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A030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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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병구 |
이한탁 씨, 그는 배움에 대한 미련은 별로 없어 보인다. 6·25 후 수안보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석 달을 다녔지만, 너무 거리가 멀어 다니다 말았다고 한다. 하기야 산길 왕복 60리 길을 다닌다는 것은 사실 어린아이에게 무리였을 것이다. 그 뒤에 미륵사지의 집 한 채에서 가마니 깔고 글 아는 동네 사람이 가르쳐 주었고 다시 수안보초등학교 김창진 선생님이 ‘정식으로 와서’ 공부를 가르쳤지만 제대로 졸업을 못했다. 군대 가기 전 농사 짓고 제대한 후에도 당근, 수수 농사를 몇 해 지었지만, 농사 갖고는 성에 안차 ‘안되겠드라구’라고 생각했단다. 그리하여 농사를 치우고 미륵리에서 나는 자수정을 캔다고 몇 해 허송세월하다가 1977년도에 새마을지도자를 하라고 마을에서 권하여 맡게 되었단다. 그 때는 어린 나이에 이장보는 사람도 있었고, 돌아가며 마을 일을 보는 터라 아무 생각 없이 직임을 맡았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그 해 미륵리 전기 공사를 했는데 지릅재 너머 석문동 가서 토지 승낙을 받느라 수십 번을 건너 다녔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전주도, 구덩이도, 심지어 전주 세우는 것까지 전부 마을 주민들이 했다고 한다. 참 고생 많이 했다고 한다. 그는 그 일을 하느라 논에 모도 못 심고 다른 사람 먼저 심으라고 양보한 덕분에 “난 논 2마지기도 지대로 못 심겄어. 그래도 그 해 11월에 전기가 들어오니 얼매나 좋어! 그 때 전기 들어오고 개발돼서 이만치나 살어” 스스로에게 대견하다고 다짐하는 듯 했다.
1975년부터 안말의 주택을 이주시켰는데 하필 새마을지도자가 된 다음인 1977년 2월부터 담 쌓기를 시작했다. 물을 뜨겁게 데워 가면서 마을 담치느라 무진장 고생했다. ‘아마도 고생을 달고 다니는가 부다’ 했단다. 그렇게 77년을 보내며 새마을지도자 한답시고 총 10만원의 빚을 졌다. 그렇게 고생한 댓가는 있었다. 전라도 전주에서 그 해 새마을지도자대회가 있었는데 박정희 대통령 표창과 부상으로 시계, 그리고 상금 100만원을 받았다. 상금으로 소 2마리를 사서 마을에서 키웠었다. 그러나 개인 빚 10만원은 누가 갚아주는 것이 아니었다. 빚지고 못사는 성격이라 빚을 갚기 위하여 문경 봉명 탄광에 가서 일하다가 굴러 떨어진 돌에 맞아 병원에 실려 갔었지만, 이후 돈이 없어 병원에도 제대로 못 다녔다고 한다. 아픈 몸을 이끌고 추석을 지내러 집에 오니 송이버섯이 많이 나온다고 하더란다. 송이를 따다 팔아서 빚을 다 갚았다고 한다. 오히려 쉽게 해결될 것을 공연히 고생만 했다고 한다. 당시 ‘부지런히 논둑 다녀야’ 일당 800원. 그래서 잠시 의정부 소홀면에 있는 과수원에 가서 일해 주며 먹고 살았다. 그러나 그 일도 여의치 않자 집이 있고 논다랭이가 있는 미륵리로 다시 돌아 왔다. 그러던 차에 국립공원 사무소 직원 채용한다는 소식을 듣고, 미륵리의 송어횟집에 저녁 먹으러 온 국립공원 사무소장에게 무조건 찾아 가서 먹고 살게만 해준다면 열심히 하겠노라 부탁을 했다. 소장은 어떤 생각이었는지 며칠 후 미화요원으로 채용하였고 이후 15년 동안 정말 열심히 일했다고 했다. 이후 퇴임하고 1985년부터는 산불감시원으로 근무하던 중 2008년 산림종자연구소 정식 직원으로 특별 채용되었다. 그것도 나이 65세에 … 이유인즉슨 산림종자연구소의 산림채종원이 미륵리 북바위산에 있는데 타 지역 사람들은 출퇴근 교통비와 오지 근무에 따르는 수당 등을 요구하고 있던 차에 연구소에서는 미륵리 마을 사람으로 채용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한다. 마침 산불감시원으로 성실성을 인정받은 이한탁 씨가 고령에도 불구하고 특별 채용된 것이다.
그는 오늘도 5시에 퇴근하여 오토바이로 수안보면 수회리에 있는 산림종자연구소에 가서 근무 상황을 보고한 후 의기양양하게 6시 쯤 집에 돌아와 저녁 밥상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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