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04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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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邱 桐華寺 金堂 庵東西三層石塔 |
영어공식명칭 | East and West Three-story Stone Pagodas at Geumdangam Hermitage of Donghwasa Temple, Daegu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탑과 부도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동화사1길 1[도학동 35]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배성혁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57년 - 대구 동화사 금당암 동·서 삼층석탑 서탑, 해체 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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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1963년 1월 21일 - 대구 동화사 금당암 동·서 삼층석탑, 보물 제248호로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대구 동화사 금당암 동·서 삼층석탑, 보물로 재지정 |
현 소재지 | 대구 동화사 금당암 동·서 삼층석탑 - 대구광역시 동구 동화사1길 1[도학동 35] |
원소재지 | 대구 동화사 금당암 동·서 삼층석탑 - 대구광역시 동구 동화사1길 1[도학동 35] |
성격 | 석탑 |
양식 | 2단의 기단 위 3층 탑신을 세운 형태 |
재질 | 화강암 |
크기(높이) | 5.24m |
소유자 | 동화사 |
관리자 | 동화사 |
문화재 지정 번호 | 보물 |
[정의]
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에 위치한 동화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쌍탑.
[개설]
동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이다. 창건 시기에 대해서는 493년(신라 소지왕 15)에 극달화상이 창건하여 유가사(瑜伽寺)라 부르다가, 832년(흥덕왕 7)에 왕사(王師) 심지(心地)에 의해 중창되었는데 사찰 주변에 오동나무꽃이 상서롭게 피어 있어 동화사(桐華寺)라 고쳐 불렀다고 전하는 기록들이 있다. 그러나 5세기는 아직 신라에서 불교를 공인하기 이전이며, 사찰 내 5세기대 유구 및 유물이 전혀 확인된 바 없어 신빙성에 문제가 제기된다. 따라서 학계에서는 『삼국유사(三國遺事)』권4 「심지계조조(心地繼祖條)」에 신라 헌덕왕의 아들이었던 심지가 갖은 고행 끝에 속리산의 영심(永深)이 율사 진표(眞表)로부터 받은 불골간자(佛骨簡子)를 전수받아 팔공산으로 들어온 후 불골간자를 던져 떨어진 곳에다 절을 짓고 동화사라 했다는 기록과 경내에 남아있는 석조물의 조성시기, 같은 시기 신라사회에 유행한 사찰 확산 경향 등을 근거로 832년(흥덕왕 7)에 왕사(王師) 심지(心地)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높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934년(태조 17) 선사 영조(靈照), 1190년(명종 20)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1298년(충렬왕 24) 국사 홍진(弘眞)이 각각 중건하였다. 조선시대에는 1606년(선조 39) 유정(惟政), 1677년(숙종 3) 상숭(尙崇), 1732년(영조 8) 관허(冠虛)·운구(雲丘)·낙빈(洛濱)·청월(晴月) 등이 중창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금당암과 그 앞에 세워진 대구 동화사 금당암 동·서 삼층석탑은 832년(흥덕왕 7)에 왕사(王師) 심지(心地)에 의해 동화사가 창건될 당시 세워졌을 가능성이 높다.
[위치]
팔공산 중턱에 위치한 동화사는 계곡을 중심으로 동·서 두 사역(寺域)으로 크게 나눠지는데, 금당암은 동쪽 사역내에 위치한다. 대구 동화사 금당암 동·서 삼층석탑은 금당암의 극락전 앞에 동서로 자리하고 있다.
[형태]
[동탑]
대구 동화사 금당암 동·서 삼층석탑은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형태이다. 동쪽의 탑은 2단의 기단 대부분이 나중에 보수되었다. 돌을 다듬은 기술이나 마감처리 부분에서 원래 치석[돌을 다듬음]상태나 결구(結構)[격자로 짜 맞춘 형태]에 있어 자연스럽지 못하다.
하층 기단은 지대석(地臺石)[탑이 세워질 지면을 단단하게 다진 후에 놓는 돌]과 면석(面石)[상층기단과 하층기단의 주축부로 네 면을 이루는 벽체부분]을 하나의 돌에 새겼는데, 면석에는 대나무 모양으로 조각된 모서리기둥[우주(隅柱)]과 받침기둥[탱주(撑柱)]에 새겨져 있다. 하층기단을 덮는 석판[하대갑석(下臺甲石)]의 네 귀퉁이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있고 상면 중앙부분에는 ‘정(井)’자형의 테두리 장식이 새겨져 있다. 상층 기단의 면석에도 각 면마다 우주와 탱주가 새겨져 있으며, 상층기단을 덮는 석판[상대갑석(上臺甲石)]은 판석 2장을 옆으로 붙여 덮었는데, 밑면에는 부연(副椽)[탑의 기단의 갑석 하부에 두른 모서리를 도드라지거나 오목하게 깎음]을 새겼고, 윗면에는 2단의 테두리 장식을 두었다.
탑신부(塔身部)는 각 층의 몸돌[탑신석(塔身石)]과 지붕돌[옥개석(屋蓋石)]을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었는데, 모서리기둥[우주] 외 별다른 조각이 없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 받침을 새겼고, 윗면에는 몸돌을 받치기 위해서 2단의 테두리 장식으로 새겼으며, 전각(轉角)[지붕돌의 처마와 처마가 마주치는 부분]에는 풍탁[풍경, 범종을 축소한 형태의 장식]을 달았던 구멍이 뚫려 있다. 상륜부(相輪部)에는 노반(露盤)[탑의 최상부 지붕돌 위에 놓아 상륜부를 받치는 부재] 위에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 모양의 장식]·앙화(仰華)[상륜부 가운데 연꽃잎이 사방으로 피어 있는 형태]·보륜(寶輪)[탑의 꼭대기에 있는 9층의 둥근 원반형 장식]·보주(寶珠)[탑의 가장 꼭대기에 위치하는 부재로서 구슬 모양]가 차례로 올려져 있다. 석탑 앞에 자리하고 있는 돌로 된 상[상석]은 석탑의 받침돌을 보수할 때 마련한 것으로 추정된다.
[서탑]
서탑의 하층 기단의 면석은 4장의 돌로 구성되었는데, 각 면마다 모서리기둥[우주]와 함께 1개 받침기둥[탱주]이 새겨져 있으며, 갑석은 판석 2장을 붙여서 덮었다. 상층 기단의 면석은 각 면이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는데, 두 면에만 모서리기둥과 받침기둥을을 새겼고, 다른 두 면에는 받침기둥만 새겼으며, 갑석은 1장으로 덮었다. 탑신부는 동탑처럼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올렸다. 몸돌에는 모서리기둥 외에 다른 장식을 하지 않았고, 지붕돌에는 밑면과 윗면에 각각 4단의 받침과 2단의 각지고 둥근 테두리 장식이 새겨져 있다. 3층 지붕돌 위에는 노반과 찰주(擦柱)[탑 꼭대기의 장식물을 지탱하는 버팀대]만이 남아 있고 다른 머리장식은 없어졌다.
[현황]
대구 동화사 금당암 동·서 삼층석탑은 원래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동탑은 보수된 부분이 많고, 서탑은 1957년 해체 후 수리하였다. 해체 당시에 서탑 속에서는 작은 탑[소탑(小塔)] 99개를 비롯하여 사리장치(舍利藏置)가 발견되었다.
[의의와 평가]
대구 동화사 금당암 동·서 삼층석탑은 조각의 양식이나 끝맺음 수법이 서로 비슷하고, 균형 또한 잘 이루어져 있다. 부분적으로 유실되거나 변형된 부분이 있지만 기단, 탑신, 머리장식부의 세부적인 양식이 통일신라시대 후기의 전형적인 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남북국시대 석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대구 동화사 금당암 동·서 삼층석탑은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48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보물로 재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