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15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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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光奎 |
영어공식명칭 | Cho Kwanggyu |
이칭/별칭 | 명서(明瑞),간은(磵隱)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851년 9월 5일 - 조광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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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96년 3월 - 조광규 청송의진 참모 활동 |
몰년 시기/일시 | 1927년 06월 23일 - 조광규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7년 - 조광규 건국포장 추서 |
출생지 | 경상북도 청송군 청송면 송생리 |
거주|이주지 | 경상북도 청송군 청송면 송생리 |
활동지 | 청송의진 - 경상북도 청송군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청송의진 참모 |
[정의]
개항기 청송 출신의 의병.
[개설]
조광규(趙光奎)[1851~1927]는 1896년 3월 청송의진의 참모로 선임되어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가계]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명서(明瑞), 호는 간은(磵隱). 1851년 9월 5일 청송군 청송면 송생리에서 아버지 조성종(趙性宗)과 어머니 전의이씨(全義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질이 총명하여 재주와 학식으로 문명을 떨쳤다. 정절공(貞節公) 어계(漁溪) 조려(趙旅)[420~1489]의 후예로 입향조 망운(望雲) 조지(趙址)가 청송 안덕(安德)에 들어와 살면서 그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활동 사항]
조광규는 1896년 3월 창의한 청송의진에 참여하여 참모로 활동하였다. 1896년 3월 8일 안동의진의 소모장(召募將)인 유시연(柳時淵)이 청송에서 군기(軍器)를 모집하고 의병을 일으킬 것을 촉구하는 격문을 향중(鄕中)에 발하며 창의를 촉구하자 이에 고무된 청송 유림들과 함께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내걸고 창의를 추진하였다.
1896년 3월 12일 청송유림 200여 명과 함께 향회(鄕會)를 개최하여 창의하기로 하였으며, 이날 오후 객사(客舍)에서 창의장으로 심성지(沈誠之)[1831~1904]를 추대하였다. 이리하여 청송의진은 창의장 심성지(沈誠之)를 비롯하여 부장 조성박(趙性璞), 중군장 김대락(金大洛), 좌익장 김상길(金相吉), 우익장 남두희(南斗凞), 사병도총 남승철(南昇喆), 의영도지휘사 서효원(徐孝源) 등을 추대하여 진용을 갖추었다.
그 뒤 청송의진은 의병 활동 과정에서 군비의 효율적인 모집과 운용을 위해 4월 6일과 4월 29일 크게 두 차례에 걸쳐 지휘부의 편제를 정비하였다. 4월 29일 참모 신동호(申東鎬)가 주도하여 각 부대를 창의장 중심으로 재편성하여 상영(上營)[총영(摠營) 혹은 내영(內營)]과 그 아래 각영(各營)으로 편제를 정비하였다. 이때 조광규는 조성로(趙性魯), 조성원(趙性源), 심능규(沈能奎), 민동호(閔東鎬) 등과 함께 참모(參謀)로 선임되었다.
청송의진은 5월 9일 흥해출진소(興海出陣所)와 5월 22일 영덕출진소(盈德出陣所)를 설치하여 주변 지역의 의병부대와 협력하였다. 청송의진은 5월 20일과 21일 연이어 대구에 주둔하고 있는 관군이 영덕으로 진군하고 있다는 사통을 받았다. 이에 청송의진이 5월 22일 포군 3초(哨)를 파견하여 영덕출진소를 설치하였는데, 그는 참모로 우익장 권성하(權成夏)·후방장 장무호(蔣武鎬)·종사관 심〇(沈〇)·서기 윤효업(尹孝業) 등과 함께 영덕출진소로 파견되었다. 5월 22일 저녁 영덕의진이 관군의 공격을 받고 패한 뒤 귀환하였다.
5월 24일 국왕 고종의 해산 칙유문(勅諭文)을 받은 청송의진은 청송군 관내 8개면으로 분진(分陣)하여 면군체제(面軍體制)로 전환하였다. 그 후 6월 15일 경주연합의진(慶州聯合義陣)의 결성에 참여하여 6월 18일 경주성전투(慶州城戰鬪)를 벌였으며, 6월 28일 영덕연합의진(盈德聯合義陣)의 결성에 참여하여 7월 13일과 14일 영덕전투(盈德戰鬪)를 벌이는 등 진영을 해산하는 8월경까지 활동하였다. 조광규는 1927년 6월 23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