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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0970
한자 尹拯
영어음역 Yun Jeung
영어의미역 Yun Jeung
이칭/별칭 자인(子仁),명재(明齋),유봉(酉峰),문성(文成)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경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학자
성별
생년 1629년연표보기
몰년 1714년연표보기
본관 파평(坡平)

[정의]

조선 중기 충청남도 공주에서 활동한 학자, 문신.

[가계]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자인(子仁)이고, 호는 명재(明齋)·유봉(酉峰)이다. 할아버지는 윤황(尹煌)이고, 아버지는 윤선거(尹宣擧)이다. 어머니는 공주이씨(公州李氏)로 이장백(李長白)의 딸이고, 부인은 안동권씨권시(權諰)의 딸이다. 아버지 윤선거성혼(成渾)의 외손이므로 가학(家學)이 성리학이었다.

[활동사항]

효종(孝宗) 말년 학업과 행실이 뛰어나 조정에 천거되었고, 1663년(현종 4) 35세에 공경(公卿)과 삼사(三司)가 함께 천거하여 이듬해 내시교관에 제수되었다. 이후 공조랑·사헌부지평에 잇달아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669년 아버지가 죽었는데, 『주자가례』에 따라 극진히 상을 치렀다.

1680년(숙종 6) 김수항(金壽恒)민정중(閔鼎重)숙종(肅宗)에게 상주하여 윤증을 경연에 부르도록 청했으며, 나중에는 별유(別諭: 임금이 내린 특별한 유지)를 내려 부르기도 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이때 박세채(朴世采)가 같이 국사를 논할 것을 청하고, 부제학 조지겸(趙持謙) 역시 성의를 다해 올라오도록 권하였다. 1682년 호조참의, 1684년 대사헌, 1695년 우참찬, 1701년 좌찬성, 1709년 우의정, 1711년 판돈녕부사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나가지 않았다.

그의 활동 중 주목되는 것은 예송 논쟁을 비롯하여 송시열(宋時烈)과의 갈등 대립 및 당파의 분파일 것이다.

예송 사건이 당파와 연계되면서 윤증윤선거는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그뿐 아니라 묘지명 사건과 결부되면서 정치적으로는 노론·소론의 분파를 초래하고, 같은 율곡학파 내에서 윤증송시열이 결별함으로써 사제간의 의리까지 단절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정치적 진로를 달리할 뿐 아니라 이념적으로도 송시열과는 구별되는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하였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졌을 때, 송시열을 지지하는 쪽이 노론이 되고 윤증을 지지하는 쪽이 소론이 되었다. 윤증은 아버지가 죽은 지 4년 뒤인 1673년(현종 14) 연보와 박세채가 쓴 행장을 가지고 송시열에게 가서 묘지명을 부탁하였다. 그 때 송시열은 강화도의 일(병자호란 때 윤선거가 처자를 데리고 강화도로 피난하였는데, 청나라 병사가 입성하자 처자와 친구는 죽고 자기만 진원군을 좇아 성을 탈출한 사실)과 윤휴(尹鑴)와 절교하지 않은 일을 들먹이며, 묘지명을 짓되 자기는 윤선거에 대해 잘 모르므로 오직 박세채의 행장에 의거해 말할 뿐이라고 하였다.

윤증이 죽은 이에 대한 정리가 아니라며 고쳐 주기를 청하였으나, 송시열은 자구 만 수정할 뿐 내용은 고쳐 주지 않았다. 이로부터 윤증송시열의 인격을 의심하고 비난하기 시작함으로써 사제간의 의리가 끊어지게 되었다.

윤증은 53세 이후 무실(務實)과 실심(實心)을 강조하며 송시열의 명분주의와 일정한 선을 긋는 데서 학풍의 변모를 보였다. 성리학의 기본 틀은 율곡과 함께 하면서도 성리의 사변적 탐구보다는 유학 본래의 자기 수양과 위기지학(爲己之學: 자기 자신의 본질을 밝히기 위한 학문)을 지향하며, 이론보다는 실천, 명분보다는 실리를 중시하는 무실학풍을 연 것이다.

[학문과 사상]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윤황과 아버지 윤선거의 슬하에서 학문의 기초를 닦았다. 14세 때 아버지의 학문적 동지였던 유계가 3년간의 유배 생활을 마치고 금산에 자리 잡자 그의 문하로 들어갔다. 이때 경서와 사서를 두루 섭렵하였고, 시와 문장에도 능하게 되었다. 19세 때 권시의 딸과 혼인하면서 그의 문하에 들어갔고, 23세 때 김집의 문하에, 이듬해에는 송준길(宋浚吉), 26세 때인 1654년에는 조익(趙翼), 29세 때에는 송시열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독실하게 공부하였다.

그의 이름을 듣고 공부를 청하는 자가 많아지자, 주자의 한천고사(寒泉故事: 주자가 어머니 묘소 곁에 한천정사를 세우고 학자들과 담론하기도 하며, 여동래와 함께 『근사록(近思錄)』을 편찬한 일을 말함)를 모방해 거상 중에도 강학하였다. 거상이 끝난 뒤 아버지와 큰아버지를 추모하여 종약(宗約)을 만들고 모임을 결성해 학사(學事)를 부과하기도 하였다.

또한 『현종실록(顯宗實錄)』권21 14년 2월 정묘조에 “윤증박세채는 모두 위기지학에 뜻을 두고 있으므로 조정 신하로서 문학에 있어 두 신하보다 나은 자가 없을 것이니, 만약 춘방관을 겸대하게 하면 또한 반드시 보익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라는 내용으로 미루어 윤증의 문학적인 능력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할아버지 윤황이 우계학파의 조종 성혼의 사위였던 사실에서 볼 때 우계학파의 적통을 이었던 사상적 연관성을 살필 수 있다. 즉 창녕성씨의 가학 전통으로 이어진 우계학풍이 파평윤씨 가학으로 계승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학통이 손자인 윤증에게 계승되면서 이른바 소론파 유학이 정립되었다. 즉 그는 ‘소론의 영수’로 이른바 ‘소론 성리학’의 중심인물이었으며, 평생을 재야에서 학문 연구와 강학에 힘쓴 순유(醇儒)였다.

[저술 및 작품]

시문집 『명재유고(明齋遺稿)』가 전한다.

[묘소]

묘소는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향지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지방 유림들의 합의로 홍주[현 충청남도 홍주군의 옛 이름]의 용계서원, 노성[현 충청남도 논산 지역의 옛 이름]의 노강서원, 영광의 용암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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