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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육 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801738
한자 韓永育碑
영어의미역 Monument of Han Yeongyuk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유적/비
지역 경상북도 울진군 온정면 소태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최인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건립시기/일시 1995년 8월 15일연표보기
관련인물 한영육
소재지 주소 경상북도 울진군 온정면 소태리

[정의]

경상북도 울진군 온정면 소태리에 있는 애국지사 한영육의 비.

[개설]

한영육(韓永育)의 호는 백헌(白軒)이며, 자는 낙삼(樂三)으로 본관은 청주이다. 시조 삼한삼중대광문하태위(三韓三重大匡門下太尉) 한난(韓蘭)의 31세손으로 청주한씨 울진 입향조인 한위(韓緯)의 15세손이다. 조부는 한재린(韓在麟)이며, 부친은 한필석(韓弼錫)이다. 1992년 8월 15일 정부에서 고인의 독립운동 당시의 공훈(功勳)을 기리어 건국훈장애족장(建國勳章愛族章)을 추서하였고, 광복 50주년을 맞아 온정면 소태리 산개사당곡(山介士堂谷) 선영(先塋) 아래 신좌(申坐)에 묘비(墓碑)를 세웠다.

[건립경위]

독립운동에 온몸을 바친 한영육의 구국 정신을 기리고 애국 애족하는 정신을 함양하기 위하여 1995년 8월 15일 비를 세웠으며, 비문은 울진군 3·1 유족회 대표 전인식(田仁植)이 지었다.

[금석문]

‘애국지사한공영육비(愛國志士韓公永育碑)’

"지사 한공(韓公)의 휘(諱)는 영육(永育)이시며 호는 백헌(白軒), 자는 낙삼(樂三) 덕릉(德陵) 참봉(參奉)이고, 삼한삼중대광문하태위(三韓三重大匡門下太尉)이신 청주한씨(淸州韓氏) 시조 휘 난(蘭)의 31세 손으로 울진 입향조 휘 위(緯)의 15세 손이다. 조 휘는 재린(在麟)이며 필석(弼錫)의 장자로 서기 1878년 7월 16일 울진군 온정면 소태리에서 태어나셨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활달하고 기질이 영민하여 일찍이 한학을 닦아 문사(文詞)가 사우(師友) 간에 널리 알려졌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내는 혼란에 빠지고 전국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났다. 지사 한공은 1906년 3월 6일 영해읍에서 기의(起義)한 신돌석(申乭石) 의진(義陣)에 입진(入陣)하여 도선봉장(都先鋒將)이 되어 백암산과 일월산에 본영을 두고 300여 동지들과 영양, 영덕, 영해, 평해, 울진 등지에서 3년에 걸쳐 왜군과 싸우며 군량미가 모자라면 집안과 문중의 전답을 팔아 병사들의 사기를 돋우어주었다.

1919년 3·1운동이 경향 각지에서 불길처럼 일어날 때 지사 한공은 조국독립을 쟁취할 것을 결심하고 향내(鄕內) 동지들을 규합하여 그해 3월 16일 영해 장날 시장에서 운집한 수천 군중과 합류하여 독립만세를 고창(高唱)하고 일본경찰주재소와 기물 등을 파괴하고 공문서를 모조리 소각하였다.

출동한 일경(日警)들이 만세 시위 군중을 향하여 무자비한 발포로 많은 사상자를 낼 때에 우수(右手)에 총상을 입고 체포, 구금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고향으로 돌아와 옥살이의 여독(餘毒)으로 병고에 계시다가 1935년 11월 1일 그리던 광복을 못 본 채 영면(永眠)하시니 향년이 55세이시다.

명왈(銘曰) 지사의 일생은 구국의 고행(苦行)이며 이충보국(以忠報國)하신 표상(表象)은 천추에 빛나도다. 1992년 8월 15일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애족장을 추서하고 광복 50주년을 맞아 온정면 소태리 산개사당곡(山介士堂谷) 선영(先塋) 하 신좌(申坐)에 묘비(墓碑)를 세우다. 서기 1995년 8월 15일, 울진3·1유족회(蔚珍三一遺族會) 대표 전인식(田仁植) 근찬(謹撰)."

[의의와 평가]

울진군 온정면 소태리 출신의 독립 운동가인 한영육의 독립 정신을 기리고 그 일대기를 기록으로 남겨 독립운동사 연구 자료로 활용되고 있으며, 후세 사람들의 애국 애족 정신을 함양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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