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08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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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柄國 |
영어공식명칭 | Cho Byeongguk |
이칭/별칭 | 해창(海蒼)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
집필자 | 권영배 |
출생 시기/일시 | 1883년 - 조병국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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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조병국 화목장터 3.1독립만세운동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조병국 체포 |
몰년 시기/일시 | 1955년 - 조병국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조병국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67년 - 해창 조병국의사기념비 건립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3월 26일~27일 - 화목장터 3.1독립만세운동 |
출생지 | 경상도 청송도호부 복리 -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복리 |
거주|이주지 |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복리 |
활동지 | 경상북도 청송군 - 경상북도 청송군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강점기 청송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조병국(趙柄國)[1883~1955]은 1919년 3월 26일 조현욱(趙炫郁), 신태휴(申泰烋) 등과 같이 청송군 현서면에서 일어난 화목장터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이튿날 다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어 2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활동 사항]
조병국은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무렵, 조현욱으로부터 궐기를 촉구하는 격문을 받고 적극 동참하였다. 조병국은 1919년 3월 26일 아침 조현욱, 신태휴 등과 함께 화목동(和睦洞) 천변에서 주민 50여 명을 이끌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화목장터로 행진하였다. 중도에서 합류하는 사람들로 시위대는 계속 늘어났다.
화목면사무소를 지나 오후 1시경 장터에 이르렀을 때, 시위 대열은 수백 명으로 불어났다. 조병국은 이들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당황한 주재소(駐在所) 순사들이 달려와 총칼을 휘두르며 탄압하였다. 여기서 군중들은 흩어지고 조병국은 피신하였으나 조현욱과 신태휴가 잡혀갔다.
조병국은 다음 날 27일 말을 타고 주민 10여 명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화목장터로 향하였다. 중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호응하였다. 장터 부근 천변에 이르자 시위 군중은 6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이형(李瀅)이 나누어 준 태극기를 흔들며 질서 있게 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청송경찰서 경부(警部) 강용건(姜龍乾)과 순사 3명이 시위대를 가로막고 해산시키려 하자, 조병국은 말을 탄 채 이들에게 "너희들은 조선인이 아니냐? 너희들부터 처단하겠다."하고 호통을 쳤다. 조병국은 공포를 쏘며 달려드는 경찰에게 잡혔다. 군중은 더욱 과격해졌으나 경찰의 총격으로 다수가 부상을 당하면서 흩어졌다. 조병국은 1919년 5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확정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67년 조병국의사기념사업회는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명당리에 해창(海蒼) 조병국의사기념공원을 조성하고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