요 중하(重夏)이다. 중원의 자에 석삼(石三)이요 석미(石眉)요 석기(石奇)요, 석삼의 자에 호(壕)요 토보(土保)요, 호의 자에 세창(世昌)이요, 세창의 자에 일하(一夏)이다. 중량의 사자는 석진(石眞)이요, 석진의 자에 균(均)이요, 균의 자에 세억(世億)이요, 세억의 자에 일하(一夏)요 재하(再夏)이다. 내외자손이 번다하여 못다 기록하겠다.

내가 우리 선조 백사공(白沙公)께서 변무사(辨誣使)로 가셨을 때 일기를 살펴보니 정문(呈文)을 매일 같이 올려도 아무 소식이 없어서 조정에서는 공론이 흉흉하고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있었는데 해월공이 우리가 소상서(蕭尙書)를 직접 찾아가서 애걸복걸하여 소상서의 의중을 알아보자 하였다. 다음날 백사공이 이 일은 정말 중대사이다 하니 월사공(月沙公)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하였고 이역관(李譯官)은 이루지도 못하고 해만 자초한다 하였고 나는 이루지 못한다 해도 해는 없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서장관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니 해월공은 월사의 생각과 같다 하였다. 그리하여 병부로 소상서를 찾아가 정문을 올리고 진정을 하였더니 소상서 대답이 천자의 뜻이 전의(前議)와는 달라서 후의(後議)에 인준할 것이니 전의는 감히 품할 수 없다 하였다. 우리들이 여관에 돌아와서 백사공이 말하기를 이번의 병부로 찾아간 성과는 해월공이 수공(首功)이라 하였다.

아! 공이 나의 선조 백사공과는 동년동월 생으로 날자만 공이 6일이 후이고 졸년 또한 백사공 보다 4년이 후이다. 그런데 나라 사정이 날로 잘못되어 가서 이이첨(李爾瞻) 정인홍(鄭仁弘) 등이 안으로 붕당을 만들고 오랭캐와 왜놈들이 밖에서 엿보고 있기 때문에 나라의 위험이 일발(一髮)에 처하게 되어 있고 조정대신들이 화를 당하여 있었지만 오직 공만은 향산(鄕山)에 높이 누워 정치판에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으니 그 지조와 절개는 임종(林宗)의 세상과 격론하지 않는 것에 비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고 설방(薛方)의 깊은 산속에 숨어사는 것과 방불하다 하겠으니 내가 어찌 한마디 말을 아껴 선의(先誼)의 중함을 저버릴 수 있으리요 드디어 명(銘)을 하니 명에 왈(曰)

찬란하던 선조 시절에, 해월이란 신하 있었네/ 평해황씨(平海黃氏)로 말하자면, 우리나라 명족(名族)이지/ 덕망을 많이 쌓아, 일찍이 벼슬길에 나갔네/ 암행어사에도 발탁되었고, 호당(湖堂)에도 봉직하였지/ 임진년 왜란에는 나라가 위험해서/ 주상이 파천하고, 종사가 일발에 처했다네/ 병막(兵幕)에서 군사(軍師)의 임무로/ 말을 달려 급하게 뛰었지/ 백성을 달래기도 하고, 사족의 기율도 잡았다네/ 마침내 회복이 되어도, 그 공을 자랑하지 않았네/ 나라의 불행함이 있을 때, 주상께서 너가 적임이라 하였지/ 멀리 명나라에 가서, 심력(心力)을 다하여 협찬하였다네/ 늦게 정랑(正郞)에 오르니, 사류(士類)가 모두 감탄하였지/ 공이야 아무 꺼림낌없이, 바다가 좋다고 떠나셨지/ 누대짓고 국화심고, 정자나무에 맑은 바람이네/ 좋은 벼슬도 유혹할 수 없으니, 시끄러운 무함이 통할리 없지/ 바위산 같은 그 기품이여, 금강산의 기경이로다/ 숙도(叔度)의 문장에 왕약용(汪若容)의 충성이요/ 황정견(黃庭堅)의 글씨에 방옹의 시로다/ 시는 호사(豪士)의 무기요, 서(書)는 대부(大夫)의 홀(笏)이더라/ 높은 덕을 추앙함이여, 농인도 천인도 두루하였고/ 충성하고 또 현명함이여, 전생전귀(全生全歸)의 몸이로다/ 초손(肖孫)이 세의(世誼)를 찾아서, 나에게 명을 구하네/ 이 노래 지어 새김이여, 높은 저 비석이로다. 국숭록대부영중추부사원임규장각직제학(大匡輔國崇祿大夫領中樞府事原任奎章閣直提學) 월성(月城) 이유원(李裕元) 찬(撰)”

[의의와 평가]

황여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임진왜란에 종사관으로 참여하여 전란의 극복 과정을 직접 관찰하였고, 서장관으로 외교 일선에 참여한 경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황여일의 행적을 통하여 조선 중기의 국방과 외교 등 여러 정치적인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 『울진군지』(울진군지편찬위원회, 2001)
  • 울진문화관광(http://tour.uljin.go.kr)
이용자 의견
이** 해월선생 신도비 정독하였습니다.
  • 답변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020.08.26
김** 저도 해월선생 신도비 일독하였습니다.
일찍부터 저의 비조이신 귀봉 할아버님 서군 이심을 알고있었습니다.
국난의위기에서 뛰어난 재능과 외교력,그리고 덕망,인품 위대한 인물이었음을 알수있었습니다.
명계서원,해월종택 한번 찾고 싶습니다.
-의성김 귀봉공 14대손 -김덕재
  • 답변
  • 디지털울진문화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020.04.05
김** 해월선생신도비 잘 읽었습니다
방조이신 龜峰 金守一公의 서군이시고 14대조이신 학봉비조의 강의를 들어 셨다고쓰였군요
기회가 닿으면 한번 다녀올까합니다 고맙습니다
  • 답변
  • 디지털울진문화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020.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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