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04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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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就利山會盟 |
영어음역 | Chwirisan Hwoemaeng |
영어의미역 | The League of Silla and Baekje at Chwirisan Mountai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양종국 |
[정의]
665년 8월 취리산에서 웅진도독 부여융과 신라 문무왕 사이에 맺은 화친의 맹약.
[역사적 배경]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점령당한 뒤 의자왕과 함께 당나라로 끌려간 부여융(扶餘隆)은 백제 태자로서 자신의 위상을 되찾고 백제를 재건하기 위해 당나라와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백제 지역에 친당정권(親唐政權)을 심어놓으려던 당나라는 664년 10월 유인궤(劉仁軌)의 추천이 있은 이후에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임명하였다.
백제 지역의 행정 책임을 맡게 된 부여융은 신라에게 빼앗긴 백제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 철저하게 친당 정책을 고수하였다. 그러나 부여융이 지닌 웅진도독이라는 지위는 신라에 맞설만한 충분한 힘이 없었다. 때문에 당나라는 한반도 내에서 백제의 존재를 신라와 마찬가지로 인정해줌으로써 신라를 압박하고 중국 중심의 국제 질서를 재확립시킬 목적으로, 665년 8월 부여융과 신라의 문무왕 사이의 회맹을 취리산에서 갖도록 했다.
[경과]
당나라는 이미 663년 4월에 신라를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 문무왕(文武王)을 계림주대도독(鷄林州大都督)으로 임명해 놓은 상태였다. 신라 문무왕은 태자 시절에 정복자로서 부여융을 땅에 끓어 앉힌 채 얼굴에 침을 뱉는 등 모욕을 준 바가 있으나, 이제는 당나라의 압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동등한 입장에 서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인원이 주재한 취리산회맹에서 부여융과 문무왕은 백마의 피를 입에 적시면서 화친의 맹약을 맺게 된다.
[결과]
취리산회맹 직후 부여융은 당나라로 가서 고종의 태산 봉선의식(封禪儀式)에 참가하였다. 귀국해서는 계속해서 웅진도독부도독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리하여 비록 공식적으로는 백제 왕이 아니라 웅진도독으로서의 지위이기는 했지만, 백제의 명맥은 신라가 671년 사비성(현 부여)에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기 이전까지 부여융에 의해 한반도에서 유지될 수 있었다.
[의의와 평가]
백제 영역 전체를 차지하려던 신라와는 달리 백제의 명맥을 유지시켜주면서 한반도 내에 중국 중심의 국제 질서가 아무런 문제없이 통용되도록 만들어 놓으려던 것이 당나라의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유인궤가 작성한 취리산맹약문에는 이러한 당나라의 의도가 잘 드러나 있다. 따라서 웅진도독 부여융과 신라 문무왕 사이에 취리산 회맹이 맺어졌다는 것은 자의이건 타의이건 신라 역시 백제의 존재를 인정했다는 의미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