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5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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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弼周 |
이칭/별칭 | 상보(尙甫),여호(黎湖),요계(蓼溪),문경(文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404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민정 |
출생 시기/일시 | 1680년 - 박필주 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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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717년 - 박필주 시강원 자의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748년 - 박필주 졸 |
추모 시기/일시 | 1748년 - 박필주 문경(文敬) 시호 받음 |
추모 시기/일시 | 1755년 - 박필주 영의정 추증 |
출생지 | 박필주 출생지 - 서울특별시 중구 서소문동 |
거주|이주지 | 박필주 거주지 - 서울특별시 중구 |
수학지 | 박필주 수학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404 |
묘소|단소 | 박필주 묘소 - 경기도 광주시 경안동 쌍령리 |
성격 | 문신|유학자 |
성별 | 남 |
본관 | 반남(潘南) |
대표 관직 | 우참찬 |
[정의]
조선 후기 도봉 서원에서 수학하였던 문신이자 유학자.
[가계]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상보(尙甫), 호는 여호(黎湖)·요계(蓼溪). 할아버지는 박세교(朴世橋)이고, 아버지는 군수 박태두(朴泰斗)이다. 외할아버지는 조내양(趙來陽)이다. 박세채(朴世采)가 박태두의 작은아버지뻘 되는 종숙이다. 집안이 대대로 서인 노론계에 속하였다.
[활동 사항]
박필주(朴弼周)[1680~1748]는 서울 주변에 세거하면서 서울의 학계를 주도하며, 영조의 완론 탕평 체제 속에서도 산림(山林)[학식과 덕이 높으나 벼슬을 하지 않고 숨어 지내는 선비]의 입장을 존중하며 노론의 의리를 끝까지 지키려고 하였던 노론 낙론(洛論) 계열 산림이자 학자였다. 과거에 응하지 않고 스승인 김창흡(金昌翕) 아래에서 수학하였다. 젊어서는 서울의 장경사, 과천의 청계사, 광주 백운산 석굴암, 대구의 동화사 등 전국 각지의 명산대찰을 돌아다니면서 유림들과 학문에 대해 토론하거나 독서하기를 즐겼다.
1704년(숙종 30) 12월 도봉 서원에 들어가 이듬해 봄이 될 때까지 그곳에서 독서를 하였다. 이때 읊은 시가 그의 문집인 『여호집(黎湖集)』에 2수가 남아 있다. 1717년(숙종 43) 산림으로서 재상 송상기(宋相琦)의 천거를 받아 시강원 자의가 된 뒤 지평·집의 등 언관직을 거쳐 세자 찬선·이조판서·우찬성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번번이 사직소를 올려 나아가지 않거나 체직을 청하는 방식으로 조정에 머물지 않았다.
[학문과 저술]
저술은 낙론 학자로서 그의 사상을 보여 주는 것들이 많다. 문집으로 『여호집』이 전하고, 그 밖에 『독서수차(讀書隨箚)』·『주자왕복휘편(朱子往復彙編)』·『춘추유례(春秋類例)』 등의 저작이 있다. 『여호집』에 있는 「도봉 서원 유감(道峰書院有感)」이란 시는 서원 묘정에 있는 제기(祭器)들과 빈 강당을 보며 느낀 감회를 노래하였고, 「도봉 서원 설월기절여족 제례 중필리음(道峰書院雪月奇絶與族弟禮仲弼履吟)」이란 시는 한겨울 눈이 내린 산중의 설경과 달이 만들어 내는 서원 주위의 절경을 일가 동생인 박필리(朴弼履)에게 읊어 준 것이다.
박필주가 도봉 서원에서 이길보(李吉甫)에게 쓴 편지도 있는데, 이 글에서 그는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는 내용으로 그 이유에 대해 논하고 있다. 이 편지는 박필주가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던 조선 후기 인성과 물성에 대한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그의 입장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로, 그가 인성과 물성이 같다는 낙론의 입장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묘소]
묘는 경기도 광주시 경안동 쌍령리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상훈과 추모]
1748년(영조 24) 문경(文敬) 시호가 내려졌고, 1755년(영조 31)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