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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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미역 | Chupungnyeong Pass, a Slope So Steep Even the Clouds Cry as They Pass Over |
이칭/별칭 | 당마루고개,백령(白嶺) |
분야 | 지리/자연 지리,문화·교육/문화·예술,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충청북도 영동군 추풍령면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철우 |
소재지 |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충청북도 영동군 추풍령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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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추풍령(秋風嶺)은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과 충청북도 영동군 추풍령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높이는 221m이다. 이곳은 소백산맥과 노령산맥이 나누어지는 곳으로 동쪽의 난함산(卵含山)[733m]과 서쪽의 눌의산(訥誼山)[743m], 북쪽의 학무산(鶴舞山)[678m]과의 사이 안부(鞍部)에 위치한다.
추풍령은 동서의 두 산봉우리 사이의 고개이나 북쪽에 학무산과 지압산(芝壓山)이 가로막아 고개가 남북으로 소통되지 못한다. 또한 남사면에서 올라온 길은 재마루에서 모두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고 있다. 고개의 남사면은 급경사를 이루어 김천시까지 도달하며, 서사면은 비교적 완사면을 이루어 서쪽의 황간(黃澗)까지 평탄한 고갯길이 이어지고 있다. 남사면은 낙동강의 지류인 감천(甘川)이 깊은 계곡을 형성하고, 서사면은 금강의 지류인 송천(松川)이 황간에서 동쪽으로 분기하는 계곡과 이어진다. 따라서 추풍령을 통과하는 국도 4호선과 경부고속국도 및 경부선이 모두 이 계곡을 통과하고, 특히 김천에서 추풍령을 넘어 황간에 이르는 구간은 이들 교통로가 서로 밀착하여 달리고 있다. 또 옛 소로까지 합쳐져 있어 옛날부터 지금까지의 교통로의 발달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추풍령은 예로부터 영남 지방과 중부 지방을 잇는 중요한 교통의 요충지였다. 경부선의 개통으로 조령(鳥嶺)을 통과하던 교통량이 모두 추풍령으로 흡수되어 추풍령역이 개설되었으며 그에 따라 촌락이 크게 발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영남 지방과 충청도 지방의 지역 간 교류에 큰 몫을 하였다. 특히 경부고속국도가 개통되면서 추풍령은 경부고속국도의 중간 지점에 해당되어, 추풍령휴게소와 여러 부대시설이 설치되었고, 여행객의 휴식처로 변모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추풍령은 임진왜란 때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1593년(선조 26) 의병장 장지현(張智賢)이 경상도관찰사 윤선각(尹先覺)의 비장(裨將)이 되어 부하 수천 명을 거느리고 추풍령에서 왜군 2만 명을 맞아 치열한 전투 끝에 적군을 물리쳤으나, 다시 금산(錦山) 방면에서 진격하여 오는 구로다[黑田長政]가 이끄는 왜군의 협공을 받아 장렬히 전사한 곳이기도 하다.
[추풍낙엽처럼 떨어질까 저어했다는 추풍령]
백두 대간의 긴 허리 부분인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과 충청북도 영동군 추풍령면 사이에 있는 당마루마을에서 당마루고개라고도 불리는 고개가 추풍령이다. 추풍령이라는 명칭이 언제부터 어떤 유래로 불리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당마루는 당령(唐嶺)이라고도 하는데, 옛날 당나라 병사들이 진을 친 곳이라고 한다. 원래의 추풍령의 당마루마을은 하나의 마을이 경북당마루와 충북당마루로 나누어져 있다.
경부선 추풍령역은 영동군 추풍령면 추풍령리에 있으며, 경부고속국도 추풍령휴게소는 김천시 봉산면 광천리에 있다. 경부고속국도의 중간 지점인 추풍령휴게소에는 경부고속국도 준공 기념비와 추풍령노래비가 있다.
추풍령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김산군조에는 김천찰방에 속한 20개 역 중의 하나인 ‘추풍역(秋豊驛)’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경상도와 충청도가 갈리는 곳에 있어, 일본의 사신과 우리나라의 사신이 청주를 경유할 때에는 반드시 이곳을 지나가기 때문에 관에서 이들을 접대하는 번거로움이 상주와 맞먹을 정도로 실로 왕래의 요충’이었다고 한다.
‘추풍(秋豊)’은 ‘가을의 풍년’을 뜻하는데, 이것이 후대에 보다 시적인 표현인 ‘추풍(秋風)’으로 변하지 않아나 추측된다. 그러나 시적인 추풍령(秋風嶺)이라는 이름 때문에 옛날 영남의 선비들이 과거를 보기 위하여 한양으로 갈 때 이 고개를 넘으면 고개 이름대로 추풍낙엽(秋風落葉)처럼 떨어질까 두려워서 넘기를 꺼려했다고도 한다. 그리고 “구름도 자고 가는 바람도 쉬어가는 …… 추풍령 고개”라는 유행가의 노랫말과는 달리 추풍령은 그리 높은 고개가 아니다. 물론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예전에는 넘기 힘든 지루한 고갯길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지금의 추풍령은 그렇게 험준한 고갯길은 아니다.
명색이 백두 대간의 대표적인 고개이지만 김천에서 추풍령까지도 그렇게 험준한 편이 아니며, 고갯마루를 넘어서면 그만 슬그머니 평지가 펼쳐지는 것 같다. 경부고속국도 추풍령휴게소 입구에 있는 ‘추풍령’의 노랫말이 새겨진 노래비가 아니라면 누구도 고개라고 생각하지 않을 정도의 완만한 지형이다.
옛사람들은 고개를 험하기와 위치를 따져 ‘영, 재, 치, 티’로 구분하였고, 구름과 머리를 맞대는 고개라야 ‘영’이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이란 이름을 추풍령에 달아 주었고, ‘구름도 자고 넘는, 바람도 쉬어 가는 …… 추풍령’이라는 노랫말이 생겨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단순히 추풍령의 물리적 조건보다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산을 넘을 때 가장 가까우면서도 낮은 곳을 찾는 속성으로 백두 대간 중에서 가장 낮은 이곳을 선택하였고, 영남과 중부 지방을 연결하는 대표적인 고갯길인 문경새재와 더불어 가장 오래되고 우리 민족의 애환이 담긴 고개라는 정서적인 면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그만큼 크기 때문일 것이다.
추풍령의 또 다른 이름은 백령(白嶺)이다. 물이 적고 토지가 척박하였던 과거 추풍령 인근 지역에서는 메밀 농사를 중심으로 하였다. 이 백령이라는 별칭은 새하얀 메밀꽃이 고갯마루를 뒤덮은 흰 고개라는 의미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조선 말 추풍령 일대의 행정 구역 명칭은 경상북도 김산군 황금소면이었다. 황금소면이라는 지명은 추풍령 역참에 황금소라는 관리 숙소가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 것으로, ‘황금’이라는 지명은 현재의 영동군 추풍령면 사부리에 있는 황보(黃寶)와 금보(金寶)라는 마을에서 유래되었다.
1905년에는 경부선 추풍령역이 개통되었으며, 1906년에는 지방 관제 개편 시 충청북도 황간군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1914년의 부군면 폐합에 따라 매곡면 일부와 상주군 공성면의 일부를 병합하여 황금면으로 개칭되었고 영동군에 편입되었다. 그 후 1991년 전국적으로 지명도가 높은 ‘추풍령’을 따서 황금면을 추풍령면으로 개칭하였다.
백두 대간에 위치한 ‘당마루’ 추풍령은 경부선 철도가 개설되고 국도 4호선과 1970년 경부고속국도의 개통과 함께 추풍령휴게소가 생기면서 이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고개인 동시에 교통량이 가장 많은 고개가 되었다.
[자연 환경]
과거에 한겨울에도 눈 구경을 하기 힘든 영남의 남부 지방 사람들이 겨울에 서울로 여행하다가 먼 산에 허옇게 눈이 덮여 사뭇 경치가 달라지는 곳이 김천시 부근이라고 한다. 이곳 사람들에 의하면, 예전 금릉군 농소면에서 남쪽의 성주군으로 넘어가는 길목이자 경부선이 개통되어 김천역이 운행을 시작한 1905년에 항일 의병들이 모여들어 제국주의 일본에 대항하였던 곳인 살티고개를 경계로 하여 그 북쪽에는 눈이 많아도 그 남쪽에는 눈이 거의 없다고 한다.
김천 지역의 기후는 이곳 북쪽에 위치한 소백산맥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 겨울에는 북서 계절풍이 소백산맥을 따라 상승하여 차고 건조한 바람이 되며, 여름에는 남동풍이 소백산맥의 영향으로 더운 바람이 된다. 따라서 겨울에는 둥실거리는 조각구름들이 산맥을 넘어 눈밭이 되어 흩날리고, 여름에는 번개구름이 솟아 들판의 곳곳에 자주 벼락을 치는 것도 이 고장 날씨의 특징이라고 한다.
김천 지역의 연평균 기온은 섭씨 12.8도이고, 최고 기온이 섭씨 30도가 넘는 날수가 한 해에 40일 안팎이다. 그리고 한 해 평균 강수량은 전국 평균치인 1,200㎜ 보다 조금 적은 1,146.7㎜이며, 눈 오는 날 39일을 합쳐 한 해 강수일수는 평균 116일로서 강수일이 적기로 이름난 가까운 대구보다는 17일이 더 많다.
[추풍령에 담겨 있는 유적·유물, 그리고 사건]
1. 장지현 장군 순절비 및 전적지
충청북도 영동군 추풍령면 사부리 오룡동에 있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장지현(張智賢)[1536~1593]의 순국 기념비 및 그 전적지로, 충청북도 기념물 제96호로 지정되어 있다. 순절비는 비신(碑身)의 높이 192㎝, 폭 62㎝, 두께 30㎝이며, 기대석(基臺石)은 1958년에 보수하였다. 본래는 1864년(고종 1) 추풍령에 세웠는데, 1980년 순국지인 사부리에 충절사(忠節祠)를 건립하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장지현은 본관은 구례(求禮), 호는 삼괴(三槐)로, 영동군 영동읍 매천리에서 태어났다. 당쟁이 심화되자 관직 진출의 뜻을 포기하고 향리에서 문무에 힘써 그 명망이 높았다. 1590년(선조 23) 전라병사 신립(申砬)의 추천으로 그 부장(部將)이 되었고, 이듬해 감찰에 올랐으나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리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자연지세를 이용하여 추풍령에 진을 치고 있던 중 김산 방면에서 공격해 온 왜군 구로다[黑田長政]의 부대를 맞아 오룡동에서 혈전을 벌이다가 중과부적으로 전사하였다.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정려(旌閭)되었으며, 영동의 화암서원(花岩書院)과 무주의 죽계서원(竹溪書院)에 배향되었다.
2. 패고정(敗古亭)
영동에서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황간을 거치고 다시 추풍령을 향해 가다보면 길가 오른편에 장병사 순절비(張兵使殉節碑)가 있었는데, 그 일대를 패고정이라 부르고 있다. 이곳에는 최근에 완공된 장지현(張智賢) 병사(兵使)의 사당이 있다. 패고정 장병사 순절비가 있는 영동군 추풍령면 사부리 오룡동은 임진왜란 당시 격전지였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제3군 구로다는 추풍령을 넘어 황간, 영동을 통과하여 전라도 지방의 왜군과 합칠 계획이었다. 당시 영동군 영동읍 매천리 출신인 삼괴당(三槐堂) 장지현(長智賢)은 사촌동생 장호현(長好賢)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북상하는 왜군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의병장 장지현은 북진하는 왜군을 필사적으로 제지하려 하였다. 그때 추풍령과 황간에는 방어사 조경(趙璟)과 정기룡(鄭起龍)이 이끄는 의병과 장지현이 이끄는 의병들이 집결하여 구로다의 대군을 방어하고 있었다. 특히 장지현 의병장을 비롯한 모든 의병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비장한 결의로 방어에 진력했다. 당시 황간현감 정선복이 장지현에게 어서 몸을 피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장지현은 고개를 저었다. 정현감은 적이 아군의 뒤쪽에서 포위망을 좁혀 오고 있다는 정보를 장지현에게 전달하였으나, 오히려 장지현은 “왜적은 대군이요, 아군은 소수이니 싸움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 것은 명백한 일이다.”라면서 정현감에게 몸을 피할 것을 권하였다.
‘장지현은 이미 죽기를 결심하고 이 싸움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을 결심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은 정현감은 장지현의 비장한 결심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이 때 장지현의 사촌동생 장호현이 형 앞에 뛰어들면서, “형님, 이제는 조짐이 기울었으니 우리도 함께 몸을 피해 뒷날의 계획을 세웁시다.”라고 하였으나 장지현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호현아 넌 무슨 잠꼬대를 하고 있는 게냐! 우리 몸에 흐르는 부모님의 가훈을 생각지도 못하느냐? 부모님께서는 항상 ‘충의보국(忠義報國) 청백전가(淸白傳家)’ 여덟 글자로 우리 형제들을 훈육하셨나니 이 마당에 와서 그 같은 가훈을 잊어서야 되겠느냐.”라고 하면서, “비록 충성을 다하여 적을 쳐서 나라 은혜에 보답치는 못할지언정 어찌 의를 버리고 삶을 꾀하여 어버이 가훈을 저버린단 말인가! 가자, 어서 적지에 뛰어들어 한 놈이라도 더 죽이고 의롭게 죽자.”는 형의 결의에 장호현은 눈물을 흘리며 형을 따랐다고 한다.
장지현과 장호현 형제는 마침내 적들에게 포위되어 장렬히 전사하였다. 뒷날 이 고을 사람들은 장병사 형제가 적에게 패하여 죽은 자리를 패고정(敗古亭)이라 부르고 그 자리에다 패고정 순절비를 세웠다. 그리고 장지현의 순절을 슬퍼하여 고을 사람들이 한숨을 쉬었다고 해서 ‘한들’이란 지명이 생겨났는데 이 한들이 지금의 영동군 추풍령면 계룡리이다.
패고정 바로 아래 경부선 철도가 지나고 있다. 1904년 경부선 철도 건설 당시 일본인 공사 감독이 장병사 순절비를 땅속에 묻어 버리려고 순절비에 손을 대는 순간 그는 갑자기 천벌을 받은 듯 피를 토하고 쓰러져 죽어 버렸고, 1940년 경부선 복선 공사 때도 일본인 측량 기사가 철로의 위치를 장병사 순절비가 세워진 곳으로 변경 가설하려다가 역시 피를 토하고 쓰러져 죽어, 어쩔 수 없이 장병사 순절비를 그대로 세워 두었고 오늘날까지 아무 일 없이 국도변에 서서 충의보국의 본보기로 우리들에게 좋은 교훈이 되어 오고 있다는 것이다.
3. 신안리 석불입상
영동군 향토유적 제20호이다. 고려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신안리 석불입상(石佛立像)은 반고개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매년 음력 1월 14일에 마을 수호와 가정의 덕복(德福)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고 있다. 불상의 전체 높이는 2.27m, 어깨 폭은 80㎝이다.
4. 지봉리 좌불상
영동군 향토유적 제29호이다. 건립 연대는 미상이고, 임진왜란 때 불상의 두부(頭部)가 절단되었다고 전한다. 지봉리 좌불상은 모두 2기(基)로, 뒤쪽에는 입불상(立佛像)이고, 앞쪽에는 좌불상(坐佛像)이다. 좌대에는 연화문(蓮花文)이 조각되어 있고, 우측 팔이 절단 되었으며, 두부의 상단면도 파손되었다. 원래 영동군 추풍령면 지봉리 10-1번지에 있던 것을 향토전시관이 건립되면서 이곳으로 옮겨 관리하고 있다.
5. 추풍령역 급수탑
증기차의 냉각수를 저장하던 탑인 급수탑은 1939년 추풍령역에 건립되었다. 형태는 기단부, 몸통부, 물탱크로 이루어져 있으며, 기계실 안에는 워싱턴 펌프와 배관 시설 등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충청북도 영동군 추풍령면 추풍령리 336-1번지에 위치한다. 2003년 1월 28일 등록문화재 제47호로 지정되어 있다.
6. 경부고속국도 준공 기념비
경부고속국도 완공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탑으로, 1970년 12월 8일 제막식을 가졌다. 경부고속국도 총 428㎞의 중간 지점[서울 기점 214.44㎞]인 추풍령휴게소의 높이 240.5m 지점에 세워져 있다. 탑신 아랫부분을 클로버 형태로 꾸민 기념탑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높이는 30.8m에 이른다. 기단[8단]과 탑신[69단]을 합쳐 77단으로 축조되어 있는데 이는 준공일인 1970년 7월 7일과 경부고속국도 건설 중 희생된 77인을 상징하는 것이다. 추풍령휴게소 광장에서 기념탑으로 오르는 계단 역시 77계단으로 만들어졌다.
기단 전면과 후면에는 건설·번영·발전을 상징하는 부조 작품이, 탑신 양 측면에는 번영·평화를 상징하는 여신상이 부착되어 있다. 4면의 기단에는 부조 작품 외에도 ‘서울부산간고속도로는 조국 근대화의 길이며 국토통일의 길이다’라는 글귀와 「고속도로의 노래」라는 시(詩), 경부고속국도 사업 개요[공사 기간, 총연장, 공사 인원 및 장비, 총공사비] 등이 적혀 있다.
[대중가요와 영화로 더욱 유명해진 추풍령]
추풍령과 관련된 대표적인 문학·예술 작품으로는 이승하의 시 「고향으로 가는 길」과 남상규의 노래 「추풍령」이 있으며, 가곡으로는 「추풍령 넘으며」가 있다. 영화로는 1965년에 개봉한 「추풍령」이 있다. 중앙대학교 교수이자 시인인 이승하의 「고향으로 가는 길」 전문은 다음과 같다.
그리 멀지도 않건만/ 고향으로 가는 길 가로막고 있는/ 추풍령 넘어가기가 참으로 힘들구나/ 허나, 세상의 모든 길은 저마다의 고향으로 나 있는 법// 그저 태어난 곳 자라난 곳/ 꿈을 키웠던 그 곳/ 사춘기 시절엔 줄곳 떠나고 싶던 곳이어서/ 그대 고향을 버리고 비로소 어른 되었지/ 연어도 때가 되면 모천으로 회귀하는데// 한가위로다/ 타향의 하늘에서도 이국의 하늘에서도/ 두둥실 떠 있는 원반형의 달/ 어머니 등에 업혀 쳐다보았던 달/ 사랑을 잃고 술에 취해서 쳐다보았던 달/ 오늘밤 저 달은 한껏 발그레해지리라// 인생행로 걸어도 달려도/ 어느 고개 할 것 없이 험하기만 했다/ 망망대해 달려도 멈추어도/ 어늘 뱃길 할 것 없이 무섭기만 했다/ 하지만 고향으로 나 있는 길에서는/ 지친 새도 날개 접을 수 있다/ 그대 탯줄이 거기 묻혀 있기에/ 그대만을 기다리는 노모가 있기에// 싸늘히 식은 가슴 지닌 이들이/ 고향에 돌아온 나은 왁자지껄하리라/ 따듯한 고봉밥, 넘치는 술잔/ 사투리가 갑자기 입에서 튀어나오고/ 잊어버린 친척 아이 이름을 묻는다/ 잃어버린 별명을 거기서 찾는다// 그대 인생의 남은 날들이여/ 이번 한가위만 같아라
백영호가 작곡하고 전범성이 작사한 「추풍령」은 전국적으로 추풍령의 지명도를 높인 대표적인 대중가요이다.
구름도 자고가는 바람도 쉬어가는/ 추풍령 구비마다 한많은 사연/ 흘러간 그 세월을 뒤돌아보는/ 주름진 그 얼굴에 이슬이 맺혀/ 그 모습 흐렸구나 추풍령 고개// 기적도 숨이차서 목메어 울고가는/ 추풍령 구비마다 싸늘한 철길/ 떠나간 아쉬움이 뼈에 사무쳐/ 거치른 두뺌위에 눈물이 어려/ 그 모습 어렸구나 추풍령 고개
1965년에 개봉한 영화 「추풍령」은 가난한 가운데에서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역경을 헤쳐 나가는 부자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린 영화이다. 전범성이 각본·감독을 맡고 김진규·이경희·최남현·석일우 등이 출연하였다. 3대째 추풍령의 철도국 선로수로 근무하면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주인공이 그의 아들에게는 육체노동인 선로수 직업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온갖 고생을 마다않고 대학 교육을 시킨다. 아들은 한 학기는 학비를 벌고 한 학기는 학교에 등록하여 공부하면서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여, 마침내 대학을 졸업하고 철도국의 간부직에 임명되어 추풍령 철도국에 부임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추풍령에 대한 김천인들의 애정을 바라며]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백두 대간의 대표적인 고갯길 추풍령은 예나 지금이나 영남의 관문으로서 정치, 군사, 경제 그리고 문화적으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여 왔다. 뿐만 아니라 김천 시민들은 추풍령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은 김천이라는 지역 이미지에서 추풍령을 지우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천 시민들의 추풍령에 대한 애착은 별로 크지 않은 것 같다. 원래 추풍령 고갯길의 당마루마을은 김천 땅이었고, 김천찰방에 속한 20개 역 중의 하나였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고개인 동시에 교통량이 가장 많은 고개가 바로 추풍령이다.
이에 영동군은 추풍령의 일부를 감싸 안은 황금면을 전국적으로 지명도가 높은 추풍령면으로 개칭할 정도로 애착을 보이고 있다. 김천 지역에서도 그것을 인정하고 추풍령은 그저 영동군과 김천시를 연결하는 하나의 고개 정도로 여기며 별다른 관심은 없는 듯 같다. 그렇다고 추풍령을 두고 서로가 자기네 것이라고 싸움이라도 하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추풍령은 영동뿐만 아니라 김천에 있어서도 고향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동네 어귀 당산나무처럼 늠름한 존재이다. 따라서 김천도 지난날 길손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역사와 문화를 독자적으로 체화한 정체성을 가진 한국을 대표하는 고갯길인 추풍령에 애정을 가지고 살아 움직이는 민속 문화의 보고로 가꾸어 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