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07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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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洪命元 |
영어음역 | Hong Myeongwon |
이칭/별칭 | 낙부(樂夫),해봉(海峯)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진각 |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낙부(樂夫), 호는 해봉(海峯). 증조할아버지는 홍춘경(洪春卿)이고, 할아버지는 홍일민(洪逸民)이다. 아버지는 진사 홍영필(洪永弼)이며, 어머니는 조수(趙琇)의 딸이다. 첨지중추부사·예조참의를 지낸 홍처윤(洪處尹)[1607~1663]이 아들이며, 승정원도승지·형조참판을 지낸 홍수주(洪受疇)[1641~1704]가 손자이다.
[활동사항]
홍명원(洪命元)[1573~1623]은 1597년(선조 30)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승문원자가 되어 홍문록에 올랐다. 세자시강원설서·세자시강원사서 등을 거쳐 사간원헌납이 되어 권신을 탄핵하다 함경도도사로 좌천되었다가 3년 만에 돌아와 예조정랑에 임명되었다. 외직으로 죽주부사로 나아갔다가 돌아와 홍문관수찬·세자시강원필선·사헌부장령 등을 역임하고 다시 외직으로 나아가 정주목사·의주부윤을 지냈다. 이때 서북 지방의 쇠잔한 폐단을 제거하는 데 공을 세웠다.
다시 내직으로 승정원동부승지가 되었다가, 부모 공양을 위하여 광주목사를 자원하였으며 치적을 쌓아 겉옷을 하사받았다. 1615년(광해군 7) 폐모론이 대두되자 사직하였다가 후금(後金)과의 관계가 명나라에 알려지며 긴장이 고조되자 급고사(急告使)로 명나라에 가서 설득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후금과의 관계에 대하여는 강경한 배금론(排金論)을 주장하였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에는 경기도관찰사가 되어 흉도들의 난을 진정시켰다. 벼슬하는 동안 위엄과 형벌을 쓰지 않고 공정하게 다스린 까닭에 사람들이 모두 경복하였다. 박엽(朴燁)·정준(鄭遵)이 서임(西任)을 맡고 있을 때 총애를 믿고 교만 방자하여 많은 사람들을 침탈하였으나, 홍명원에게만은 함부로 대하지 못하였다. 중국의 학사들도 홍명원을 가리켜 장덕군자(長德君子)라 칭하였다고 한다. 홍명원은 글씨에 조예가 깊어 초서와 행서에 능하였으며, 한나라 문장과 당나라 시에 정통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해봉집(海峯集)』이 있다.
[묘소]
묘소는 안산시 단원구 성곡동 산78번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아들 홍처윤(洪處尹)의 공로로 찬성이 가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