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0554
한자 赤猿日記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기록유산
유형 문헌/전적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감병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술 시기/일시 1896년 3월 2일연표보기 - 『적원일기』기록 시작
저술 시기/일시 1896년 5월 25일연표보기 - 『적원일기』기록 종료
소장처 심봉섭(沈鳳燮) - 경상북도 청송군 파천면 덕천리 지도보기
성격 일기
저자 김숭진|심의식|오세로|서효격
권책 불분권 1책[60면]
행자 8행 20~25자
규격 25㎝[세로]|16㎝[가로]
권수제 일기

[정의]

1896년 청송 지역에서 일어난 의병의 창의 일기.

[개설]

『적원일기(赤猿日記)』는 1896년 3월부터 5월까지 청송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킨 청송의진의 활동을 기록하였다. 당시 조선은 1895년(고종 32) 10월 8일에 발생한 을미사변(乙未事變)과 11월에 공포된 단발령으로 인해 전국 각지에서 친일 세력을 타도하고자 의병들이 봉기하였다. 그러던 와중에 1896년 각처의 창의(倡義) 소식과 더불어 격문이 도착하자, 상주와 함창을 제외한 안동부 관할 지역 14군에서 각각의 의진이 결성되었다.

그 중에서 청송 지역은 3월 2일부터 본진이 면(面) 단위의 외방장을 중심으로 한 면군 체제로 의진이 결성되었다. 청송의진은 3월에 창의하여 그해 5월 25일까지 총 85일 동안 감은리전투를 비롯하여, 청송 지역에서 의병 투쟁을 지속하였다. 이 와중에 당시 의진의 서기들이었던 김숭진(金崧鎭), 심의식(沈宜植), 오세로(吳世魯), 서효격(徐孝格) 등 4인의 초기(抄記)를 토대로 의병 활동이 끝난 후 누군가에 의해 정리되어 일기로 편찬되었다.

[저자]

『적원일기』청송의진의 서기 김숭진[1850~1919], 심의식[1860~1937], 오세로[1852~1900], 서효격[1855~1936] 등 4인에 의해 기록되었다.

[편찬/간행 경위]

『적원일기』는 청송 지역에서 창의한 의병들의 활동 사항을 적어 놓은 자료로 청송의진의 서기 김숭진, 심의식, 오세로, 서효격 등 4인이 기록하였다. 의병 활동이 끝난 후 진중 기록인 4인의 ‘초기’를 토대로 정리하여 간행되었다. 기록 일자는 1896년 3월 2일[음력 정월 19일]부터 5월 25일[음력 4월 13일]까지 총 85일 간의 내용을 담고 있다. 김숭진은1896년 3월 2일부터 4월 27일까지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며, 4월 28일부터 5월 13일까지는 심의식이 기록했고, 5월 14일부터 16일까지는 오세로가, 5월 17일부터 25일까지는 서효격이 기록한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형태/서지]

불분권 1책[60면]으로 편성되어 있다. 한지에 필사된 것으로 사주단변과 계선은 없다. 일기의 크기는 세로 25㎝, 가로 16㎝이고 1면 8행에 1행의 자수는 20~25자이다. 권수제는 일기(日記)이다.

[구성/내용]

일기의 구성은 1896년 3월 2일에 청량산(靑凉山)에서 격문이 오는 내용에서부터 5월 25일 고종의 칙유(勅諭)에 의해 의병들의 해산 명령이 도달하여 청송의진이 각 팔면(八面)으로 분진(分陣)한 내용까지 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창의 경위, 의병진의 진용, 활동 상황 등을 비롯하여 주변 군현에서 조직된 의병진과의 관계 등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청송의진의 창의 배경은 안동·예안·진주(晉州) 등지로부터 창의 격문과 통유문(通諭文) 등을 통해 사정을 파악한 상태에서, 특히 안동 의병 등이 청송지역에 들어와 활동하는 것에 충격을 받아 의병을 결성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또한 인근 지역의 의병 관계와 안동 의병의 동향에 대해서는 거의 매일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자료가 희귀한 하층 병사부의 구성과 그들의 지향성을 포함하는 내용도 기재되어 있어 상당히 흥미롭다. 더불어 군자금 조달을 위해 각 문중에 배당한 문배전(門排錢)과 부호에 배당한 차출금(借出金), 자발적인 후원금이었던 의연금(義捐金)에 대한 내용도 구체적으로 담고 있다.

[의의와 평가]

『적원일기』는 의진의 문서를 직접 작성하고 관리하던 서기와 참모가 기록하였으므로 사료적 가치가 높다. 그 중에서 인근 지역의 상황이나 각처의 통문 접수에 관련된 내용은 자료로서의 충실성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일기 내에는 예천회맹(醴泉會盟) 이후 7읍 의병진의 태봉전투 내용과 더불어 노응규(盧應奎)의 진주의진(晉州義陣)과 관계 등 다른 군현의 의병진과 상호 협력하거나 갈등하는 모습을 진실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본 일기는 5월 25일 분진을 끝으로 기록이 끝나는데, 그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것은 일기가 분진 이후 초기에 기초하여 정리됨으로써 그 사실이 매우 정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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