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2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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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漢陽府 |
이칭/별칭 | 광릉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김우택 |
[정의]
고려 시대 서울특별시 도봉구에 설치된 행정 구역.
[제정 경위 및 목적]
1308년(충선왕 즉위년) 충선왕이 중앙과 지방 관제 전반을 개정하면서 기존의 남경(南京)을 한양부(漢陽府)로 개편하였다. ‘한양’이란 명칭은 신라 시대의 ‘한양군(漢陽郡)’이라는 지역 명에서 가져온 것이다.
[관련 기록]
『고려사(高麗史)』 지리지 양광도 남경 유수관 양주 항목에서 “충렬왕(忠烈王) 34년에 고쳐 한양부로 삼았다. 별호(別號)를 광릉(廣陵)이라 한다”라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같은 책의 백관지 외직 남경 유수관 항목에는 “충렬왕 34년에 한양부로 고쳐 윤(尹)·판관(判官)·사록(司錄)을 두었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유사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권3 한성부(漢城府)조에 따르면 “충렬왕 때 한양부라 고치고, 공양왕(恭讓王) 때 경기좌도(京畿左道)에 속하게 하였다. 우리 태조(太祖) 3년 여기에 도읍을 정하고, 한성부라 고쳤다”라 하였다. 또한 『고려사』 속악 양주조에 “양주는 고려 한양부이니 북쪽에는 화산(華山)이 웅거하였고 남쪽에는 한강(漢江)에 입하였다. 토지가 평탄하고 물산이 풍부하여 번화한 품이 다른 고을에 견줄 바 아니다”라는 이야기도 있다.
[내용]
남경이 한양부로 개편된 것은 지위가 격하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개경(開京), 서경(西京)과 함께 남경으로서 3경 중 하나라는 위상을 지녔던 이 지역은 한양부로 개편됨으로써 다른 여러 부(府)와 같은 지위로 낮추어졌다. 당시 한양부는 교하군(交河郡), 견주(見州), 포주(抱州), 행주(幸州), 봉성현(峯城縣), 고봉현(高峯縣), 심악현(深嶽縣), 풍양현(豊壤縣), 사천현(沙川縣)을 관할하였다. 이는 곧 한양부의 영역이 현재의 서울특별시 강북 지역과 그 주변으로 축소되었음을 의미한다. 남경 유수관이었을 때는 3군 6현 외에 도호부[안남도호부 수주(安南都護府樹州)] 1, 지사군[인주(仁州), 즉 경원군(慶源郡)과 수주(水州), 즉 매홀군(買忽郡)] 2, 현령관[강화현] 1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변천]
한양부 지역은 고려 초에는 양주에 속하였다. 그리고 문종(文宗) 대 이후 남경으로 승격되어 3경 하나로 지위가 격상되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경’의 상태를 유지한 것은 아니며, 시기에 따라 양주로 환원되거나 남경으로 복원되다가 충선왕 대에 한양부로 개편되었다. 공민왕 대에 한때 남경으로 격상되었다가 다시 한양부로 환원되었으나, 이후 한양으로의 천도가 논의되면서 주목되었다. 천도를 둘러싼 논의는 공민왕 대 이후에도 조정의 중요한 안건이 되었으며, 마침내 조선이 건국되면서 한양 천도가 단행되었다.
[의의와 평가]
충선왕이 남경을 한양부로 격하시키고 전국에 부를 늘린 이유는 지방관의 독자성을 견제하면서 왕권을 침투시키려는 의도로 보기도 한다. 관할 영역의 축소도 위상 저하와 함께 이러한 목적을 보여 준다. 그러나 “토지가 평탄하고 물산이 풍부하여 번화한 품이 다른 고을에 견줄 바 아닌” 이 지역의 입지적인 중요성은 여전하여, 공민왕 대 이후 점차 다시 격상되었고 조선 시대에는 수도로 선정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