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09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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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明誠 |
영어음역 | Yi Myeongseong |
영어의미역 | Yi Myeongseong |
이칭/별칭 | 경장(敬章),송은(松隱),문성공(文成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경수 |
[정의]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 공주 출신의 지사.
[가계]
본관은 공주(公州). 자는 경장(敬章)이고, 호는 송은(松隱)이다. 할아버지는 첨의정승 이사손이고, 아버지는 전공판서 충청공 이엽(李曄)이다.
조선 각 시기에 간행된 읍지류에 등록된 가문을 보면, 공주이씨는 전주이씨를 비롯하여 부안임씨, 김해김씨, 여흥민씨 등과 더불어 공주의 유력 성씨 및 명족의 하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공주이씨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공주 성씨조에 가장 먼저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큰 성씨이며, 이씨 중에서도 가장 큰 성씨이다. 이명덕(李明德)의 후손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백의종군하여 대승한 이천장(李天章)이나 부산이 위급함을 알고 출전했다가 순절하여 부산 충절사에 배향된 이연헌(李延憲) 등의 기록, 또는 향교에 등재되어 있는 공주이씨의 수, 명국삼장비(明國三將碑)에 기록되어 있는 공주이씨에 대한 기록 등으로 미루어 볼 때, 17세기 중반에 지역에서 커다란 세력을 형성했으며, 1851년 명탄서원의 중건으로 다시 활동이 두드러진 것으로 보인다.
[활동사항]
고려 후기에 적성감무(積城監務)를 역임하고 내직으로 감찰어사에 올랐다. 목은 이색(李穡)의 문인이며, 정몽주(鄭夢周)와 교유하였다.
고려가 망하자 “나라가 망함에 있어 이를 구하지 못하면 충이 아니요, 어버이가 늙었는데 이를 부양하지 못하면 효가 아니다. 그러나 고국의 의리는 중하고 노모의 은혜는 가볍다”라고 하면서, 벼슬을 버린 후 동생 이명덕에게 어머니를 맡기고 정몽주와 만월대에서 이별하고 강원도 이천(伊川)의 산중에 은거하였다.
그럼에도 이명덕은 1396년(태조 5) 문과에 급제한 후 예문관과 사헌부, 춘추관, 의정부, 승정원 등에서 관직을 두루 지내다가 판중추원사까지 지내었다.
조선 개국 후 초목과 벗 삼아 고려를 향한 마음을 지키라는 뜻으로 모든 아들의 이름에 ‘초(艸)’변을 붙여 ‘근(筋)’, ‘말(茉)’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학문과 사상]
이색의 문인으로 정몽주 등과 교유한 바가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말 성리학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묘소]
묘소는 대전광역시 중구 정생동에 있다. 정생동은 이명덕이 이곳에 살았기에 그의 호인 ‘사봉(沙峯)’을 따서 ‘사봉골’이라고 하였고, 그가 죽은 후 이 마을에 묻히자 그에게 추증된 벼슬을 따서 정승골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정승이 살았다고 하여 ‘정생동’으로 변한 것이다. 묘는 중간에 실전되어 형 이명성과 함께 공주 명탄서원 뒤에 가묘를 세웠다가 1997년 다시 정생동으로 옮겼다.
[상훈과 추모]
절의정신의 표상으로 충청남도 공주시 월송동 명탄서원에 배향되었다. 고려 후기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으로 추앙되고 있다. 시호는 문성공(文成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