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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도봉기」[홍직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1695
한자 遊道峯記-洪直弼-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구본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776년 - 「유도봉기」 저자 홍직필 출생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1819년연표보기 - 「유도봉기」[홍직필] 저술
저자 몰년 시기/일시 1852년 - 「유도봉기」 저자 홍직필 사망
편찬|간행 시기/일시 1866년 - 「유도봉기」가 수록된 『매산집』 간행
배경 지역 도봉산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지도보기
성격 기문
작가 홍직필

[정의]

1819년 홍직필오희상과 함께 도봉산을 유람하고 나서 쓴 기문.

[개설]

「유도봉기(遊道峯記)」는 조선 후기의 문신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1776~1852]이 종암(鐘巖)에 있던 오희상(吳熙常)[1763~1833]의 별업(別業)을 여러 차례 찾아가 함께 도봉을 유람하자고 약속한 적이 있는데, 마침내 홍직필의 나이 44세 되던 1819년(순조 19) 9월 10일에 오희상과 함께 도봉산을 유람하고 나서 그 감흥을 적은 기문(記文)이다. 「유도봉기」홍직필의 시문집 『매산집(梅山集)』 권28에 수록되어 있다.

홍직필은 세도 정치기의 산림(山林)으로서 조선조 산림의 명맥을 중시하여 조광조(趙光祖)[1482~1519]나 송시열(宋時烈)[1607~1689]을 존숭하였는데, 이 도봉산 유람에서도 조광조송시열의 묘당에 참배하고 이때 지은 시 「중양지익 수징악오장우도봉 배양문정선생묘(重陽之翌 隨澄岳吳丈于道峯 拜兩文正先生廟)」가 『매산집』 권2에 전한다.

홍직필의 자는 백응(伯應)·백림(伯臨)이고, 호는 매산이며,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판서 홍이간(洪履簡)[1753~1827]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재질이 뛰어났으며, 17세에 이미 이학(理學)에 밝아 성리학자 박윤원(朴胤源)[1734~1799]으로부터 ‘오도유탁(吾道有托)’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1801년(순조 1) 회시에 실패한 후부터 성리학에 전념하여 송환기(宋煥箕)[1728~1807] 등과 연령을 초월하여 교유하였다. 특히 오희상과 오랫동안 교유하였다. 1814년 익위사 세마(翊衛司洗馬)에 제수되었으며, 이후 경연관(經筵官)을 거쳐 벼슬은 형조 판서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매산집』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구성]

「유도봉기」오희상과 도봉 유람을 약속하는 과정에 대한 서술에서 시작하여 1819년 가을에 오희상과 도봉으로 출발, 그 여정을 간략하게 적었다. 글의 중반부터는 이학과 관련된 책에 대하여 오희상과 나눈 대화 내용이 이어지고 있다.

[내용]

1819년 여름에 홍직필오희상을 찾아가 도봉(道峯)을 함께 유람하자고 청하여 가을이 되면 함께 유람을 떠날 것을 약속하였다. 마침내 중양절 다음 날인 9월 10일에 오희상과 소청문(小靑門), 즉 지금의 동소문 밖에서 만나 도봉으로 향하였다. 여정은 대체로 소청문→ 문촌(汶村)→ 도봉동구(道峯洞口)→ 도봉 서원(道峯書院)→ 침류당(枕流堂)→ 제월루(霽月樓)→ 소광정(昭曠亭)→ 광풍당(光風堂) 등으로 이어지는데, 광풍당에 이르러 날이 저물자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었다고 했다. 간간이 오희상과 주고받는 대화 내용이 인용되어 있으며, 대화 내용은 주로 풍경과 경서(經書)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징]

저자 홍직필은 이학자답게 그의 유기문(遊記文)에서도 이학에 관한 독서력이 주요하게 부각되고 있는데, 「유도봉기」 또한 그러한 특징을 잘 보여 준다. 일반적으로 유기문은 여정과 그에 따른 풍경 묘사가 주를 이루는데, 「유도봉기」에도 그러한 요소가 보이기는 하지만 날이 저문 이후에는 주로 홍직필오희상과 함께 정이(程頤)의 「역전서(易傳序)」 등을 읊조린 내용 등 이학서(理學書)에 대한 언급이 부각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의의와 평가]

홍직필오희상과 함께 세도 정치기의 산림으로 평가되는 바, 「유도봉기」에서는 다른 유기문과는 달리 이학에 대해 주고받은 대화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이학자의 유기(遊記)의 특징을 잘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들이 유람한 때가 마침 중양절이어서 당시 중양절의 등고(登高) 풍속을 확인할 수 있다. 도봉은 서울 근교의 산이었고, 더욱이 도봉 서원이 있어 서원에 드나들던 많은 선비들이 중양절도봉산에 올랐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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