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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청년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0989
한자 公州靑年會
영어음역 Gongju Cheongnyeonhoe
영어의미역 Gongju Young Man's Association
이칭/별칭 공주민중청년회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진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청년단체
설립연도/일시 1925년 11월 29일연표보기
해체연도/일시 1932년연표보기
설립자 윤귀영|배상인 등

[정의]

1920년대 충청남도 공주 지역에 있었던 청년 단체.

[설립목적]

민중 본위의 합리적인 신 사회 건설의 역군이 될 만한 훈련과 교양에 노력하고, 조선 민중의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진하며, 단결을 공고히 하여 일체의 파벌주의를 근본적으로 배제하기 위하여 설립하였다.

[변천]

공주 지역의 청년회 혁신 운동은 1925년경부터 전개되었다. 1925년 11월 29일 결성된 공주청년회는 1928년 집행위원 전원이 사임하는 등 내부 분열이 야기되었다. 청년 운동의 원로인 유정현·김수철·황인식·민영용·나시영·오경달 등이 긴급 임시 총회를 소집하고 회관 부속 건물을 750원에 매각하는 등 채무 문제 해결에 노력하였지만 일제의 집회 금지 조치로 총회도 개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929년 7월 23일 서면 대회를 통하여 임원진을 개선하고 조직을 재정비하여, 집행위원장에 윤귀영, 위원에 윤홍중·김진철·이강하·장순임 외 5명을 선임하였다. 8월 6일에는 1929년도 제1회 집행위원회를 개최하여 부서 배정 건, 회원 원유회 개최 건, 반회 조직 건 등을 의결하고, 조직을 재정비하여 서무부 윤홍중·한덕근, 재정부 김진철·김정태, 선전교육부 이강하·안병두·정수진, 체육부 황인규·황준봉, 여자부 장임순 등을 선임하였다.

그러나 8월 11일 공산성 원유회에서 세계 약소 민족 만세 구호를 외쳤다는 혐의로 집행위원장 등 주요 인사가 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금되었고 이후 공주경찰서는 청년회 주최의 모든 집회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탄압하므로 공식적인 활동을 거의 할 수가 없었다. 1931년에는 회관의 수축을 위하여 월 연금(매월 20전)을 징수하고 회원의 노동력으로 공사를 마칠 정도로 쇠락하였으며, 1932년 3월 안병두 등의 적색비사사건을 계기로 공주청년회는 거의 해체 상태에 이르렀다.

[활동사항]

1925년 11월 29일 청년수양회 총회에서 조직의 명칭을 공주(민중)청년회로 변경하고 혁신 총회를 개최하여 회장제를 위원제로 변경하는 등의 내용을 결의하였다. 이는 당시 『조선일보』·『동아일보』·『시대일보』 3대 신문의 공주지국 기자들인 윤귀영·배상인 등이 주도한 것이다.

이들은 1925년 9월에 창립한 호서기자동맹을 통하여 중앙의 청년회 혁신 운동의 영향을 받으며 공주기우단을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7년 5월 총회에서 혁신 청년들이 주도권을 장악하기까지는 유정현·서범순·김수철·김영배 등의 청년 유지들이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6월 22일에 집행위원회에서 경성조선청년총동맹 가맹, 신간회 공주지회 결성 원조, 경성 청년 운동가 초청 혁신 신념 강연 개최, 도 평의원 홍재흥의 우성수리조합에 대한 비행과 풍기 문란에 대한 진상 조사, 중국인 가주한의 소년 능욕 사건, 잡화상 일광당의 부정 상행위 등을 논의하였다.

이어 12월 임시총회에서 당회 강령에 배제되는 회원으로 공직자(서범순·이범규 등 면협의원) 등 외 18인의 자격 심사 문제, 회원의 연령 제한 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1928년부터 청년회 혁신 운동의 본격화에 따른 내부 분열과 경찰의 활동 저지로 청년회 활동은 점차 약화되어 갔다.

[의의와 평가]

공주청년회는 일제 식민 지배 체제하에서 공주 지역 청년들이 혁신 운동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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