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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여름을 탈없이 날 수 있는 술, 김천과하주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009
영어의미역 Gwahaju from Gimcheon, the Liquor That Allows You To Overcome the Hot Summer Days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향천리 791-1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문재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1987년 5월 13일연표보기
제조처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향천리 791-1 지도보기

[김천이란 이름의 유래가 된 과하천]

“정월 대보름날 전후로 주조 공장 일꾼들이 물지게로 과하주 빚는다고 하루 종일 물을 길어다 나르는데 사람이 부족해서 그때 이 동네 사람들도 품 팔러 다니기도 했지.”

남산동 과하천 인근에 사는 이재탁[80세] 어르신에게 과하주와 과하천은 아직도 김천의 아련한 향수와 추억으로 남아 있었다. 과하천의 본디 이름은 김천(金泉)이라고 하는 이 고장의 지명이 유래된 남산동의 ‘김천(金泉)’이다. 물맛이 좋아 그 샘물로 술을 빚은 것이 과하주였기에 샘을 달리 과하천 또는 주천으로 부른 데 그치지 않고 이 지방을 대표하는 술과 우물로 자리매김했다. 이것은 고려 전기 역참 제도의 정비로 이 지방에 역이 처음 설치되면서 역명(驛名)을 정할 때 이 샘의 이름을 따서 김천역(金泉驛)이라 한 것만으로도 그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김천(金泉)이란 지명이 문헌상에 처음 등장한 것은 1451년(문종 1) 간행된 『고려사(高麗史)』로, 역의 지명으로 나타난다. 김천역은 지금의 남산동 김천초등학교 위쪽의 찰방골로 불리는 일대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과하천김천역과 지척의 거리에 있었다. 과하천은 1990년 ‘김천과하천’이란 이름으로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28호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지만 주변에 주택이 들어서면서 더 이상 음용수로는 사용할 수가 없게 된 점은 안타깝다. 샘 안쪽 벽면에는 “금릉주천 광서 팔년(金陵酒泉 光緖 八年)”이라 하여 1882년(고종 19)에 새겨진 금석문이 있어서 과하천의 역사를 짐작하게 한다.

[역사 속에 나타난 과하주]

김천 지역을 대표하는 향지로서 1718년(숙종 44)에 간행된 『금릉승람(金陵勝覽)』에서 저자인 여이명(呂以鳴)은 과하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옛날에 금(金)이 나는 샘[泉]이 있어 김천(金泉)이라 했다. 그 샘물로 술을 빚으면 맛이 향기로웠기 때문에 주천(酒泉)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금을 캐는 부역이 두려워 그 샘을 묻어 버려 지금은 그 장소를 알지 못한다고 한다. 다만 김천의 과하주는 여산(礪山)의 호산춘(湖山春)과 더불어 국내에서 이름 있는 술이 되었는데, 타지 사람들이 금릉 사람에게 술 빚는 방법을 배워 가지만 그 맛은 본토의 술만 같지 못하니 이것은 물이 타지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무릇 특산품이란 각기 자연 환경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예부터 말하기를 아름다운 술은 중국의 난릉(蘭陵)과 신풍(新豊)의 것을 칭송하니 이치가 그럴 법도 하다. 무신년에 김천찰방 배유화(裵幼華)와 방백 심재(沈榟)가 지은 시에 샘 동편의 작은 산을 일컬어 주향산(酒香山)이라 했다[古有生金之泉 故名焉 取其泉之水 而釀酒則味極香洌 故亦曰酒泉 然居其土者 畏其有徵金之役 而埋其泉 故今不知其處云耳 但金泉過夏酒與礪山湖山春搏名於一國 他里人學其方於金陵之人 而其味皆不如本土之酒 此果水之有別於他處耶 凡物各有 所宜之地 自古言美酒 必稱蘭陵新豊理或然也 戊申年察訪裵公幼華氏 與方伯沈公梓相 和詩稱其東邊小山 曰酒香山].”

이 기록을 통해 볼 때 김천이란 지명이 유래된 샘이 곧 김천[또는 금천]이라는 샘이며, 이 샘물로 빚은 술이 과하주로, 김천의 독특한 물이 과하주라는 명주를 탄생시킨 배경이 되었다고 보고 있다. 아울러 고려 전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김천역의 설치 시기를 감안할 때 과하주의 주조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과하천 인근 산을 주향산이라 하여 선현들이 과하주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일제 강점기 일본 사람들도 과하주에 대해서 상당한 관심을 보이면서 활발하게 연구를 했다고 알려져 있다. 1935년 조선주조협회가 조선총독부 25주년과 주세 1500만 원 징수를 기념하기 위해 간행한 『조선주조사(朝鮮酒造史)』에는 김천주조주식회사를 소개하면서 과하주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味醂様の甘味朝鮮酒であって酒精分三十度内外で夏季のみの飲料とするものと、酒精分十三、四度でいわゆる高級飲料とするものとの二つがある. 慶北金泉産は後者として有名である.

その製法として前者は麹子粉、麦芽粉及び蒸飮粳米を焼酎と共に陶磁器内に仕込み充分攪拌したる後蓋を施し放置すれば二十日内外で熟成する. その の中に籠を挿入し、その中に溜まった酒液を汲み取るのである.

後者は粳米の蒸したるものと優良粉麹の同量を混ぜ臼でかき混ぜて餅状とし陶磁器内に仕込み密閉放置すれば約一ヶ月で熟成する. その中に籠を挿入し酒液を汲み取るので朝鮮高級飲料として賞味せらるるものである.”

요약해 보면, 과하주는 미림(味淋) 형태의 단맛이 있는 조선 술로서 주정이 30도 내외이며, 여름에 마실 수 있는 음료라고 할 수 있는 술과 고급 음료라고 할 수 있는 13~14도의 술 두 가지가 있다. 김천은 수질이 양조에 적합한데 과하주는 300여 년 전부터 알려진 유명한 술로, 1928년 김천주조주식회사가 창립한 이래 과하주의 수요가 매년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1938년 조선주조협회 경성지부가 발행한 『주조독본(酒造讀本)』에는 과하주의 제조 방법을 다음과 같이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過夏酒は百日酒と共に朝鮮に産する特種の酒類であって、高級飲料として賞味せうれ酒精分十三、四度を含有する. 古来慶北金泉産過夏酒が最も有名である. その製法は粳米一斗を蒸し冷却したる後粉麹約一斗を混ぜ、臼でかき混ぜて餅状となし陶磁器内に仕込み密封放置するときは、約一か月にて熟成するから籠を挿入しその酒液を汲み取るものである. 尚、このほか に焼酎を添加して精製するいわゆる再製酒に属する過夏がある.”[241쪽]

“過夏酒は松旬酒、甘紅露、五味酒と共に朝鮮に産する特有の再製酒であって、味醂様の甘味を有し酒精分三十度内外を含有、廣く夏季の飲料に供せられる. その製法は粉碎したる麹子四合麦芽粉四合及び粳米一升五合を蒸し冷却したるものを焼酎四升と共に陶磁器内に仕込み充分攪拌したる後、蓋を施し放置すれば二十日内外にて熟成するから、中に籠(ヨンス)を挿入し酒液を汲み取る. 尚、残留粕に焼酎一、二升を加え攪拌したる後三、四日を経て再び籠を挿入し溜まりたる酒液を汲み採り前液と合わせて飲用に供するのである.”[342~343쪽]

대략 정리하면, “과하주는 백일주와 같이 조선에서 생산되는 특수한 술로 주정분은 13~14도를 함유한다. 예부터 김천에서 생산한 과하주가 가장 유명하며, 그 제조법은 찹쌀 한 말과 분곡 1밀을 찧어 혼합한 후 술떡을 만들어 독에 넣어 밀봉하고 약 한 달을 숙성시킨 후 용수에 넣어 정주를 건지는 것이다. 이 외에도 전다지에 소주를 첨가하는 재성주에 속하는 과하주도 있다.”라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의 과하주에 대한 관심은 1930년대 김천주조협회가 한일 공동 합작회사 형태로 출범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일제 시대 말 기차를 타고 대전쯤 지나면 ‘과하주요 과하주’ 하면서 병에 넣은 술을 파는 판매원이 있었지.” 김천향토사연구회 회장 이근구[89세]어르신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사라져 간 과하주의 명성을 안타까워했다.

[과하주는 어떻게 만들어지나]

과하주의 제조 방법은 구전과 문헌에 따라서 다른데, 1809년(순조 9)에 간행된 『규합총서(閨閤叢書)』와 1930년대에 간행된 『조선주조사(朝鮮酒造史)』·『주조독본(酒造讀本)』, 1968년의 『향토사(鄕土史)』, 1982년 김천세무서가 발표한 『김천과하주 유래조사보고서』, 1984년 서울보건전문대학 노완섭 교수가 문화재관리국의 의뢰로 조사, 발표한 『김천과하주 자료조사보고서』, 1986년 영남대학교 김택규 교수의 『김천과하주 문화재지정조사보고서』, 1990년 유태종 박사가 출간한 『한국의 명주(名酒)』 등에 다양하게 기술되어 있다. 제조 기법이 수록된 가장 오래된 자료인 『규합총서(閨閤叢書)』에 나오는 과하주의 제조 방법은 다음과 같다.

“봄, 여름 사이에 쌀을 가루로 만들어 죽을 진하게 쑤어 식힌 후 누룩 가루를 넣어 밑술을 만든다. 밑술의 맛이 써지면 찹쌀로 고두밥을 만들어 식힌 후 밑술에 버무려 두었다가 그 맛이 다시 써지면 소주를 붓고 7일 후에 소주를 더 붓는다.”

김택규는 『김천과하주 문화재지정조사보고서』에서 『주조독본(酒造讀本)』의 사례와 양조 술 전승자의 구술을 첨부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주조 방법을 기술하고 있다.

“찹쌀로 고두밥을 찌고 황국화와 쑥을 깐 짚자리 위에서 그 찹쌀 고두밥을 냉각시키며 누룩을 물에 담구어 효소 성분을 우려 낸 물을 사용하여 냉각된 찹쌀 고두밥을 떡으로 만들 때 다시 사용한다.”

유태종은 저서 『한국의 명주』를 통해 여러 문헌에서 소개되고 있는 과하주의 제조 비법을 세 가지로 정리했는데, 특히 김천 지역에서만 생산되는 것으로 알고 있던 과하주가 서울에서도 주조되어 유명했던 술이라 적시하고 있다.

“누룩 두 되에 끓인 물 한 병을 식혀서 붓고 하룻밤을 재운다. 윗물을 따라 내고 주물러 체에 밭치는데 식힌 물을 더 부어 거른다. 찌꺼기는 버리고 찹쌀 한 말을 깨끗이 씻어 지에밥을 찐다. 밥이 식으면 누룩 물을 섞어 넣고 사흘쯤 후에 소주를 열네 국자 부어 두면 독하면서도 단맛이 나는데 이것을 7일간 두었다고 마신다.”

이때 지역에 따라 몇 가지 방식에서 차이가 나는데 다음과 같다.

“첫 밑술은 춘하절에 백미 두 되를 가루 내어 끓는 물로 범벅처럼 개어서 차게 식힌 다음 가루 누룩 5홉을 섞어 약주 밑으로 넣는다. 중밀 술은 밑술의 맛이 나면 찹쌀 한 말로 지에밥을 쪄서 완전히 식힌다. 덧술은 맛이 쓰게 되면 소주 20국자를 넣고 7일이 지나 떠보면 가야미가 뜨고 술맛이 난다.”

반면, 김천의 과하주는 청주에 소주를 섞지 않고 봄에 빚어서 9~10월까지 두며 마셨는데, 과하주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과하주는 정월 15일부터 우수와 경칩 사이를 주조 적기로 보고 있다. 찹쌀 2말을 과하주 샘물에 24시간 동안 담갔다가 고두밥을 찐 다음 국화와 쑥을 밑에 깔고 짚을 편 위에 널어서 식힌다. 이와 별도로 누룩 가루 2말을 과하주 샘물 1말에 우려 낸 물만을 사용하여 고두밥을 떡으로 만든다. 이렇게 반죽한 떡을 식혀서 항아리에 넣고 한지로 밀봉하여 실내 온도 15도에서 18도 되는 양조실에서 45일 이상 발효시키면 25도 정도의 정주 1말 반을 얻을 수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찹쌀과 누룩 가루를 반드시 같은 양으로 섞어야 하며, 술떡을 만들 때 물을 넣지 않으며, 독을 밀봉한 후 저온에서 한 달 이상 발효를 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장인의 열정으로 다시 태어난 과하주]

예부터 물이 좋은 고장에서 좋은 술이 난다고 했다. 김천 지역은 자연 환경이 수려해 삼산이수의 고장으로 불렸는데, 이수는 곧 감천직지천이다. 일설에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왜병을 쫓아 김천 땅까지 내려왔다가 김천의 물맛을 보고 떠나 온 중국 고향의 물맛과 다름이 없다 했다고도 한다. 조선 4대 명주로 불리며 궁중에까지 진상되었던 과하주는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 큰 도가로 불린 최초의 한일 합작 회사인 김천주조회사에서 대량 생산 설비를 갖추고 열차 판매까지 하는 등 확장 일로에 있다가 1940년대 들어 일제의 미곡 수탈 정책으로 곡주 생산이 중단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과하주의 운명은 제2대 김천문화원장을 역임한 치과의사 송재성[현재 작고]에 의해 다시금 세상에 나타나게 된다. 송재성은 김천주조회사 인근에서 치과를 운영하며 유심히 지켜보았던 과하주 제조 공정에 들어갔고, 김천주조회사에서 일했던 조무성과 함께 숱한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1986년 완벽한 재현에 성공했다. 그리하여 김천과하주는 1987년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었으며, 송재성은 1991년 과하주 생산 제조 면허를 받아 아들 송강호와 함께 생산에 착수해 다시 김천 지역을 대표하는 명주로 재탄생시켰다.

사시사철 향기로운 물이 흐른다 하여 이름 붙여진 대항면 향천리(香川里) 기날저수지 앞에 건립된 2314.15㎡[700평] 규모의 과하주양조장은 송재성이 작고한 이후 아들인 기능보유자 송강호가 이어받아 대를 이은 과하주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데, 그도 지난 1999년 농림부[현 농림수산식품부]로부터 대한민국 식품명인 제17호로 지정받았다.

“과하주는 김천의 물맛과 곰팡이가 잘 생성되는 환경이 조화를 이뤄 빚어 낸 자연의 예술 작품입니다.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4대 명주의 하나인 과하주를 후손들이 잊지 않고 이 고장의 명물로 육성하는 데 여생을 바칠 생각입니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중 연로한 아버지가 과하주 복원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다 못해 귀향한 후 오로지 과하주의 전승과 보급에 매진하고 있는 송강호 명인의 대를 이은 과하주 사랑이 양조장 곳곳에 진한 향기로 배어 있는 것 같았다.

[뒤끝이 없는 김천과하주]

김천과하주는 외관은 밝고 투명한 황갈색을 띠며 곡주 특유의 향기와 감미, 산미가 갖는 부드러움이 특징이다. 특히 손에 묻으면 끈적거릴 정도로 진하여 시간이 지날수록 술이 숙성되는 성질을 가져 여름에도 술맛이 변하지 않는 저장성이 우수해 과하주라는 이름을 얻었다. 또 갈증을 없애 주고 혈액 순환을 원활하게 해 주는 효과가 있으며, 적당량을 장복할 경우 신경통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오늘날 인기를 끌고 있는 소위 아스파라긴 함유 술의 원조라고나 할까.

김천문화원 송기동 사무국장은 2005년 5월 12일자 『경향신문』의 전통주 기행인 「내가 마신 과하주」 편에서, 김천 지역에서 생산되는 찹쌀·통밀·쑥·황국으로 갖은 정성을 기울여서 만든 김천과하주를 처음 대하는 이들은 뒤끝이 없고 은은한 국향(菊香)이 감돌면서 알싸한 신맛이 일품이라고들 한다면서, 곱디고운 황갈색 빛깔의 과하주는 전국 4대 명주의 하나로서 궁중에 진상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 애주가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고 말했다. 송기동은 과하주의 또 다른 매력으로 김천이란 지명을 탄생시킨 역사적 배경을 간직한 금지천이라는 샘과의 관계을 들면서, 삼산이수로 대표되는 김천의 맑고 깨끗한 물이 있었기에 과하주의 탄생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하면서, 과하주가 단순한 술이 아닌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담아 향민과 함께 숙성돼 온 김천의 향기라고 단언하고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08.14 농림수산식품부 지정 명칭 변경 현행화 전통식품 명인 -> 대한민국 식품명인
2011.07.18 2011년 한자 최종 검토 작업 “옛날에 금(金)이 나는 샘(泉)이 있어 금천(金泉)이라 했다. 그 샘물로 술을 빚으면 맛이 향기로웠기 때문에 주천(酒泉)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금을 캐는 부역이 두려워 그 샘을 묻어 버려 지금은 그 장소를 알지 못한다고 한다. 다만 김천의 과하주는 여산(礪山)의 호산춘(湖山春)과 더불어 국내에서 이름 있는 술이 되었는데, 타지 사람들이 금릉 사람에게 술 빚는 방법을 배워 가지만 그 맛은 본토의 술만 같지 못하니 이것은 물이 타지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무릇 특산품이란 각기 자연 환경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예부터 말하기를 아름다운 술은 중국의 난릉(蘭陵)과 신풍(新豊)의 것을 칭송하니 이치가 그럴 법도 하다. 무신년에 김천찰방 배유화(裵幼華)와 방백 심재(沈榟)가 지은 시에 샘 동편의 작은 산을 일컬어 주향산(酒香山)이라 했다[古有生金之泉 故名焉 取基泉之水 而釀酒 則味極香例 故亦曰酒泉 然居基土者 畏基有徵金之役 而埋基泉 故金不知基處云耳 但金泉過夏酒與驪山湖山春搏名於一國 他里人學其方於金陵之人 而其味皆不如本土之酒 比果水之有別於他處耶 凡物各有 所宜之地 自古言美酒必稱蘭陵新豊理或然也 戊申年察訪裵公幼華氏 與方伯沈公梓相 和詩稱其東邊小山 曰酒香山].” ->“옛날에 금(金)이 나는 샘(泉)이 있어 금천(金泉)이라 했다. 그 샘물로 술을 빚으면 맛이 향기로웠기 때문에 주천(酒泉)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금을 캐는 부역이 두려워 그 샘을 묻어 버려 지금은 그 장소를 알지 못한다고 한다. 다만 김천의 과하주는 여산(礪山)의 호산춘(湖山春)과 더불어 국내에서 이름 있는 술이 되었는데, 타지 사람들이 금릉 사람에게 술 빚는 방법을 배워 가지만 그 맛은 본토의 술만 같지 못하니 이것은 물이 타지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무릇 특산품이란 각기 자연 환경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예부터 말하기를 아름다운 술은 중국의 난릉(蘭陵)과 신풍(新豊)의 것을 칭송하니 이치가 그럴 법도 하다. 무신년에 김천찰방 배유화(裵幼華)와 방백 심재(沈榟)가 지은 시에 샘 동편의 작은 산을 일컬어 주향산(酒香山)이라 했다[古有生金之泉 故名焉 取其泉之水 而釀酒則味極香洌 故亦曰酒泉 然居其土者 畏基有徵金之役 而埋其泉 故今不知基處云耳 但金泉過夏酒與礪山湖山春搏名於一國 他里人學其方於金陵之人 而其味皆不如本土之酒 比果水之有別於他處耶 凡物各有 所宜之地 自古言美酒 必稱蘭陵新豊理或然也 戊申年察訪裵公幼華氏 與方伯沈公梓相 和詩稱其東邊小山 曰酒香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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