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03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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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啓蒙運動 |
영어공식명칭 | Enlightenment Movement |
이칭/별칭 | 구국계몽운동,애국계몽운동,애국문화운동,개화자강운동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권영배 |
[정의]
개항기 경상북도 청송 지역에서 전개된 국권회복운동.
[개설]
개항기 및 대한제국기(大韓帝國期)의 국권회복운동은 의병 전쟁과 계몽운동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청송 지역에서는 계몽운동 단체의 결성은 없었다. 서울에서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대한국민교육회]가 결성된 이래 1906년 5월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1907년 11월 대한협회(大韓協會), 1908년 3월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와 같은 계몽운동 단체가 결성되어 지회(支會)가 각처에서 결성되었으나 청송 지역에서는 그런 움직임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의 일환으로 1909년 4월 청송에 낙일학교(樂一學校), 1908년 진보에 광덕학교(廣德學校)가 설립되었을 뿐이다.
[개념과 주도층]
계몽운동은 1904년 8월 국민교육회의 신교육운동에서 비롯되었으며, 정부와 민간 차원에서 각각 전개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제의 국권 침탈이 본격화되자 이에 반대하여 신교육운동, 결사 조직, 학회 조직, 언론기관 설립 및 출판물 보급, 신문화·신문학 운동, 국학운동, 민족종교운동,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 등이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하지만 이 운동은 주도층에 따라 지역별로 전개 방향이나 내용에 차이가 컸다.
주도층은 전통 유학을 수학하였으면서도 신문물의 수용이 필요하다고 인식한 혁신 유림(儒林), 곧 신지식층 인사들이었다. 이들 인사들은 안으로는 실력 양성을 이루고, 밖으로는 자주독립을 성취하여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이 운동을 주도하였다. 경상북도 지역에서 가장 활발하였던 분야는 신교육운동, 즉 교육구국운동이었다.
신교육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은 주로 서울을 왕래하며 활동하였다. 이들은 새로운 현실 인식을 통해 사상적 전환을 이루었는데, 경상북도 지역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장지연(張志淵)과 신채호(申采浩)였다. 이들은 경상북도에서 계몽운동의 단초를 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학교 설립]
청송 지역을 비롯한 경상북도 지역의 신교육운동은 다른 지역에 비해 다소 늦은 편이었다. 이 지역에서는 1906년 3월 고종의 흥학선포와 경상도관찰사 신태휴(申泰休)의 흥학훈령(興學訓令)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신태휴가 발표한 흥학칙령은 경상북도 41개 군에 흥학교진교육(興學校振敎育)을 목적으로 한 근대 학교의 설립을 추진하기 위한 것이었다.
신태휴는 청송군과 진보군을 비롯한 관내 여러 군을 순방하며 학교 설립을 독려하였다. 그 과정에서 신지식층 인사들은 신교육운동으로 근대식 학교 설립에 적극적이었다. 경상북도에서 1910년 일제강점기 이전에 설립된 신교육기관은 약 100여 개 정도였는데, 개인이 설립한 경우도 없지 않았지만, 주로 서원(書院)이나 향교(鄕校)를 신식 학교로 전환시킨 경우가 많았다. 청송 지역에서도 지역 유지들에 의해 청송향교(靑松鄕校)를 기반으로 낙일학교, 진보향교(眞寶鄕校)를 기반으로 광덕학교가 설립되어 이 지역의 신교육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학회 활동]
학교 설립과 함께 학회 설립도 이루어졌다. 경상북도에서 지역 학회 단체로는 교남교육회가 가장 활발하였다. 교남교육회는 1908년 3월 14일 발기대회에 이어 결성되었다. 그 조직으로는 회장·부회장 아래 재무부·교육부·도서부를 두었고, 기간 부서로서 총무·간사·회계를 두었다. 그 밖에 학무원(學務員)과 편술원(編述員)을 두었는데, 학무원은 교육부의 제반 사무를 담당하였으며, 학교 설립 운동을 주요 과제로 삼았다.
교남교육회의 가장 기본적인 활동은 교육 진흥을 표방한 교육구국운동이었다. 본회(本會)는 서울에 사범학교를 설립하고, 지회(支會)는 각 지역에 학교를 세워 교육을 진흥할 것을 목표로 하였다. 지회에서는 각 면마다 하나의 학교를 설립하고 지경(地境)이 넓은 곳에는 2곳 이상을 설립한다는 방침을 정하였다. 다시 말하면 교남교육회는 지회 단위로 학교를 설립한다는 방향으로 신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교남교육회는 1909년 4월 25일 기관지 『교남교육회잡지(嶠南敎育會雜誌)』도 창간하였다. 이를 통해 교육 진흥과 민중 계발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청송 지역에서는 비록 지회 설립이 이루어지지 못하였지만, 청송 출신의 강래원(姜來遠)과 조정식(趙定植), 진보 출신의 이회발(李晦發) 등 3인이 회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청송 지역의 신교육 확산뿐 아니라 신지식과 신문화 보급에도 크게 기여를 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계몽 단체 지회 설립]
계몽운동을 주도하였던 계몽 단체로는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가 대표적이었다. 을사늑약 이후 계몽운동을 가장 먼저 시작한 단체가 1906년 4월 설립된 대한자강회였다. 이 단체는 각 지역에 지회를 설립하였는데, 경상북도 지역에는 고령·청도 등 5개 지역에 지회를 설립하였다. 그 뒤 대한자강회가 해산되자 1907년 11월 대한협회 설립으로 이어졌다. 대한협회는 1910년 9월 해산될 때까지 경상북도 지역에서만 대구·선산 등 10여 곳에 지회를 두었다. 그리고 이 같은 움직임은 점점 확산되기도 하였지만 청송 지역까지는 미치지 못하였다.
[평가와 한계]
계몽운동은 실력을 양성하여 국권을 회복하려 하였다는 점과 국권 상실 이후 전개되는 민족운동의 기반을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다만 학교 설립과 학회 활동 이외의 분야는 활발하지 못하였던 것처럼 계몽운동의 전개가 지역별로 편차가 컸다는 점이 한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