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10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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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松鶴書院 |
영어공식명칭 | Songhakseowon |
이칭/별칭 | 송학서당,명지서당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석정길 53[장전리 958-3]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백지국 |
건립 시기/일시 | 1702년 - 송학서원 창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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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철|철거 시기/일시 | 1868년 - 송학서원 훼철 후 송학서당으로 개칭 |
개축|증축 시기/일시 | 2010년 - 송학서원 사당 건립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96년 - 송학서당에서 송학서원으로 개칭 |
현 소재지 |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석정길 53[장전리 958-3] |
성격 | 서원 |
양식 | 홑처마 팔작지붕[강당] |
정면 칸수 | 3칸[사당]|4칸[강당]|4칸[동·서재] |
측면 칸수 | 1칸[사당]|2칸[강당]|2칸[동·서재] |
[정의]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장전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사설 교육기관.
[개설]
송학서원(松鶴書院)은 숙종 연간[1674~1720]에 건립되었다. 이황(李滉)[1501~1570], 김성일(金誠一)[538~1593], 장현광(張顯光)[1554~1637]을 배향하고 있다. 이황의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陶叟),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김성일의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장현광의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위치]
송학서원을 가려면, 안덕면사무소 입구에서 안덕로를 따라 북동쪽으로 약 160m 이동 후 안덕교를 건너 좌회전한다. 약 400m 이동한 뒤, 갈림길 왼쪽 석정로를 따라 약 500m 가다 보면 왼쪽 너른 터에 송학서원이 자리 잡고 있다. 서원이 위치한 장전리는 고려시대 안덕현(安德縣)의 식량 창고가 있던 곳으로, 창마 혹은 창말이라 불린다. 1860년경 가평이씨(加平李氏), 함안조씨(咸安趙氏) 가문이 이곳을 개척하였다. 골짜기를 따라 길게 밭이 형성되어 있어 사래가 길다는 뜻으로 장전(長田)이라 부른다. 송학서원에서 약 2㎞ 떨어진 곳에 화지재(花池齋)가 있다.
[변천]
『청기지(靑己誌)』(1937)에 따르면, 송학서원은 명지서당(明智書堂)의 옛 터에 건립되었다. 권상규(權相圭)가 쓴 「명지서당상량문(明智書堂上梁文)」을 통해 내력을 확인할 수 있다. 명지서당은 명지재(明智齋) 민추(閔樞)가 건립하였다. 처음 건립된 곳은 명지현(明智峴)이었는데 소실(燒失)되었다. 지역 유림들에 의해 임술년 봄 남향의 터로 옮겨 중건하였다. 「명지서당상량문」에는 간지만 기록되어 연도를 명확히 알 수 없다. 민추는 1526년(중종 21) 태어나서 1604년(선조 37) 사망하였으므로, 서원이 건립된 것은 중종~선조 때로 추정된다. 임술년 중건은 1622년(광해군 14) 또는 1682년(숙종 8)으로 추정된다.
이후 명지서당의 옛 터에 송학서원이 창건되었다. 건립 연도는 사료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조겸호(趙謙祜)가 쓴 「송학서원상량문(松鶴書院上樑文)」에 따르면, 서원이 건립된 것은 1702년이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은 1643년(인조 21), 『청송부읍지(靑松府邑誌)』(1788~1790)와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1832) 내 「청송부읍지(靑松府邑誌)」· 「교남지(嶠南誌)」 등은 건립 연대를 1699년(숙종 25)으로 기록하고 있다.
『연려실기술』에 기록된 1643년의 경우, 「송학서원상량문」에 ‘1643년 집을 지었을 때[崇禎癸未構堂之時]’라고 한 것으로 보아 아직 서원의 모습을 갖추지 못하였거나, 명지서당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서원의 모습을 갖춘 것은 1699년 또는 1702년이다. 사료의 부족으로 두 시기 중 어느 것인지 명확히 밝히기는 어렵다. 「송학서원상량문」의 경우 송학서원에 관한 자료이고, 다른 사료의 경우 청송 전반에 관한 기록이므로 「송학서원상량문」의 것을 따르도록 한다.
서원의 명칭은 이황의 시구에서 유래하였다. 이황은 1548년(명종 3) 청송부사(靑松府使)로 외직(外職)을 청하였으나, 청송이 아닌 단양군수(丹陽郡守)에 제수되었다. 이때 “단산에 부임하여 서당의 박중초, 민경열, 남경림, 윤사추의 전석에 남겨 주다[赴丹山書堂朴仲初閔景說南景霖尹士推餞席留贈].”라는 시를 남겼다. 시구 중 “청송의 백학은 비록 연분이 없으나, 벽수의 단산은 참으로 인연인가 보네[靑松白鶴雖無分 碧水丹山信有緣].”에서 ‘송(松)’과 ‘학(鶴)’ 두 글자를 가져와 서원의 이름을 삼았다.
이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1868년(고종 5) 일부가 헐리고 서당으로 사용되었다. 지역 유림들의 공의로 지금의 청송군 안덕면 장전리로 이건하였다. 이후의 내력은 자료의 소략으로 알 수 없다. 1993년 군수 남유진(南洧鎭)이 쓴 「송학서원중건기(松鶴書院重建記)」에 따르면, 네 차례 이건이 있었다고 하나, 그 내력은 알 수 없다. 1996년 송학서원으로 개명되었고, 2010년 사당이 건립되었다.
[형태]
송학서원은 제향 공간인 사당, 강학 공간인 강당과 동재·서재 및 외삼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이다. 중앙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中堂夾室)을 구성하고 있다. 「송학서원(松鶴書院)」 현판이 있다. 동재·서재는 건물 양식이 동일하다.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이다. 정면에 툇마루가 있다. 사당인 존덕사(尊德祠)는 이황, 김성일, 장현광의 위폐를 배향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이다.
[현황]
송학서원은 비지정 문화재이며, 건물의 상태는 양호하다. 매년 가을에 향사를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