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에서 펼친 독립운동, 윤자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1494
한자 國內外-獨立運動, 尹滋瑛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시대 근대/일제강점기
집필자 김영범

[개설]

윤자영(尹滋瑛)[1894~1938]은 청송이 낳은 걸출한 항일독립운동가이면서 공산당 조직에 몸담고 반제국주의 민족혁명에 헌신한 혁명가였다.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을 주도하여 옥고를 겪고 나온 후 청년운동에 진력하다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하이에서 고려공산당에 가입하고 지도부의 일원이 되었다.

의열단(義烈團)과 대한민국임시정부에도 일시 가담하였고, 청년동맹회 창립과 운영을 주도하였으며, 1926년부터는 중국 만주에서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계열의 여러 조직을 연이어 건설하며 지하운동에 매진하다 국내로 잠입하여 함경남도에서 당재건운동을 이끌었다. 체포령을 피해 만주로 되돌아가 중국공산당 산하에서 활동하다 구소련으로 건너갔는데, 스탈린(I. Stalin)이 벌인 정치적 대숙청의 와중에 1938년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

[청송의 독립운동사와 윤자영]

청송인들은 항일의병운동에서 빼어난 위훈을 쌓아올렸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 국면에서는 의외로 인근의 다른 지역에 비해 성세(聲勢)와 공적이 약하였다. 그런 중에도 청송인의 독립운동을 대표하면서 널리 알릴 인물로 권영만(權寧萬)과 윤자영, 두 사람을 꼽을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윤자영은 국내외 여러 지역을 누비면서 맹활약을 보인 독립운동가였는데, 좌익 노선을 걸었던 공산주의자였다고 해서 오랫동안 잊히고 침묵 속에 묻혀 있었다. 그러다 1990년대의 의열단 연구 속에서 비로소 그 이름이 드러나기 시작하였고, 2000년대 들어 생애 전체와 공적이 상세히 구명되기에 이르렀다.

윤자영은 혁명가였고, 윤자영이 추구한 혁명은 제국주의 타도와 독립국가 건설의 민족혁명이었다. 그런 의미에서의 ‘혁명가’ 윤자영3.1운동의 아들로 탄생하였고, 국내 청년운동과 사상운동을 통해 단련된 후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상해파(上海派)의 새 기린아임과 동시에 상하이 독립운동계의 총아가 되었다. 이어서 1920년대 후반기에 만주 지역에서 간고(艱苦)하게 전개된 공산주의운동의 한 조타수였다가 국내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의 최전선에서 그 향도(嚮導)를 자임하였다. 그러다 일제의 심한 탄압과 중국공산당의 기세에 눌리자 구소련으로 건너가 재기를 도모하던 중, 공산독재 스탈린 정권의 정치적 대숙청의 이면에서 은밀히 작용한 약소민족 희생정책의 제물이 되었다. 그래서 더욱 비극적 인물이 된 윤자영은 민족운동과 공산주의운동의 두 전선에서 줄곧 분투 헌신하다 못 이룬 꿈을 안은 채 비운에 스러져 갔다.

성인기 이후로 윤자영이 평생 걸어간 국내외 독립운동 행로는 그 활동 공간과 노선에 따라 국내 활동기, 상하이 활동기, 만주 활동기, 그리고 중국공산당 내 및 구소련 활동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초기 경력과 혁명가로의 입신]

궁벽한 산골 출신의 윤자영이 세상의 전면으로 나아간 것은 1913년경의 상경이 계기가 되었다. 빈농 신세이지만 한때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지낸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서울로 간 윤자영은 재동(齋洞) 60번지의 천하운(千河運) 집에 기숙하면서 경성공업전습소(京城工業傳習所) 도기과(陶器科)에 다녔고, 임시토지조사국(臨時土地調査局)에 들어가 정리과(整理科)의 기수(技手)로 일하면서 학비를 조달하였다. 윤자영의 생년이 자필기록에는 1896년인데, 공식문서에는 1894년으로 되어 있는 것은 입학이나 취직의 연령 요건을 맞추기 위해 끌어올린 것으로 추측된다. 윤자영이 안동 옥동(玉洞) 출신의 권씨와 결혼한 것은 상경 전후 무렵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고, 나중에 윤자영이 국외 망명하면서 자연히 헤어진 뒤로는 다시 결합하지 못한 채 부인은 1944년 사망하였다.

윤자영은 경성공업전습소를 졸업하고 1918년 3월 토지조사국에서 서기(書記)로 퇴직한 후 곧바로 경성전수학교(京城專修學校)[후일 경성법률전문학교를 거쳐 지금의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으로 계승]에 다녔다. 20대 중반의 만학도로서 1학년 말이던 1919년 초에 윤자영3.1운동 지도부의 일원이 되었다.

윤자영은 학생층의 3.1운동 계획 단계에 가담하여, 2월 20일경 김성득(金成得)과 함께 경성전수학교 연락책으로 지명되면서 학생 동원 임무를 맡았다. 윤자영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이용설(李容卨), 경성의학전문학교의 한위건(韓偉健), 보성전문학교의 한창환(韓昌桓) 등과 함께 2단계 시위투쟁을 결의하였고, 시위가 시작되면서 전체 과정을 이끌어 갈 지도자의 일원으로 배치되었다. 그리하여 윤자영은 3월 1일 거사 당일에 김성득과 함께 경성전수학교 학생들에게 선언서를 배포하고 종로 부근에서 벌어진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 일로 즉시 경찰에 체포된 윤자영은 취조 후 검사국으로 송치되어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죄목으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이 선고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있으면서 항소하였는데, 1920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고, 1920년 5월 27일 출옥하였다.

출옥 직후 윤자영은 망설임 없이 청년운동 대오에 가담하였다. 6월 말에 조선청년회연합회(朝鮮靑年會聯合會) 기성회 설립에 참여하여 22인 집행위원의 일원으로 선출되었고, 다른 8인과 함께 지방부 위원을 맡았다. 12월 2일 연합회 창립총회에서 서무부 상무위원이 되었고, 1921년 4월 제2차 정기회의에서 교무부 상무위원으로 직을 옮겼다. 그리고 기관지 『아성(我聲)』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그해 3월부터 10월 사이에 네 번 간행된 이 잡지에 「유물사관 요령기」를 필두로 「상호부조론」을 포함한 12편의 논설·에세이·시·시조를 기고하여 실었다. 그 작품들 속에서 윤자영은 ‘인류 역사 후기(後紀)의 유토피아 도래’에 대한 열망을 시종 드러내보였다.

앞서 1921년 1월 27일 김한(金翰), 김사국(金思國), 이영(李英), 김명식(金明植) 등의 주도로 서울청년회가 창립될 때도 참여하여 이사가 되었다. 또한 1921년 3월에는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에 가입하여, 61명 대표 중 1인이 되어 활동하였다. 같은 해 6월 조선학생대회(朝鮮學生大會) 주최의 강연회에서 연사로 나선 후로 8월부터 오상근(吳祥根), 신현직(申鉉稷) 등과 함께 전국 순회 강연에도 참여하여, 9월까지 평안북도 강계, 평안남도 안주, 충청남도 조치원, 충청북도 청주, 경상남도 창녕·밀양·양산·울산 등지에서 청년회 대표를 만나고 강연회를 가지면서 청년운동의 확산을 추동하였다. 강연에서 윤자영은 사회개조운동의 의의와 그 선구자로서 청년들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공개적 활동과 별개로 윤자영은 1920년 6월 서울에서 비밀리에 결성되어 있던 사회혁명당(社會革命黨)에 가입하여 사회주의운동에도 입문하였다. 사회혁명당은 이동휘(李東輝)가 이끄는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과 연합하여 1921년 5월 중국 상하이에서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을 결성하여 창립시켰다. 이것은 윤자영의 향후 행보를 결정지은 중요한 사건이었다.

[상하이에서의 맹활약]

윤자영은 1921년 말에서 1922년 상반기 사이에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상해파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당에서 발간하는 잡지 『효종(曉鐘)』[새벽종]과 신문 『투보(鬪報)』의 편집에 참여하면서 기고하여, 두각을 나타내고 주위의 기대를 모았다.

1922년 10월 고려공산당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통합을 목적으로 소집되어 러시아 극동 아무르주(州)의 베르흐녜우딘스크에서 열린 당 대회에 윤자영은 마산 지역 대표로 참석하였다. 회기 중에 의장단의 일원으로 뽑혀서 의사진행을 주재하였다. 윤자영은 대회 종료 직후 이동휘, 김아파나시와 함께 코민테른에 보고차 파견되는 대표로 선출되어 1923년 1월에 모스크바로 갔다. 그러나 이르쿠츠크파의 반발로 코민테른은 이 대회의 결의 내용을 승인하지 않고 오히려 양파 해산을 명하였다. 그러면서 극동부 산하에 고려공산당 중앙총국[통칭 꼬르뷰로(Korburo)]을 설치하고, 윤자영을 위원 중 한 명으로 선임하였다.

윤자영은 1923년 2월 국민대표회의에서의 사회주의자들의 행동 통일을 지도하기 위해 김만겸(金萬謙)과 함께 꼬르뷰로 대표로서 상하이로 파견되었다. 2월 12일부터 경상북도 대표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하여 「시국결의안」을 제안하여 통과시키는 데 주역이 되었고, 안창호(安昌浩) 그룹 및 서간도(西間島)의 무장독립운동 세력과 함께 임시정부 개조파의 한 축을 이룬 상해파 고려공산당 그룹을 김철수(金錣洙)와 함께 이끌었다. 그러면서 임시정부를 대체할 신조직 건설론의 창조파[이르쿠츠크파는 여기에 가담]와 이승만(李承晩) 그룹 등의 정부 유지파 양쪽을 견제하면서 회의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는 정부 존폐 문제에 대한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한 채 정파·세력간 골만 키우고 1923년 6월 폐회되었다. 그러자 윤자영은 이 실패 책임론의 후폭풍에 시달렸으나, 7월 2일 임시대통령 이승만에 의해 임시헌법개정 기초위원 16인의 일원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실제의 개정 작업은 성과를 내지 못하고 지지부진하였다.

이 무렵 윤자영은 의열단에 가입하였고, 단장 김원봉(金元鳳) 외 김상윤(金相潤), 이종암(李鍾岩), 한봉근(韓鳳根)과 함께 5인 참모부[‘기밀부’라고도 함]의 일원이 되었다. 윤자영의 의열단 가입은 가장 전투적이면서 활동 실적도 돋보이는 민족혁명단체로 코민테른에서 인정한 의열단을 고려공산당의 합작단체로 삼거나 그 영향력 아래로 끌어들이려는 포석에 따른 것이었다.

1923년 9월 1일 발생한 일본의 간토대지진[關東大地震] 때 6천 명 이상의 재일조선인들이 무참히 살해되자 의열단이 복수 응징의 거사를 계획하였고, 이에 김지섭(金祉燮)이 나서기로 하였다. 그러자 윤자영이 일본인 사회주의자 히데시마[秀島廣二]에게 김지섭을 소개하여, 일본 화물선을 타고 밀항해 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리하여 1924년 1월 5일 김지섭의 도쿄 황궁 앞 니주바시[二重橋] 폭탄거사가 감행될 수 있었는데, 이 정보를 입수한 상하이 일본총영사관 경찰이 체포령을 내려 추적하자 윤자영은 피신하였고, 프랑스 조계(租界) 경찰의 보호 덕분에 미체포 상태에서 기소되었다.

국민대표회의 때의 개조파 활동의 연장선에서 윤자영은 통일전선 조직의 창설을 도모하였다. 그 결과 1924년 4월 5일 프랑스 조계 삼일당(三一堂)[한인 전용 예배당]에서 성사된 (한인)청년동맹회(靑年同盟會) 창립의 주역이 되어, 총회에서 사회를 보고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민족적 일치단합 아래 대동단결하여 희생적 정신으로 독립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동맹회의 주된 슬로건이었는데, 안창호 세력과 임시정부 지지파 청년들이 두루 포함되었다. 회원 수는 200명을 넘었고, 윤자영은 그 핵심 인물 중 한 명으로 있었다.

윤자영이 6월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회의에 출석하여 발언한 자료가 있는데, 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는지의 여부는 불분명하다. 이 무렵 윤자영은 불가살(不可殺)이라는 별명을 쓰면서 일제 당국을 조롱하는 기개를 내보였으며, 8월 29일 국치(國恥) 기념회에서 기념사를 하였다. 1924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꼬르뷰로를 대체하며 설립된 통일적 고려공산당 조직위원회[통칭 오르그뷰로(Orgburo)]에서도 지도적 임무에 종사하였고, 비밀기관지 『거화(炬火)』[횃불]의 편집을 맡아서 남다른 문필 재능을 발휘하였다.

청년동맹회 세력이 급속도로 커져가면서 마침내 의열단과 경쟁관계가 되자, 1924년 9월경 청년동맹회에서 선언서를 발표하면서 의열단의 운동방략을 ‘공포론[현대어로는 ‘테러리즘’]’으로 규정짓고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그러자 이 성명서 작성과 발표의 가장 큰 책임은 윤자영에게 있다고 하여 의열단원들이 그를 찾아와 구타하였다. 이 충돌사태는 김원봉이 곧 사과함으로써 겨우 봉합되었으나, 상해파 고려공산당 혹은 윤자영과 의열단과의 밀월관계는 깨져 버렸다.

1925년 8월 29일 발행된 청년동맹회 회보 제1호에서는 ‘민족의 전도를 과학적 공산주의로 인도하면서 독립이 될 때까지는 민족혁명에 공헌할 것’이라는 노선 방침이 천명되었고, 더불어 윤자영은 정치사회연구부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그때 8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윤자영은 상하이대학[上海大学]을 다니며 청강하였다.

[만주와 국내에서의 간고한 투쟁]

1926년 4월 윤자영은 만주 지린성[吉林省]으로 활동무대를 옮겨 갔다. 앞서 1925년 11월에 일경의 검거망을 피해 국내로부터 탈출해 온 김찬(金燦)을 만나 협의한 결과, 만주에 조선공산당 총국을 건설하기로 방침을 정한 데 따른 것이었다. 5월 16일 지린성 위사현(葦沙縣) 일면파(一面坡)에서 김하구(金河球)와 함께 조선공산당 만주총국(滿洲總局) 결성에 착수하여, 화요파의 최원택(崔元澤), 조봉암(曺奉岩), 김동명(金東明)과의 합작으로 만주총국을 건설하였다.

본거지를 지린성 닝안현[寧安縣] 닝쿠타[寧古塔]에 두고 동만·남만·북만 구역국을 두었으며, 조봉암을 책임비서로 하고 윤자영은 선전부장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화요파가 주도권을 쥐고 전관하려 들어 분쟁이 발생하였고 윤자영은 신병을 이유로 들어 사퇴하였다. 그리고 1927년 3월 모스크바로 갔다가 5월에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으며, 7월에 북간도 룽징[龍井]에서 상해파만으로 ‘재만조선공산주의자동맹(在滿共産主義者同盟)’을 결성하였다. 상해파 조직과 노선에 대한 그의 한결같은 충심과 애착이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1928년 코민테른의 ‘12월 테제’가 발표되자, 1929년 2월 하순경 상해파의 방침에 따라 동지들과 더불어 만주 지린성 툰화현[敦化縣]으로 옮겨갔다. 그곳 향수하자(香水河子)에서 3월 하순경 ‘조선공산당 재건설 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는데, 책임자는 김철수였고 2인자인 윤자영은 중앙집행위원이면서 조직부 책임자가 되었다. 이들은 팸플릿 형태의 기관지 『볼셰비키』를 발간하여 선전에 주력하였고, 코민테른이 하달한 ‘1국1당’ 원칙에 따라 중국공산당에 속속 입당하고 있던 ML파나 화요파와는 달리 국내에 당 및 공청 조직을 새로 세우기 위해 1930년 1월에 김철수, 안상훈(安相勳), 송무영(宋武英) 등이 연이어 잠입하였다. 그러나 몇 달 안 가 그들이 체포되자, 윤자영은 조덕진(趙德津), 김일수(金一洙), 홍달수(洪達洙) 등을 파견 잠입시켰고, 이윽고 1930년 10월 중순에 그 자신도 국내로 잠입하였다.

입국 후 윤자영은 조선국내공작위원회의 조직부 책임을 맡고, 김일수, 조덕진과 함께 중화학공업 밀집지대인 함흥 중심의 함경남도 일대에서 산업노동자 포섭을 통하여 ‘조선혁명을 위해 조선인만으로 구성된 공산당’ 재건을 위한 세포조직으로서의 혁명적 노동조합의 건설 및 확대·강화에 주력하였다. 또한 서울청년회계(-靑年會系)와의 제휴도 시도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중앙기관 산하의 지방기관으로 경의선, 경부선, 함경선 남부, 함경선 북부의 4개 위원회를 설립하는 데 성공하였고, 서울, 부산, 진주, 거제, 대구, 포항, 광주, 재령, 함흥, 원산, 청진 등 전국의 도시와 철도 연선의 공장들 속에 비밀 세포기관[야체이카]을 설립해 가면서 좌익 노동조합이 조직되도록 공작하였다. 또한 신간회, 노동총동맹, 농민총동맹, 청년총동맹 등의 대중단체에 영향력을 발휘할 비밀 지도부도 결성했다.

그러나 출범한 지 1년 반 정도 지나면서 재건설 준비위원회는 존폐의 기로에 봉착하였다. 조직 자체의 결함이나 구성원 문제 때문이 아니라, 이미 1930년 7월경 위원회에 대하여 ‘파벌적 색채가 농후’하다며 반(半)공식적으로 해체 명령을 내렸던 코민테른 극동부의 지시와 간섭 때문이었다. 이에 위원회는 자진 해산과 동시에 ‘조선 좌익노동조합 전국평의회 조직준비위원회’로 개편함으로써 돌파구를 찾았고, 윤자영은 그 집행위원이 되었다. 그러나 이 또한 코민테른의 결정에 위반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결국 서울-상해파 구성원들은 재차 조직을 해체하고 개인 자격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 5월 낌새를 채고 대검거에 착수한 일본 고등경찰에 의해 전국에서 수백 명이 체포되었다. 그런 중에 ‘수뇌’로 지목된 윤자영은 어쩔 수 없이 수사망을 벗어나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北間島)로 탈출해 갔다. 1927년경 룽징에서 활동할 때 만나 동거해 온 젊은 여성 활동가 이근영(李槿英)을 동반하였다.

[중국공산당과 소련의 그늘에서, 그리고 비극적 최후]

북간도로 되돌아간 윤자영은 그제야 비로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정일영(丁一英)’으로 이름을 바꾸어, 6월부터 만주성위원회 동만주특별위원회의 조직부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1932년 9월 26일 윤자영은 모스크바 국제레닌학원 입학을 희망하니 협력해줄 것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요청하였다. 청원이 받아들여져 모스크바로 갔으나 국제레닌대학 입학 청원은 각하되고, 그 대신에 동방노력자공산대학(東方勞力者共産大學) 입학이 허용되어 그곳에서 수학하였다. 윤자영은 본명을 윤자엔(Yun Za Yen)으로 표기하면서 첸민(Chen Min)이란 가명도 썼다.

1934년 12월 구소련 최고통치자 스탈린의 정치적 대숙청 작업이 개시된 후, 윤자영은 ‘반당분자’로 낙인 찍힌 지노비에프(G. Zinoviev)의 동조자 혐의를 받아 체포되었다. 투옥되어 있던 윤자영은 1938년 10월 2일 카자흐스탄 북쪽의 노보르시비르스크주 내무인민위원회에서 ‘반혁명’을 이유로 총살형을 선고받고 10월 14일 집행되었다. 스탈린의 대숙청 작업 이면에 은밀히 작동하였던 소수민족 탄압정책이 빚은 억울한 희생이고, 윤자영의 이전 운동행로에 비추어보면 너무도 비극적인 죽음이었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후 윤자영의 처형은 부당한 것이었음이 인정되어, 1958년 12월 19일 복권이 공표되고 명예도 회복되었다.

[오래 기억되어야 할 윤자영의 독립운동]

식민지 조선이 낳은 걸출한 혁명가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윤자영은 일생 내내 매우 헌신적인 태도로 일관하며 진취적인 자세를 견지해 간 인물이었다. 뛰어난 문필과 언변으로 선전 부문의 출중한 재사였으며, 조직가로서의 면모와 능력도 특출하였다. 운동 과정에서는 합법 영역과 비합법 영역을 적절히 배합하여 운용하는 능력을 탁월하게 발휘하였고, 안전지대를 떠나 악명 높은 일제 고등경찰에 맞서 지하운동을 벌이기로 결심하여 실행하는 용기도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이른바 1국1당 원칙에 쉽게 동조하지 않고 조선인만의 독자적 공산당 재건을 꾀하면서 조선혁명의 주권을 지키고자 하는 진정한 독립운동가였다. 때문에 임경석이 『진보평론』 제3호에서 윤자영을 ‘휘몰아치는 광풍 속에서도 조선혁명의 최전선에서 느티나무같이 꿋꿋이 버텨선 혁명가’로 표현한 것은 단순한 수사적 표현이 아닌 것이다. 평생에 걸친 윤자영의 불굴의 독립운동 공적은 뒤늦게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아 2004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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