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해안항해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535
한자 韓國西海岸航海記
영어공식명칭 Voyage to the west coast of Corea
이칭/별칭 『조선의 서해안과 대류큐섬 발견 항해기』,『한국 서해안 및 류큐제도 발견 여행담』,『Voyage to the west coast of Corea』,[원제목] 『Account of a Voyage of Discovery to the West Coast of Corea, and the Great Loo-Choo Islands』,[간행본 제목] 『Voyage to the West Coast of Corea and the Great Loo-Choo Island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전적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원재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사항 시기/일시 1816년 8월 9일 - 암허스트 사절단 일행이 청나라 텐진에 도착
관련 사항 시기/일시 1816년 9월 1일~10일 - 암허스트 사절단 일행이 조선의 서해안에 머물며 탐사함
저술 시기/일시 1816년 8~12월 - 『한국서해안항해기』 저술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17년 - 『알세스트호 항해기』 존 멕레오드가 출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18년 - 『암허스트 사절단 중국방문 일지』 헨리 엘리스가 출간
편찬 시기/일시 1818년연표보기 - 『한국서해안항해기』 간행
간행 시기/일시 1826년 - 『한국서해안항해기』 제3판 간행
소장처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로 369[상도동 511]지도보기
성격 항해기
저자 바실 홀(Basil Hall)
권책 1권 단책
규격 27.2㎝×21.1㎝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 있는 1818년에 영국인 바실 홀이 쓴 조선 여행기.

[개설]

『한국서해안항해기』는 1816년 영국이 청나라에 파견한 윌리엄 피트 암허스트(W.P.Amherst) 사절단을 수행한 바실 홀(Basil Hall)[1788~1844] 함장이 조선 서해안의 연안 지형과 수로를 탐사하고 영문 성경을 선물로 주고 주민들과 어울려 술을 마신 일 등을 기록하여 1818년에 발표한 여행기이다.

1816년 1월 영국은 암허스트를 전권사절로 임명하여 무역분쟁이 발생한 청나라와 교섭하도록 파견했다. 이때 암허스트 사절은 순양함이며 상하 두 갑판에 포를 장치한 쾌속 범선인 프리깃함에 속하는 알세스트(Alceste)호에 탔는데 함장은 맥스웰(Murray Maxwell.C.B.) 대령이었다. 사절을 호위하는 또다른 함대는 바실 홀 대령이 지휘하는 리라호였고 윗 갑판에 포를 장비한 소형함선인 슬루프함에 속했다. 두 함선의 승선인원은 모두 80~90명에 이른 것으로 조선 관헌들은 파악했고 영국 측의 기록에는 67명으로 나온다.

9월 1일부터 10일간 황해도 옹진 앞바다의 대청도, 소청도와 충청도 비인만의 마량진, 전라도 진도의 조도 등에 들러서 주민들과 접촉하고 교역을 시도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섬이나 해안에서 주민들은 일명 원잡이로 불리던 이양선에 탄 서양인들을 가능한 빨리 몰아내려고 노력하였다. 주민들은 소를 비롯한 가축을 서양의 물건과 교역하기를 거부하였고, 마량진에 정박한 영국 함선에서 마주 앉아 포도주 등 양주를 나누어 마시면서 한문 필담과 몸짓까지 하면서 소통을 시도했던 첨사 조대복, 비인현감 이승렬 등은 영국 함정의 구조와 크기, 승무원과 각종 기물 등에 대해서 상세하게 탐지하여 보고했다. 그러나 영국 함정이 육지에 정박하는 것은 극도로 혐오하는 등 전반적으로 외부세계에 대해 폐쇄적 자세를 유지했다. 바실 홀은 이러한 태도가 조선 정부의 명령 때문이라고 파악했으며 아쉬움과 서운함을 남긴 채 제주도를 일주하듯 지형과 마을 등을 자세히 관찰한 후 류큐제도를 향해 여행을 계속했다.

이후 바실 홀은 1817년 1월 광동에서 암허스트 사절단을 다시 호위하여 영국으로 귀국하면서 인도와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귀국하는 길에 세인트 헬레나 섬에 억류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을 만나서 조선의 마량진 첨사 일행을 그린 채색화를 보여주면서 조선에 관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바실 홀은 1818년 영국 런던에 돌아와서 조선과 류큐에 관한 여행의 경험을 『Account of a Voyage of Discovery to the West Coast of Corea, and the Great Loo-Choo Islands』[이하 『한국서해안항해기』]를 간행하였다. 1824년 제3판을 간행하면서 나폴레옹과 면담한 사실을 첨가했다.

[저자]

『한국서해안항해기』의 저자 바실 홀은 영국 해군 장교요, 탐험가이다. 스코틀랜드 덩글래스에서 출생하여 잉글랜드 햄프셔 지방에서 사망했다. 지질학자이며 에든버러 학술원 총재인 제임스 홀의 아들로 1802년 만 14세의 나이로 해군에 입대해서, 27세 때인 1815년 청나라에 파견된 영국대사 윌리엄 피트 암허스트 백작을 태운 호위함을 지휘했다. 암허스트 일행이 북경에서 광동으로 여행하는 동안 약 4~5개월 간의 시간적 여유를 활용하여 조선의 서해안과 류큐제도를 탐사하고 선박의 항행에 필요한 해로를 작성하고 주요한 인문, 자연지리에 관한 사항을 기록했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1818년 영국 런던에서 『한국서해안항해기』를 출간하여 유럽인들에게 조선국의 존재를 알리는 데 일조했다. 1817년 8월에는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나폴레옹 황제를 만나 조선에 대한 담화를 나누기도 했다.

[편찬/간행 경위]

1816년 8월부터 12월까지 조선 서해안과 류큐제도를 항해한 후, 1817년 1월 광동성에 도착하여 암허스트 사절단을 태우고 귀국길에 나선 바실 홀 함장은 10개월 후인 1817년 10월 14일 영국 런던에 도착했고, 이듬해인 1818년 영국 런던에서 『한국서해안항해기』를 출간하였고, 이어서 네덜란드, 이탈리아, 독일, 미국 등지에서도 같은 책을 출간하였다. 저자 바실 홀은 『한국서해안항해기』를 저술할 때 항해일지를 근간으로 하면서, H.J.클리포드 해군대위가 기록한 노트를 상당히 참고하였고, 황해도 북부에 대한 차트는 봄베이 머린의 다니엘 로스 선장에게서 얻은 자료를 기반으로 했다고 서문에서 밝혔다. 또 책의 말미에 실린 류큐어는 모두 클리포드 해군 대위가 수집한 것이며, 풍경이나 의상에 관한 삽화는 알세스트 사관생도 C.W.크라운과 바실 홀 자신이 현지에서 스케치한 것을 토대로 사절단에 동행한 화가 윌리암 하웰이 다시 그린 것임도 아울러 밝혀두었다.

[형태/서지]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된 바실 홀의 저서 『한국서해안항해기』는 27.2㎝×21.1㎝ 의 크기로 1책 단권이다. 영어로 횡서한 본문 중에는 채색한 스케치로 인물과 풍경이 묘사된 삽화가 실려 있다. 인터넷 코베이 옥션의 경매 사이트에는 동일한 책의 또다른 인쇄본으로 여겨지는 책자가 경매품으로 나와 있는데, 크기가 26.7×22㎝로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본과 대동소이하다. 서문과 목차가 16쪽, 본문 222쪽, 부록 107쪽, 단어집 94쪽을 포함하여 총 439쪽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성/내용]

『한국서해안항해기』 본문 가운데 조선에 관한 내용은 앞부분 57쪽까지이고 나머지는 모두 류큐에 관한 내용이다. 본문은 1816년 2월 9일 영국 런던을 출발한 암허스트 대사 일행이 타고온 순양함 알세스트호와 호위함 리라호가 6개월 만인 8월 9일 청나라 텐진의 베이허[Bai-ho]에 도착한 사실을 기록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9월부터 알세스트호의 함장 맥스웰과 리라호의 함장 바실 홀은 각자의 함대와 함께 대청도, 소청도, 외연도, 비인만 등 조선의 황해도에서 전라도에 이르는 서해안을 먼저 탐사하고 이어서 류큐제도를 탐사한 내용을 차례로 기술했다. 두 함장은 조선의 관원인 마량진 첨사 조대복과 비인현감 이승렬을 만나 영어 성경책 등 3권의 책을 건네주었다. 바실 홀 함장은 방문한 전 지역의 해안선과 주요 도서, 산야 등 지형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였다.

[의의와 평가]

1818년 영국 런던에서 바실 홀이 펴낸 『한국서해안항해기』는 유럽의 탐험가들이 조선 서해안의 섬들과 복잡한 해안 지형을 상세히 탐지하고 수로를 작성하여 18세기에 예수회 선교사들이 그린 중국 서해안과 조선 해안 지도의 부정확한 부분을 실측에 입각하여 대폭 수정하였다. 이로써 1832년 로드 암허스트호의 외연도 방문, 1845년 에드워드 벨처 선장이 지휘하는 사마랑호의 제주도와 조선 남해안 일대 방문, 1846년 테오도르 오귀스탱 포카데의 외연도 방문 등에 길안내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이양선에 탄 서양인들과 조선인들의 접촉을 일체 엄금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 관헌이나 주민들과의 통상교역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으며, 조선말이나 한문에 밝은 통역인이 탐험대에 동행하지 않았던 점 때문에, 조선과의 통상교역은 더더욱 불가능했다는 점을 바실 홀 함장은 스스로 반성할 점으로 지적했다. 1816년 9월 바실 홀과 맥스웰 일행 등 영국 함대의 조선 방문은 개항 이전 조선왕조의 폐쇄적이고 고식적인 대외관계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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