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09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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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烇 |
영어음역 | Yun Jeon |
영어의미역 | Yun Jeon |
이칭/별칭 | 정숙,후촌,충헌,윤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유평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해준 |
[정의]
조선 중기 충청남도 공주에서 활동한 문신.
[가계]
본관은 파평(坡平). 초명은 윤찬(尹燦), 자는 정숙(靜叔), 호는 후촌(後村)이다. 병사(兵使) 윤선지(尹先智)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윤돈(尹暾)이며, 아버지는 증참판(贈參判) 윤창세(尹昌世)이며, 어머니는 청주경씨(淸州慶氏)로 부제학 경혼(慶渾)의 딸이다. 아우는 문정공(文正公) 윤황(尹煌)이다. 부인은 해평윤씨(海平尹氏)로 첨지(僉知) 윤환(尹晥)의 딸이며, 아들은 윤원거(尹元擧)이다.
[활동사항]
윤전은 1610년(광해군 2)에 과거에 급제한 후 승문원박사, 전적(典籍), 감찰(監察)을 거쳐 1615년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위경(李偉卿) 등에 탄핵을 받아 파면되고 사판(仕版)에서 삭제되었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경기도사(京畿都事)로 복직되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곧 인조가 있는 공주로 가서 공조정랑이 되었으며, 환도 후 1626년(인조 4) 지평이 되었다. 이 때 대사헌 박동선(朴東善)과 함께 관가와 사대부가의 연료 독점에 대한 백성의 원성을 대변하였다. 이듬해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시종(侍從)하지 못했다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으나 호소사(號召使) 김장생(金長生)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강화로 들어가 분병조정랑(分兵曹正郎), 공조정랑,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예빈시정(禮賓寺正)을 역임하고, 이후 익산군수를 지냈다.
1633년 종묘서령(宗廟署令),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등을 지내고, 1636년 병자호란 때 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으로 빈궁(嬪宮)을 배종(陪從)해 강화에 들어갔다. 그러나 성이 함락되자 식음을 폐하고 송시영(宋時榮), 이시직(李時稷) 등과 함께 자결을 결의하고 시도했으나 적병에 의해 피살되었다.
[학문과 사상]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묘소]
묘소는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충렬사(忠烈祠), 연산(連山)[현 충청남도 논산시의 옛 지명]의 구산서원(龜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이후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유평리에 사우가 세워져 매년 제향되고 있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