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06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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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公州牛禁峙戰蹟 |
영어의미역 | Ugeumchi Battle Site |
이칭/별칭 | 우금치 전적지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금학동 산78-1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이해준 |
문화재 지정 일시 | 1994년 3월 17일 - 공주 우금치 전적 사적 제387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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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공주 우금치 전적 사적 재지정 |
성격 | 사적지 |
원건물 건립시기/일시 | 1973년 |
지정면적 | 5만 1896㎡ |
소재지 주소 | 충청남도 공주시 금학동 산78-1 |
소유자 | 충청남도 공주시 |
관리자 | 충청남도 공주시 |
문화재 지정번호 | 사적 |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금학동에 있는 동학농민운동 격전지.
[개설]
공주 우금치 전적은 1894년 11월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을 상대로 항전을 전개한 곳이다. 전봉준이 지휘하는 농민군은 1894년 9월 재봉기 이후 논산에 머물며 공주를 공격 목표로 설정하는 작전을 세웠다. 당시의 공주는 충청도 감영(監營)이 있는 곳이었고, 또 우금치는 공주에서 부여 방면으로 넘어가는 높은 고개이기에 일단 이곳을 장악하면 승리의 기선을 잡을 수 있는 중요한 곳이었다.
약 3만을 헤아린 농민군은 일본군 200명을 포함한 약 2,500명의 관군과 1894년 10월 23일부터 이인(利仁), 효포(孝浦), 웅치(熊峙) 등지의 싸움에 이어 11월 8일 드디어 우금치에서 결전을 벌였다. 그러나 고개로의 진격 후퇴를 무려 40~50차례를 거듭한 혈전 끝에 거의 전멸하였다. 이 싸움 후 재기를 노린 전봉준은 체포되어 이듬해 3월 처형됨으로써 1년 동안 전개된 동학농민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변천]
우금치의 결전은 1주일 밤낮으로 계속되었는데 약 3만 명을 자랑하던 동학군이 겨우 천여 명만 살아남는 참패를 당하고 이곳에서 최후를 맞이하였다. 동학군의 넋을 달래기 위해 1973년 11월 천도교 공주교구에서 우금치고개를 정화하고 동학혁명위령탑을 세웠다.
[위치]
공주시청에서 우측 방향으로 약 1.65㎞ 가다 보면 우금치사거리가 나온다. 여기에서 우측 방향으로 공주 우금치 전적이 위치해 있다. 즉 공주에서 부여로 넘어가는 길목인 견준산 기슭, 40번 국도변의 우금치고개 일원으로, 제2차 동학농민운동의 최후·최대의 격전지이다.
[현황]
공주 우금치 전적지에는 동학혁명위령탑이 세워진 이후 동학농민전쟁 100주년 기념으로 1994년 우금치기념사업회에서 제작한 조형물을 전시해 놓았다. 1994년 3월 17일 사적 제387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사적으로 재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공주 우금치 전적은 동학농민군이 반봉건·반외세의 뜻을 걸고 마지막 항전을 치렀던 장소로 한국 근대사의 한 고비를 잇는 큰 무대로서 뜻이 깊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