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07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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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㣧曺 |
영어공식명칭 | Nam Yunjo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병훈 |
활동 시기/일시 | 1597년 - 남윤조 화왕산성 의병진 참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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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597년 - 남윤조 화왕산성 전투에서 전사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592년~1598년 - 임진왜란 |
출생지 | 경상도 영해도호부 영양현 - 경상북도 영양군 |
활동지 | 화왕산성 -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
묘소 | 화지동 -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장전리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통정대부 |
[정의]
조선 후기 청송으로 이주해 온 의병장.
[개설]
남윤조(南胤曺)[?~1597]는 경상북도 영양군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 때 의병진에 참여하여 화왕산성에서 전사하였다. 동생 남계조(南繼曺)가 노모와 형 남윤조의 가족들을 데리고 청송으로 이주한 이래로 그의 후손들이 청송에 살게 되었다.
[가계]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언술(彦述). 고조할아버지 송정(松亭) 남수(南須)[1395~1477]는 고려 말에 울진으로 낙향하여 은둔(隱遁)한 중랑장(中郞將) 남영번(南永蕃)의 넷째 아들이다. 남수는 울진에서 태어나서 이후 영해부[현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로 내려와서 영양남씨(英陽南氏) 영해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 세종 대에 사헌부 감찰어사(司憲府 監察御使), 용담현령(龍潭縣令)을 역임하였으며, 단종(端宗)이 손위(遜位)하자 이를 반대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학문에 몰두하였다.
남수는 백승(白昇)의 딸 대흥백씨(大興白氏)와 혼인하여 3남 1녀를 낳았는데, 큰아들은 남진(南莀), 둘째 아들은 남손(南蓀), 셋째 아들은 남전(南荃)이며, 사위는 현감(縣監)을 지낸 윤긍(尹兢)이다. 남윤조의 증조할아버지는 신암(愼菴) 남손(南蓀)이며, 무과에 급제한 후 군위현감(軍威縣監)과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하였다. 할아버지는 내금위 부사과(內禁衛副司果)를 지낸 남찬(南鑽)이며, 아버지는 참봉 남억령(南億齡)이다. 어머니는 조응규(曺應奎)의 딸 창녕조씨(昌寧曺氏)로 남윤조, 남계조 형제를 낳았다. 통정(通政) 남윤조(南胤曺)는 큰아들이며, 부인은 한양조씨(漢陽趙氏)이다.
[활동 사항]
남윤조는 학식이 명달(明達)하고 지기(志氣)가 강개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동생 남계조에게 노모의 봉양을 맡기고 창녕(昌寧) 화왕산성(火旺山城)의 곽재우(郭再祐) 진영에 참여한 후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장렬히 순국하였다.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랐다.
[묘소]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장전리 115에 묘소가 위치하며, 무덤 아래에는 재실인 화지재(花池齋)가 세워져 있다.
[상훈과 추모]
남윤조의 화왕산 참전과 전사 관련 기록은 『임란동고록(壬亂同苦錄)』에서 확인된다. 남계조의 후손들이 청송군 안덕면에 정착한 이래로 남윤조와 남계조 형제의 뜻을 기리기 위해 1629년 영모재(永慕齋)를 무덤 아래 지었으나, 1727년 영모재가 훼손되자 후손들이 다시 힘을 모아 별소(別所)를 만들고 그 지명에서 이름을 취하여 화지재[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67호]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