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19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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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公州永明高等學校 |
영어의미역 | Gongju Yeongmyeong High School |
이칭/별칭 | 영명학교 |
분야 | 문화·교육/교육 |
유형 | 기관 단체/학교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중동 318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일주 |
성격 | 사립 고등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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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연도/일시 | 1906년 10월 15일 |
설립자 | 프랭크 E. C. 윌리엄스 |
전화 | 041-854-3384 |
팩스 | 041-853-9781 |
홈페이지 | 공주영명고등학교(http://www.ymhigh.cnehs.kr) |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중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
[교육목표]
기독교 사랑을 실천하는 도덕인, 수준 높은 학력을 지닌 지식인, 올바른 가치관을 가진 지성인, 튼튼한 체력과 정서를 갖춘 건강인을 육성한다. 교훈은 박애·진실·면학이다.
[변천]
공주 지역에 공주영명고등학교가 설립된 것은 1904년 샤프 목사가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로 공주에 오면서부터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의 노골적인 침략에 직면해 있었고, 이듬해인 1905년 을사조약으로 자주권을 상실한 채 암울한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는 많은 한국인들이 희망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샤프 목사는 1905년 ‘명설학교’라는 교명을 걸고 학생 몇 명에게 초등학교 교육을 가르쳤다. 그러나 제대로 된 시설을 갖추지 못하였고 정부로부터 인가된 학교도 아니었다.
1906년 샤프 목사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공주 지역감리교 선교사로 부임한 윌리엄스 목사가 학교를 다시 열었다. 윌리엄스 목사는 교명을 ‘중흥학교’라고 바꾸고, 학생 15명을 모집하여 교육을 재개하고 제도를 정비하는 등 학교를 중흥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결과 1909년 7월 26일 ‘영명학교’라는 새로운 교명으로 대한제국 정부의 학부대신으로부터 설립 인가를 받았다.
초기에는 보통과(초등학교 과정)만을 두었다. 1908년 세 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했다. 세 명 중에는 해방 후 초대 충남도지사, 초대 군산해양대학장, 초대 영명중·고등학교 교장 등을 역임한 황인식이 있었다. 1909년 2회 졸업생에는 광복 후 미군정 때 경무국장이었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있었다.
1912년 고등과(병설)를 설치하였고, 1916년에는 보통과를 폐지하고 4년제 고등과만을 운영하였다. 영명학교는 공주 지역항일 운동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1919년 4월 1일에 일어난 공주 읍내 독립 만세 운동은 영명학교 교사와 학생이 중심이 되어 전개한 것이었다. 영명학교 교사 김관희 등 3명과 학생 양재순 등 6명이 주도하여 공주 읍내에서 독립 만세 운동을 일으켰다.
영명학교는 1929년의 광주학생항일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영명학교 학생들은 동맹 휴학을 결의하였고 이로 인해 7명의 학생들이 구속되었으며, 황인식 등 교사 두 명은 선동자로 몰려 구속되었다. 이후 일제는 영명학교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강화하였다. 학교 운영이 어려워지자 윌리엄스 교장은 1932년 영명여학교와 영명학교를 통합하여 영명실수학교로 개편하였다. 이때부터 영명학교는 남녀 공학이 되었다.
일본은 태평양전쟁에 앞서 한국 내 미국인을 모조리 추방하였는 데, 1940년 윌리엄스 교장이 강제 출국당했고, 1942년에는 적국인이 세운 학교라는 구실로 폐교 조치가 내려지게 되었다. 이로써 영명학교는 1949년 복교될 때까지 만 8년간 교문이 닫힌 채 폐허가 되었다. 영명학교는 폐교될 때까지 36년 동안 533명(남자 313명, 여자 22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광복 후 영명학교를 다시 열어야 한다는 지역 사회의 요구와 동문들의 열망으로, 1949년 12월 1일 설립 인가되어 복교하였다. 하지만 열악한 학교 시설과 공주 지역학교 현황 등 현실적인 제약으로 인문계 학교가 아닌 공주영명상업중학교라는 이름으로 초라하게 복교되었다.
1951년 8월 30일 상업계 학교에서 인문계로 전환하고 교명을 영명중·고등학교로 변경하는 한편,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분리하였다. 학교 시설과 학생들의 학력도 꾸준히 성장하여 1970년에는 충청남도 교육위원회에 의해 도내 최우수 사립학교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1974년에는 미국 선교회의 도움으로 본관 건물을 신축하였고, 1979년에는 여학생부를 신설하여 남녀 공학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그 동안 영명학교를 거쳐나간 수많은 동문들은 종교계·정치계·교육계 등 사회 각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1988년 5월 30일 본관을 신축·준공하였다. 2006년 10월 14일 개교 10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2012년 제8대 이기서 교장이 취임하였다. 2015년 제95회 졸업생을 포함하여 총 15,37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교육활동]
인성 교육을 강화하기 위하여 기본 생활 습관 지도, 기독교를 통한 사랑과 효의 실천, 다양한 인성 개발 프로그램 운영 등의 교육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또한 면학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하여 자율 학습의 습관화, 도서관 이용의 생활화, 특기 적성 교육의 활성화 등의 교육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학생 수준에 맞는 수업 전개, 장학 활동의 활성화, 실험 실습의 내실화를 도모하고, 학생들의 적성 개발, 올바른 정체성 확립, 가치관 확립을 위한 교육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교가와 상징물]
1. 교가(작사 임강민/ 작곡 이종린)
앞에는 봉황산이 우뚝 서 있고/ 앞으로 금강물이 흐르는 곳에/ 덕지체 민주교육 키워나가니/ 장엄타 그 이름 우리 영명학교일세.
2. 교표: 개교 100주년을 앞두고 과거의 전통을 잇고, 미래로 향하는 진취적 기상을 담아내기 위해 과거의 교표 디자인을 기본으로 하여 학교의 설립 정신을 담아내고 미래지향적 기상을 표현하였다.
3. 교기: 교표를 디자인한 교기를 주요 교육 활동 및 행사 시 게양함으로써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미래 사회의 주역이 될 유능하고 성실한 인재를 기른다는 학교의 의지를 표하고, 교직원과 학생들의 학교애와 단결심을 기른다.
4. 교목: 은행나무이다.
5. 교화: 진달래이다.
6. 교조: 독수리이다.
[현황]
2015년 4월 1일 기준 총 21학급에 557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다. 교직원은 교장 1명, 교감 1명, 교사 42명, 그리고 행정 담당 및 일반직 16명 등이 근무하고 있다.